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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8)화 (8/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8화

* * *

그게 지난밤, 다프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눈앞에는 누군가의 가슴이 보였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자의 맨 가슴 말이다.

“……헉!”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만 다프네는 얼른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애써 침착을 되찾은 후에는 탄력이 느껴지는 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 그 몸 어딘가에 지금 상황을 설명해 줄 단서가 남아 있지 않은가 싶어서.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그냥 잘 단련된 신체였을 뿐, 다프네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용기를 내어 이제 저 아름다운 몸을 지닌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사실 확인하지 않아도 왠지 알 것 같았지만, 무엇이든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다프네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

그녀는 조금 전에 ‘함부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슬픈 예감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말해 뭐 하겠는가. 리암이었다.

그와 그녀는 다섯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 간밤에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난 생의 다프네의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리암이나 다프네나 어린애나 다름없는데, 뭔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옷은 벗고 자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순간 과거로 돌아온 것도 잊고, 소리를 지를 뻔하지 않았나.

……남편이 찾아온 줄 알고.

물론 그가 다프네의 침실로 오는 일도 없었고, 다프네가 그를 기다린 적도 없지만 말이다.

“……다행이다.”

지금이 과거가 아니라서 다행이고, 또 간밤에 별일이 없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방해되었는지, 눈을 뜬 리암의 보라색 눈동자가 느릿느릿 초점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안녕.”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인사했고, 다프네는 얼른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주인과 한 침대에 늘어진 채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좀 이상하니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향기에 약하거든, 나.”

“제 방에 비누 제조사 명함이 있습니다.”

“나중에 줘.”

“예.”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 후, 다프네는 슬금슬금 뒤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 침대에서 벗어나야 했다.

“어디 가?”

“출근하러 갑니다.”

“아아, 괜찮아.”

그는 제 곁에 놓인 여분 베개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누워.”

그건 권유 같기도 했고, 명령 같기도 했으며 동시에.

“게으름 피워.”

끔찍할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기도 했다.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라니, 모든 고용된 자의 열망 아니던가.

“늘어지게.”

하지만 다프네는 정신을 차리며 살살 고개를 저었다.

“휴식을 허락해 주신다면, 제 방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습니다만.”

“아셔 마플이 그대를 가만히 둘까?”

“……안 두겠죠.”

그는 다프네가 누운 시간을 1초도 빠짐없이 계산하여 봉급에서 제하려고 들 것이다.

리암이 ‘거 봐, 그렇지?’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누워. 조금 있으면 식사도 올 테니 먹고 가는 게 좋겠군.”

“하지만…….”

그래서야 사람들이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을까? 다프네가 공작님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현장을 목격한다면 말이다.

“설마, 그런 건가?”

리암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내가 지나치게 근사해서,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 그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반할 것 같은…… 뭐, 그런 거.”

다프네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 심장에 그런 치욕적인 누명을 씌우지 마십시오!”

“으음? 나, 꽤 인기 있는데…….”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기에, 다프네는 얼른 침대에 바로 누웠다.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지 못한 상대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이.

“아시겠습니까? 전 아무 감정 없습니다.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죠?”

그녀가 으스대며 이야기할 때.

마침 침실의 문이 열렸다. 나타난 것은 아셔였다.

“드디어 이 방에서 공작님께 아침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

거기까지 이야기한 아셔의 말이 잠시 멈추었다. 침대에 있는 다프네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

그의 얼굴이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이야기를 끝맺지도 않고 조용히 방을 나가 버렸다.

다프네는 그가 말도 안 되는 오해에 빠졌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그야 열아홉 살 혈기 왕성한 나이에 보면 이상하게 보일 법도 하겠지!

다프네는 곧장 리암 쪽을 돌아보았다.

몸을 일으킨 그가 어째 조금 즐거워하는 듯한 얼굴로 한쪽 어깨를 으쓱거였다.

“드디어 염문설이군.”

……저 인간이!

* * *

다프네가 방으로 돌아와 보니, 아셔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대우였으니, 다프네는 일단 사실관계부터 밝혔다.

“결백합니다.”

“짐 싸세요.”

“공작님께서 주무시기 어려워하셔서…….”

“짐 싸세요.”

“아니 그게.”

“짐 싸요!”

“옆에 눕기만 했는데.”

“짐!”

그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이젠 아예 침대 아래에서 다프네의 가방을 꺼내어 직접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이래서 남동생 쪽이 와야 한다고 한 겁니다! 맙소사, 가장 가까워야 할 수행원 자리에 대체 누가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을…… 아니, 다른 성별을 둔 답니까!”

마플의 처절한 외침에서 다프네는 뭔가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아마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기분이 지금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의 절규는 계속되었다.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또 이렇게 당치 않은 오해라도 생기면 어쩔 겁니까? 당신의 명예는요?!”

그는 아마 다프네가 혼인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했다.

명예가 실추된 사람을 안주인으로 맞을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제 걱정은 고마운데요.”

“누가 당신 같은 사람을 걱정한답니까?!”

그는 자리에서 펄쩍 뛰고, 나중에는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이제 됐습니다! 짐은 나중에 부쳐 드릴 테니, 일단 나갑시다!”

그는 다프네의 손목을 붙잡고는 1층 뒷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걷느라 온몸이 휘청거렸다.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 노력도 해 보았지만, 얼마나 세게 붙잡아 당기는지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가 뒷문을 벌컥 밀어 열자, 놀랍게도 그 앞에는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서 있는 차량이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정리된 모양이지?”

공작이 팔을 뻗어 문을 열어 주며 묻자, 아셔는 다프네를 거의 던지다시피 하여 차에 구겨 넣었다.

“짐은 나중에 보내드릴 겁니다!”

“……좋은데?”

탁!

아셔는 서둘러서 문을 닫아 버렸다. 동시에 공작이 액셀러레이터를 강하게 밟았다.

두 사람 모두 다프네가 차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무척 애를 쓰는 모양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레 쫓겨나게 된 다프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공작에게 따져 물었다.

“걱정하지 마, 하인으로 일한 값은 확실하게 쳐 줄 테니.”

공작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받아서 열어 보니 넉넉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그건 좋았다. 아니, 좋지 않았다.

“정말로 제가 돌아가길 바라십니까? 어제와 이야기가 다릅니다!”

다프네는 제 손을 붙잡았던 어젯밤의 그를 떠올렸다. 리암은 확실하게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다프네는 그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염문설이 난 것도 아닙니다. 마플 씨는 그런 일을 떠들고 다닐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다프네의 주장에도 그의 자동차는 저택과 멀어져 시내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프네도 점점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래서야 공작이 정말로 사무엘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닌가!

“전 억울합니다. 애초에 그건 공작님이 꾸민 덫이었다고요!”

“…….”

“없는 염문설을 만들어서 성실히 일한 사람을 내쫓으시다니! 이 사악한!”

“…….”

“전 정말로 공작님의 수행원이 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란 말입니다!”

다프네는 온몸을 들썩거리며 열심히 제 주장을 이어 갔으나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더욱 빨라진 자동차의 속도뿐이었다.

……신문물은 이래서 싫었다! 마차가 좋은데! 다급해진 다프네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열렬하게 외쳤다.

“제 아버지께 맹세코 공작님께서 시키시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끼익.

갑작스런 급정지에, 다프네의 몸이 앞으로 크게 기울어졌다가 곧 반동으로 등받이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까, 깜짝…….”

휘둥그레진 눈으로 곁을 돌아보니, 줄곧 전방만 주시하던 리암이 그녀를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왜, 왜 웃으시죠?”

“내려.”

“……네?”

“내리라고.”

그는 다프네의 앞쪽으로 상체를 깊이 숙였다. 서로 가슴이 닿을 듯 스쳐 지나갈 때, 그가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뭐든 하겠다…… 며?”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프네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

리암의 표정과 목소리는 너무나도 진지했다. 아침의 장난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어제는 분명히…….’

이렇지 않았던 것 같다.

다프네가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순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새삼 지난 생이 떠올랐다.

「누가 너 같은 것을……!」

그 끔찍했던 고함이 귀에 맴돌자 그녀는 곧바로 어깨를 움츠렸다.

‘하긴…… 누가 나 같은 걸 필요로 하겠어.’

다프네는 푹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차라리 사무엘을 데리고 국외로 도망갈까.

하지만 가문 간의 맹약을 깨트린 죄로 더욱 커다란 저주가 찾아오면? 그것이…… 사무엘을 다시 화염 속으로 빠트리게 된다면?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그 아이는 지난 생에서 이미 삶을 잃었다.

이 세상에 ‘공평’이라는 정의가 살아 있다면, 이번에 삶을 잃는 것은 그녀여야 했다.

반드시.

“언제까지 서 있기만 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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