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5화
다프네가 그 종이를 바라보며 이를 가는 것도 모른 채, 아셔가 걱정스레 말했다.
“예, 한 달 안에 그를 찾고, 공작 위의 승계도 마치려면 제법 바쁠 겁니다.”
“엠버혼에서의 사고 시점으로부터 생각해 보면 약 3주의 여유가 있는 셈인가.”
“그렇습니다. 다프네 서튼 양의 주장대로 그녀를 공작님의 수행원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군.”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프네는 황급히 찻잔을 내려놓고 리암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도 공작님의 수행원이 될 수 있습니다! 두 가문이 정한 규칙에 따르면…….”
“성별에 따른 규정은 없다.”
리암은 웬일로 장난기 어린 얼굴을 지우고, 제법 진지하게 그녀와 마주했다.
“그런데도 슬로언과 서튼은 같은 성별만을 고집했지. 그 이유를 아나?”
심각한 리암의 뒤로 아셔가 두 팔을 미친 듯이 휘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프네에게 조금 전의 ‘그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다프네는 물론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주인과 수행원 사이에 연정이나 육체관계가 발생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라도 생기면 더욱 복잡한 사태가 될 테죠.”
“글쎄…….”
그는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눈초리를 살짝 늘어뜨렸다.
“아이는 항상 축복이지, 서로 연정이라도 품은 상태라면 더욱더. 나는 그 제한을 ‘서튼’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해.”
“보호…… 말입니까?”
“그래, 충성의 맹약을 맺은 슬로언의 명령은 서튼에게 ‘강제력’을 갖게 되지. 뭐, 나도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그건 다프네도 들은 적이 있다.
슬로언이 ‘명령이다.’라는 말을 덧붙인 요구에 대해, 서튼은 반드시 이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유혹이 있을까. 아마 난 참지 못할걸.”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왔고, 다프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제게 그런 것을 명령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다프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설마, 정말로 내가 네게 마음이라도 있어서 혼인을 청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시간을 돌리기 전의 결혼 생활이 이런 일에 도움이 될 줄이야. 다프네는 살짝 떨리는 두 손을 얼른 맞잡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는 누군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 있게 건넨 이야기에 리암의 얼굴에 잠시나마 놀라움이 깃들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아주 다른 답이 돌아온 것에 놀란 모양이다.
“재미있네, 다프네 서튼.”
한참 만에 그리 답한 리암은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거렸다.
“음…… 그럼 이렇게 할까. 아셔, 던컨에게 필요한 인력이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나?”
“물론 확인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인이라면 모를까, 하녀들은 충분하다고 하는군요.”
아셔는 ‘그러니까 어서 저 여자를 내쫓으세요!’라고 외치고 싶은 듯했다.
“좋아, 그럼 다프네 서튼을 하인으로서 고용하지.”
“네?!”
아셔와 다프네는 동시에 큰 소리로 되물었다. 하인이라니?
“마, 말도 안 되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저 여자가 어떻게 하인 일을 한단 말입니까?”
“문제 될 건 없잖아, 이 저택에 성별에 관한 규정은 없으니.”
“규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업무 내용의 문제인가? 괜찮을 거야. 꽤 튼튼한 사람 같으니까.”
“그, 그게 아닙니다. 서튼 양을 하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녀의 거처를…….”
“그야, 하인들의 숙소를 써야겠지. 마음에 들 거야. 깐깐한 아셔 마플도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공작님은 지금 서튼 양을 남자 사용인들과 같은 층에서 재우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절망적으로 외치는 아셔의 얼굴은 불에라도 달군 것처럼 붉어지고 말았다.
“괜찮지 않나? 어차피 다프네 서튼은 누군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
“…….”
“아셔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아셔가 기가 막혀 아무 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 리암은 다시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술 끝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엿새를 주겠어, 서튼 양.”
“대체 그게 무슨 종류의 기회입니까?”
“그야, 그대가 여기에 머물게 될 기회지.”
리암은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엿새 동안 그대가 충족시켜야 할 조건은 두 가지야.”
“말씀하세요.”
“하나는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 무엇이든 상관없어. 그저 내가 만족하기만 하면 돼.”
좀 까다로운 주문 같지만, 다프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고용인으로서 주인의 기분을 맞춰 주는 일은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간단해. 이 저택의 누구와도 염문이 나지 않을 것.”
“……예?”
“단순히 그대의 말을 검증해 보려는 거야. 아무도 그대에게 연심을 품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프네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긴 한데, 그걸 굳이 시험까지 해 볼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다면 두 번째 조건은 그대에게 무척 간단한 것이 되겠군. 그렇지?”
“그…… 그렇겠죠?”
“좋아, 약속 성립이군.”
“자, 잠깐만요!”
다프네가 탁자를 짚으며 다급히 건넨 말에 리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혹시 제가 그동안…….”
“날 만족시키지 못하거나, 누군가와 염문이 돌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예.”
왠지 뻔한 결론이 그려졌지만, 그래도 일단 질문을 해 보기로 했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해 두는 편이 좋으니까.
그는 사무엘의 모자를 긴 손가락으로 끈적하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징그러운 행동이 뜻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네 잘생긴 동생을 유혹하러 갈 거다.’
다프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리암은 즐거움을 숨기지 못하며 미소 지었다.
* * *
사실 다프네는 금방 공작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사용인의 도리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다프네는 공작가에 도착한 날의 자신에게 돌아가서 말해 주고 싶었다.
이 거대한 저택의 말단 하인으로서는 공작에게 만족감을 주기는커녕, 그 구두조차 닦을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그녀가 하는 일은 주로 허드렛일이었다.
게다가 지난주에는 선대 공작의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가까운 고위 귀족들로 저택 2층의 모든 방에 손님이 꽉꽉 들어찼다.
다프네는 처음 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 ‘방이 이렇게 많아서야, 그걸 하나하나 관리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내가 하게 되다니!’
그녀는 서른 개도 넘는 방을 하나씩 세어 보다가 후에는 이를 그만두었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다프네는 방마다 석탄이나 장작을 가져가고, 램프를 손질하여 기름을 넣는 일을 맡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손님께서 보지 않으시는 때’에 이루어져야 한다.
손님들이 식사하러 내려가거나, 다 함께 예배당에 가거나 했을 경우 말이다.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무척 서둘러야 했다.
어찌어찌 그 일을 끝낸다고 해도 다프네는 쉴 수 없었다.
그 후에는 지하로 내려와서 다른 사용인들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어야 했다. 막내 사용인이 담당하는 업무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괜찮아요, 서튼 양?”
“그러게 안 될 거라니까. 손 부르튼 거 봐. 나중에 약 좀 가져다줄게요.”
사용인들이 주인과는 달리 모두 인격자들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작과 약속했던 ‘염문’ 부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바빠서 눈이 돌아가는 판국에 그런 한가한 감정을 느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 * *
다프네의 일은 아주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식사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녀는 식사를 생략한 후 깔끔하게 몸을 씻고, 수건으로 머리를 헤집으며 제 방 앞에 도착했다.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그녀는 남자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아래층 숙소를 이용했다.
게다가 룸메이트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제 옵니까.”
아셔 마플이었다.
그와 한방을 쓰게 되면서 다프네는 그에 대해서도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공작가의 형제와 놀이 친구로 자랐으며,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무척 높았다.
그리고 다프네를 질색했다.
지금도 그녀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 추운 겨울에 창문을 확 열어 버렸다.
축축한 몸에 바람이 닿자 기절할 만큼 추워서, 다프네는 얼른 제 침대로 뛰어 들어가 이불로 제 몸을 둘둘 감았다.
“대체 왜 제가 씻고 들어올 때마다 창문을 활짝 여는 거죠?”
다프네는 벌써 몇 번이나 그 질문을 건넸는데, 그는 노려보기만 할 뿐, 한 번도 제대로 된 대답을 건넨 적이 없었다.
“제가 감기에 걸리면 저택에서 나가리라 생각하시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는 듯했던 그가 이야기를 멈추기에, 다프네는 얼른 나머지를 재촉했다.
“그게 아니라, 뭐요? 신사라면 마지막까지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지시길 바라요, 마플 씨.”
“하아, 정말이지.”
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안, 다프네는 그를 뾰족하게 노려보며 대체 어떤 답이 돌아올지 기다렸다.
“전 그냥.”
그는 불안한 듯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냄…… 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