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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화 (4/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4화

‘육체관계’라는 단어에서 아셔는 결국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푹신한 카펫이 있어 잔이 깨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셔의 바짓단이 조금 젖기는 했지만.

“다, 당신은 부끄러움도……!”

“네.”

다프네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제가 공작님의 벗은 몸을 몇 번 본다고 하여 연정을 품을 일도 없습니다. 그건 약속드리죠.”

“다프네 서튼 양!”

아셔의 얼굴은 안타까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바짓단에 묻은 홍차를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리고 성별이 같다고 하여 연정이나 육체관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맙소사, 차라리 입을 다무세요. 신사적인 공작님께서 당신의 몹쓸 말을 듣지 않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신사적인 공작?

다프네는 새 슬로언 공작의 성향이 정중하고 우아한 것이라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뻔뻔하게 구는 것에 질려서, 사무엘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힘들 테니까. 그사이에 사무엘은 열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날 테고.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의 그 풋맨이었다.

“공작님의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마중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플 씨.”

아셔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프네와 창밖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프네에게 엄격한 충고를 건넸다.

“공작님께 교양 없는 소리를 하시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서튼 양.”

침착한 척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몹시 안쓰러워 보였으므로, 다프네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언제나 필요한 말만 하죠.”

다프네는 그를 따라 저택 외부로 향했다. 하얀 벽을 따라 돌아가니 곧 사용인들이 대열을 갖춘 중앙 현관이 나왔다.

아셔는 그들 중 가장 앞에 섰고, 다프네는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곧 멀리서 다가오던 검붉은 자동차가 그들 앞에 멈추었다.

다프네는 마땅한 예의에 따라 허리를 숙였다.

‘이제 이 남자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되겠지?’

그는 이 거대한 저택과 클롯모어의 왕으로 군림하는 자였다.

그가 다프네와 ‘맹약을 맺겠다.’라고 선언해 준다면,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장례식 준비는?”

공작의 목소리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아마 아셔에게 선대 공작의 장례에 관하여 묻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대성당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던 아버지와 달리, 공작의 경우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대사제와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문제없이 거행될 겁니다.”

“수고했어. 내가 연락보다 빨리 와서 필시 폐가 되었겠지?”

다프네는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상하지. 그녀와 공작 사이에는 어떤 인연도 없는데 말이다.

어째, 최근에 들었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닙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저희는 언제든 공작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서튼의 장례식에 잠시나마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음, 뭐…… 급히 오느라 완행열차의 3등석을 경험하게 된 것도 딱히 나쁘진 않았고.”

다프네는 잠시 등을 움찔거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수도에서 클롯모어로 오는 완행열차는 꽤 여럿이었고, 더구나 3등석을 타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고개를 들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보다 주인님, 그 모자는?”

“아, 기차에서 만난 친구에게 선물받았어. 한눈에 반할 만큼 잘생긴 청년이었지. 하아, 방해꾼인 누이만 없었어도 어떻게 해 보는 건데. 아쉬워.”

“……!”

결국, 다프네는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웃는 모양으로 휘어진 눈매를 마주했을 때, 다프네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였다.

열차에서 다프네의 가방을 들어 올려 주고, 클롯모어로 오는 내내 맞은편에 앉았던 바로 그 남자 말이다.

그가 리암 슬로언 공작이었다니!

「두 분은 연인이신가요?」

다프네는 기차에서 리암이 건넸던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금방 떠올렸다.

「설마요, 하나뿐인 친동생이랍니다! 아주 잘생겼죠?」

미쳤어!

‘잘생긴 사무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지만, 거기에서는 참았어야지 이 바보야!’

다프네는 자신을 원망하는 동시에 신에게 빌었다. 부디 시간을 다시 뒤로 돌려주세요!

지금 당장!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열렬하게 회귀를 염원해도 신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다프네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성실하게 나아갔고, 그녀는 다시 조금 전의 노란 벽 응접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공작과 함께.

조금 전에는 이곳에서 아셔를 상대로 우쭐해 있었지만, 지금은 양쪽 어깨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튼의 다프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라고?”

맞은편에 앉은 리암은 뒤에 서 있는 아셔에게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안경을 고쳐 쓰며 상황을 설명하는 아셔는 어딘가 우쭐거리고 있었다.

공작이 제 뒤에서 버텨 주고 있으니, 다프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어서 기쁜 듯했다.

“서튼 양이 공작님의 수행원이 되겠다며 찾아왔지 뭡니까?”

“저런.”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저는 어서 동생이 있는 곳을 말해 달라고 하던 차였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한사코 동생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는 겁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일 때, 리암은 다프네를 향해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 그 잘생긴 청년…… 말이지.”

다프네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입니다!’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리암이 들고 있던 털모자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자, 다프네는 등을 움찔거렸다. 그건 사무엘이 좋아하는 겨울 모자였다.

대체 어쩌다가 그것이 리암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자 이야기를 할까.”

다프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나른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모자요?”

곁에 서 있던 아셔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의문을 표했지만, 리암은 달리 그에게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실은 조금 전에 클롯모어 중앙역에 다녀오는 길이거든. 역시 미련이 남아서, 그 남자 말이야…….”

리암은 과장된 표정으로 감동을 표현했다.

“다시 만나고 싶었지, 그런 미남은 흔치 않으니.”

“……!”

“다행히 승강장에 서 있더군. 워낙에 얼굴이 예뻐서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눈초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얼핏 드러난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서 즐거워하는 빛이 스쳤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도 모르게 말아 쥔 다프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반응을 확인한 그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오린샤이어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다더군. 어렸을 때부터 돌봐 준 가정부의 고향이라는 모양이야. 당분간은 그곳에서 신세를 질 거라고 하면서 씩씩하게 웃는데, 하…….”

그는 재차 감격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시 생각해도 잘생겼어.”

내 동생을 넘보지 마!

다프네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다행히 그도 내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그 증표로 우리는 서로 모자를 교환하기로 했지.”

다프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사악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순진한 사무엘에게 모자를 내놓으라고 겁박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여린 것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다프네는 제 동생이 지금쯤 홀로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리암은 품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꺼냈다.

“물론 우리가 교환한 건 모자뿐이 아니었어.”

“……!”

그는 다프네의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앞으로 사무엘이 지낼 페이지 부인의 본가 주소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맙소사, 내 동생은 글씨까지 잘생겼어!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그리 감탄했지만, 곧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랑살랑 미소를 짓는 저 남자에게 사무엘의 거처를 들키고 말았으니까!

‘어, 어떻게 하지?’

다프네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셔가 헛기침하며 리암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주인님께서 훌륭한 청년과 친구가 되셨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친구라니, 섭섭하게…… 깊은 인연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어.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지.”

“웃……!”

‘웃기지 마! 당신이 멋대로 협박한 거겠지!’라는 말은 ‘웃’에서 멈춰야 했다. 공작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눈치 없는 아셔까지 ‘그 남자’가 사무엘 서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수는 없었다.

“웃?”

리암은 굳이 그녀가 외치다 만 이야기의 뒤를 물었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이다.

다프네는 그가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점에 제가 가진 모든 구두를 걸 수도 있었다.

‘나쁜 놈, 평생 새 구두를 신을 때마다 갓 눈 말똥이나 밟아라……!’

다프네는 그를 저주하면서도 최대한 사교적인 미소를 지어야 했다.

“웃…… 챠.”

그리 말하며 찻잔을 들어 올리자, ‘아, 찻잔을 드는 소리였구나.’라며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셔는 두 사람을 연신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지금은 서튼 군의 행방을 하루빨리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서튼 군의 행방. 중요하지.”

리암이 품에 든 종이를 팔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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