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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화 〉1부 63화 생생한 꿈 (63/66)



〈 63화 〉1부 63화 생생한 꿈

눈을 뜨자 새하얀 하늘이 보였다. 벌써 낮인가?
기분 좋은 햇살을 맞으며 꾸물대며 몸을 뒤척이다 벌떡 일어났다.



…햇살?
작은 창문 두어 개 있는 방에서 정통으로 맞는 햇살?



“뭐야…이럴 리가. 여기에  내가?”




꿈이다. 분명 여긴 꿈속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티고에 있던 내가 다시 여기서 일어날 리가 없잖아.
숲 한가운데 보라색 꽃이 잔뜩 핀 꽃밭에서.




“이상한 향기….”



라벤더. 라벤더를 닮은 꽃이 들판에 펼쳐져 있다.
여긴 또 어딜까.
슬슬 잊어가던 진한 꽃향이 코를 찌르자 흐릿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니, 이미 와 봤던 곳이다. 익숙한 곳이고 향은 그리웠는지 콧속을 찌른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있었던 그 곳이다.




“꿈에서 본 그 루나가 날 부른 건가?”


온 몸에 붙은 꽃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자 꽃잎과 꽃가루가 바스스 부서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불에 타는 듯 잎은 연기를 보이며 사라진다.



볼을 꼬집어볼까? 아니, 걸어가 보자. 여길 돌아다니는 거야.
만약 달이 나를 초대한 거라면 같은 이름을 가진 손님을 해코지 하진 않을 거야.





미친 소리를 속으로 웅얼거리며 발을 내딛었다. 줄기가 부러져 나뒹구는 꽃들이 발에 밟혔다. 시든 꽃에서 부서지고 갈라지고 짓눌려 물이 터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뭐야, 이게 왜….”





발아래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곱게 싸 둔 보라색 보자기.
안을 열어 보니 라벨을 담은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Mors pilulas dormienti]



모르스 필룰라스 도미엔티.



“역시, 이건 이 꽃밭이랑 관련이 있는  틀림없어!
저 꽃으로 이런 잼을 만드는 식이었겠지. 아줌마는 그걸 어디서 사온 걸까?”


조금 더 길을 걸어 보지만 주변에 보이는  끝도 없는 보라색 꽃뿐이다. 향 때문에 제정신으로 걷기 힘들지만 계속해서 걸었다.




멀리 누군가 보인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신장이 큰 여성의 뒷모습이다. 반가움에 소리는  내고 달려갔다.
갈색과 검정이 섞인 동양인의 단발. 군살 없고 라인 없는 통짜 몸매…….





“…설마, 나?”




아닐 거야. 아니겠지.
걸음을 멈추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얗던 하늘이 갑자기 검게 변했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던 배경에 별이 총총 새겨지고 금세 커다란 원이 드러났다. 하얗고 커다란 달이다.
하얀 달은 당장이라도 그 여자를 삼킬 것 같이 컸고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달. 향긋한 라벤더 꽃밭.
그 아래 서서 달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여자는 이곳저곳을 움직였다. 움직인다 해봐야 꽃밭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돌아다니는 곳마다 달빛이 비춰진다. 여자가 말했다.


“아으, 뭐야.”


설마. 정말 나였다.
여자는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다. 향 때문에 두통이 시작된 것이다.


“갑자기 일어나서 움직였더니 두통이라도 생겼나.”


‘죽어.’




이건 또 뭐야? 이 여자 목소리는 또 누구인 건데?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야. 어디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아아. 갑자기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내 님의 사랑을 받는 과분한 인간은 죽어도 싸.
저 분의 사랑은 아무나 받지 못한다고.’






목소리가, 몸은 어디 가고 목소리가 자꾸만 돌아다녀. 이게 누구야. 누군데 나를 죽여!


“아아. 아파. 갑자기, 이게 무슨-!”


‘고귀하신 여신 곁에서 썩 꺼져라. 넌 그 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죽어. 죽으라고.  땅에서 당장 사라져!’


그만해. 괴로워하잖아….
저렇게 비틀비틀 거리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굴고 있잖아. 그만하라고!


“잠깐만, 이거 설마-.”





여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커다란 달은 여전히, 더럽게도 아름다웠다.


가까이 달려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처럼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손을 뻗어도 여자의 몸에 닿기엔 거리가 한참 부족했다. 두 눈이 화끈 거리고 콧등이 시큰 거렸다. 뭐라 말이 떨어지지 않는 입은 비틀렸다.



“아아! 죽으면 안 돼. 죽지 마!
살아야 하잖아. 살아서, 살아서…집에 돌아가야 하잖아…너, 넌 그렇게 약하지 않잖아…제발.”





간신히 터진 말이 그러했다.
그러면 뭐해. 이제야 소리치면 뭐하냐고? 이미 죽었는데…이미.



여자는 움직이지 않고 꽃은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긴장도 풀리고 희망도 사라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톱 사이로 흙과 모래가 닿는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여자가 죽었다. 내가 죽었어.
아니, 난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그럼 지금의 나는 누구야?
루나. 지금 죽은 저게 나라면 여기의 나는 누구냐고!



“아아…아…어? 저기 웬 사람이…누구야?”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쓰러진 여자 가까이 누군가 다가온 것이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울면서 놓치지 않고 계속 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온 거지?





 사람은 가면을 쓰고 온 몸에 검은 망토를 두른 채 가만히  있었다. 망토는 발만 남기고 몸 전체를 가려서 누군지 알  없었다. 문득 숲에서 봤던 관리자가 떠올랐다.



“벌써 포기하려고?
포기는 배추  때나 쓰는 거라더니.
너도 우습다 우스워.”




변조된 목소리가 꽃밭에 울려 퍼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게 목소리를 섞었다.
유일하게 망토에 가려지지 않은 발을 보니 검정색 로퍼를 신고 있다. 남자인가?


“아니지. 로퍼는 여자도 많이 신을 텐데. 본래 남성 구두라고 알고는 있지만….”




망토를 두른 그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무언가를 꺼냈다. 입구가 좁고 안이 넓은 작은 병이다. 안에는 보라색 액체가 담겼다.
병에는 갈색 코르크 마개로 막혀 있었는데 그는 손쉽게 마개를 열고 여자의 입에 약을 흘러 보냈다. 움직임이 없던 여자의 다리가 움직이더니 몸의 자세를 바꾼다.



“살았잖아…아니. 근데 여자는 잠든 거야?”





몸을 돌린 여자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이 살짝 미소를 짓기도 했다. 망토를 쓴 이는 옆에  라벤더를 몇 송이 따더니 빈 약병과 같이 망토 안에 주섬주섬 넣었다.



“정말 누구야. 저 사람은….”


그 말을 뱉자 그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헉! 뭐, 뭐야. 꿈속인데 내가 보이는 거야?”





도망쳐야 해!
그러나 주저앉은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망토를 정리하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다리를 주물러서 간신히 한쪽 다리를 일어섰지만 도무지 도망갈 엄두가 안 난다.
뒤로 돌아서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뛰었다. 저린 다리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으아악!”


돌부리도 없는 꽃밭에서 제 발에 헛디뎌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며 뒤를 슬쩍 돌아봤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렸는데 망토는 고작 스무 걸음 뒤까지 따라왔다.


“헉…헉…따라 오지 마. 제발…살려줘. 제발…!”


몇 번이고 넘어지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꿈속은 내 편이 아니었다. 달리고 달려도 망토와의 거리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다.


“망할…진짜…그냥 가란 말이야!”




다른 한쪽 다리의 감각이 돌아와 전속력으로 달려도 거리를 멀어지지 않았다.
달리면서 뒤를 보면 그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밤 산책을 즐기는 검은 그림자처럼. 느긋하고 검게 드리웠다.






어느  그가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줄었다. 그러나 망토는 굳이 나를 잡지 않았다. 스스로 멈추길 기다리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걸어왔다.


“…….”





살려달라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럴 힘이 들지 않았다. 십  정도 쉬지 않고 달린 것 같은데 그는 손쉽고 여유 있게 걸음에 맞춰 쫓아왔다. 꿈이 그렇게 맞춰준 걸 수도 있겠다. 더럽게 예쁘고 야비한 짜증나는 달 같으니!






“…….”


망토는 천천히 걸어왔다. 검은 선으로 그려진 하얀 가면이 점점 다가왔다.
마침내 얼굴 코앞까지….



“…살려주세요.”
“…….”
“여기 주인이 당신이라면 죄송해요. 벌써 두 번이나 들어온 거니까…그러니까 죄송해요.”




멋대로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두 손 모아 빌었다. 나를 살려달라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여기에  들어올게요.”
“…거짓말. 네가?”


망토의 말에 싹싹 빌고 있던 손이 멈췄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이유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소름끼치는 목소리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나를 알고 있다는  말했기 때문이다.



“…제가 왜요?”
“거짓말 하지 마.  자꾸 거짓말을 해.”



단호한 그의 태도에 역시 딱 잘라 말했다.


“정말이에요. 안 들어갈게요.”
“손에 그걸 들고 있으면서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손에? 손에 뭐. 라벨?





“라벨이 여기랑 관련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오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눈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은 그만 둬. 또  거잖아.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또 오겠다고.”





또 오겠다고?





“그게 무슨….”
“일어날 시간이야. 태양이 뜨고 있어.”
“아직 밤이잖아요. 저기 저렇게 달이 뜨고 있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검지로 이마를 눌렀다.
뒤로 넘어가면서 그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였고 모든 공간이 검게 칠해졌다.
파도에 휩쓸린 듯 빨려 나가는 의식 속에서 드문드문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럽지 않아. 너는…하지 않아. 그러니까….”




◆◆◆


“…헉!”


아무도 없는 방에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삐걱대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벌컥 열었다. 아침이 밝았다.




“…해가 떴어.”





이게 정말 꿈일까?
아니. 꿈이라면 이런 감각은 느껴지면 안 되는 거잖아.


꽃을 밟는 감각. 코끝에서 부터 느껴지는 향기.
손톱 아래를 살살 긁는 모래와 작은 자갈의 감촉. 밝은 달빛에 눈을 질끈 감는 것.
처음 보는 당신에게 이마를 눌려 뒤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꿈이랑 현실이 뒤섞인 공간 같아.


“도대체….”


벌컥. 누군가 문을 열었다.
뒤로 돌자 지프가 미소를 띠고 문을 빼꼼  사이에 머리를 내밀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프!”
“루나, 간밤에 잘 잤어?”
“네, 지프도?”
“물론이지. 배고프지? 아침 먹으러 가자.”
“좋아요!”
“아,  전에. 너  좀 갈아입자.”


지프는 방 안으로 들어와 옷장에서 옷을 찾았다.




“네? 왜요? 이거 어제 갈아입은 옷인데.”
“갈아입으면 뭐해? 옷이 다 늘어났는데.”
“네?”
“벨트 없어? 바지도 엉덩이만 걸쳐선 곧 흘러내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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