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1부 58화 start (58/66)



〈 58화 〉1부 58화 start

다시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커다란 달 위로 연한 회색 구덩이가 일렁이는 것 같다.



“에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아닐 거야.”


친구라고 했잖아.
뭐든 궁금하면 대답해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대답해줬잖아.

설마, 그것조차 거짓말…아니야, 아니야!



“아아.”



….
밤하늘. 위에서 보고 있는 관리자의 님.
상사, 보스…대장.
저를 친구라고 했던 루나는 아닐 거야.



“…루나. 아니라고 해줘.”


신, 님, 그리고 달.
거기에 친구는 없을 것이다. 없다.
숨을 고르고 진정하지만 마음은 밤바다의 성난 파도처럼 요동쳤다.



나를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안 해서 치운다.
이름은 같지만, 아예 다른 존재.
여태 꾼 꿈들이 마냥 악몽이 아니었다면-.



Luna.
살아서 집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죽여야 해.
이 세계의 신을.
모양조차 변덕스러운 우아한 위성을.



정확히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님’을 두려워 눈물을 흘려야할까?
어느 쪽도 친구인 너를 이해하긴 어려울 것 같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일어나자 가방을 메고 바로 지프에게 달려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녀는 흔쾌히 맞아주었고 금방 식사까지 준비해주었다.
같이 아침을 먹고 소파에 앉아 가만히 복도 쪽을 응시하고 있어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지프. 저 여길 떠나고 싶어요.”
“응?”
“가야  곳이 있어요. 목표가 생겼거든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랑 싸웠니? 아니면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아니요. 그런 건 이유에 들어가지 않아요.”
“과학자 되고 싶다며. 그건 어떻게 하고?”
“…지프. 사실 전 과학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말을 더 하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혼란에 빠진 그녀의 심정이 표정에서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고 얘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사춘기라 이렇게 변덕이 심한 건가 하는 생각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오묘하지만 티나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강한 시선. 그것들이 너무 잘 느껴진다.



“잠깐, 그건  무슨 소리야.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차근차근 이야기해주겠니?”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어요. 지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그녀가 손을 덥석 잡았다. 부들부들 떨고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두려워하고 있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던 그 애의 모습이 망가지는 것을.



“전 이루나가 아니에요.”
“그게 무슨…?”
“저는 당신이 아는 그 여고생이 아니에요. 제 나이가 열여덟이 맞는지도 의문이 들어요.”



이루나. 루나. 열여덟의 평범한 여고생. 처음부터 어느 정도 잡혀있던 나의 틀.
이젠 놀랍지도 않은 뻔한 사실이 되었지만 그건 전부 당신들이 판단한 거였다. 신체적으로 신장이 크고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것 외에 드러난 진짜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이라곤 백일 된 아기보다 짧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미안해요. 혼란스럽겠지만 오늘 당장 떠나기 전에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전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기억상실증이라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기억을 잃은  이루나가 아니라 저였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네 말은 오늘 여기를 떠나겠다는 거야?”
“네. 지금 당장이요. 일단 대도시로 올라갈 거예요.”
“어디까지 갈 건데?”
“최종 목적지는  모르겠지만, 근처 마을에서 최대한 벗어날 거예요.”


처음에 당황했던 그녀는 간신히 말을 잇다가 심호흡을 시도했다. 헐떡이던 숨은 곧 진정되었다. 얼토당토 않는 말에 당황했을 텐데 어떻게든 스스로 논리를 맞추며 이해한 모양이다.




“이 사실을 나랑 너 말고 또 누가 알고 있니?”
“…없어요. 어머니도 모르고 약국에 있는 할머니도 몰라요.
원래는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지프 당신은 신경 쓰여서 말을  해줄 수가 없었어요.”
“왜?”
“제가 당신을 의심하는 와중에도  대해주셨잖아요. 피하는  알면서도 의식하지 않고 전과 다를 바 없이, 한결 같이 좋아해주셨잖아요.”
“고마운 마음에 알려준 거니?”
“신경 써줄 필요 없다는 의미로, 일방적으로 알려드린 거죠. 고마운 마음에 고민했다면 말없이 떠났을 거예요.
아, 맞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세워 둔 캐리어를 보았다. 이것도 돌려줘야지.


“이것도 돌려줄 겸 온 것도 있었어요.”
“너, 내가 엄마한테 말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
“저희 친구잖아요. 친구 사이에 비밀은 지켜야죠.”





꼬인 가방끈을 바로 메고 복도를 따라 현관까지 걸어가 신발 끈을 묶는데 그녀가 뒤에서 따라오며 질문을 던졌다.



“언제 떠나는데?”
“지금 갈 거예요. 기차표도 끊어야 해서 지금 가도 늦었어요!”
“학교는?”
“저한테는 학교 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혼자 가는 거야?”
“당연하죠. 같이 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친구는? 친구는 있을 거 아냐. 나만 해도….”
“저 이제 친구 없어요. 고작 해야 당신 정도?”



친구라고 말하기 뭣하지만 그 전에는 정안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지.




“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우리 친구지?”
“…네. 지금은 저의 유일한 친구죠.”
“특별한 관계네…이별인 거야?”
“네, 뭐…. 아무튼 바로 갈 거니까 나오지 마요. 알겠죠?”





대문을 열었다. 지프는 현관에서 이쪽을 바라볼  쫓아오거나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잘 가라는 인사  마디 없었다. 조금 슬픈 표정이었다. 사실 그녀가 슬픈 건 내 마음이 그래서 그렇게 느낀  수도 있겠다. 하지만 친구가 이 마을에서 떠난다는 것에 퍽 아쉬워하는 것 같다.




날은 아직 어둡다. 아침이 오기엔 이른 시간이니까 그럴 만도.
마을 입구로 향했다. 정 없는 마을에서 떠난다는 것에 의미를 두거나 기념하고 싶진 않지만 남아있는 흔적을 보고 싶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 곳에 흔적이라도 남아있길 바랬다.



“그럼 그렇지….”





쪼그려 앉아 힘없이 땅을 바라보았다. 원래에는 싹이 심어져 있어야할 자리였다. 이  여름의 장마는 낙뢰가 치고 발에 잘박잘박 찰 만큼 강수량도 많았다. 나무도 식물인데 이렇게 안자랄 수가 있나?





“야, 니 주인 없어. 나도 떠날 거야. 다시 돌아올 마음도 없으니까 너 혼자  지내!
빗물 맛없다고 뱉고 그러지 말고. 무조건 많이 먹고 살아서 세계 최고로 대단한 나무가 되란 말이야. 알겠어?
…하하하하!”




그렇게 말하고 금방 웃음이 터졌다. 안에 씨앗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한다는 소리가 그런 말이었다. 이 모습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봤다면 미친 사람이라 생각했겠지만 숲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참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곳이다.





“…가자.”


새벽 내내 깔려있던 냉기가 걷힌다.  밑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열기가 양 다리를 감싼다. 곧 날이 밝을 것이고 하루가 시작 될 것이라.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나왔다. 입구로 나오자 빛이 눈을 찌른다. 이제 막 태양이 오를 것처럼  끝에 노란 빛이 연하게 피어오른다. 여명이다.


시내로 가서 지하철을 타자.
도시는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도착하면 방도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걷고 걸어 마침내 지하철에 도착했다. 시내에는 출근 시간도 아닌데 사람들로 북적했다. 하긴 출근한  아니면 그 전까지는 출근 시간이라 보는  맞지. 계단을 밟고 내려가 차표를 뽑는데 오한이 들었다. 커다란 눈알들이 죄다 이쪽을 보는 것 같아. 좀  서둘러서 지하철을 탔다.




지도상에선 당장 가까운 곳은 보이지 않았다. 얼추 지명은 적혀 있어도 읽지도 지형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세계의 지하철은  흔한 노선도도 없는 곳이다. 불친절하고 시설도 구식 철통 증기기관차다. 지하에서 달리는 증기기관차라니?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하 정거장에서 지하철을 타면 지상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롤러코스터의 느낌이 나려나? 옛날 유럽 산업화시기에 볼 법한 검은 철통이다.




당일에 차표를 끊으면 앉아서 갈 생각은 하면  된다. 몇 십 분을 서서 도착지까지 가야하는 것이다. 노란 눈을 가진 눈알이 이쪽을 쳐다본다. 중년의 나이대로 보이는 아저씨다. 얼굴도 크지만 배불뚝이라서 보기도 부담스러운 사람. 아니 사람은 지구의 인간을 보고 하는 말이었지?



“벌써 아침이네.”


바깥은 정오의 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창 제 옷을 정비하고 있다. 붉은 드레스와 머리칼이 사방으로 퍼지며 정열의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창밖으로 보이는 항성의 묵직한 구체는 바로 앞에 보이는 노란 눈을 가진 배불뚝이 아저씨와 같이 묘한 느낌이 들었다.


태양이 아른아른 산 너머에서 천천히 떠오름에 따라 아저씨의 두 눈 아래 그늘에 파묻힌 불룩한 도화살 아래가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짙게 드리워진 어둠은 수심에 가득  그의 속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처음 보고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상대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고 만석이 된 열차에 타 몇  분이고 서 있으니 그런 생각만 들었다. 남을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다. 제 미래만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태평하게 남을 평가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었지만 그대로  시간이 제법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스스로 그러고 싶어서 하는 가벼운 놀이였으니까.





저 아줌마는 오늘 시장에 나가서 채소를 팔려는 건가? 저 학생은 친구들과 달리 집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혼자 학교 가는 구나. 저 아저씨는 직장생활에 쪼들리면서도 오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고 일을 나가는 거야. 그러니 손엔 가방을 들면서도 신발 끈이 풀려 있지! 그리고 저기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는 여아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역이 두 개 정도 지나갔다. 어느 새 밝은 구체는 다 올라와 온 대지를 비춘다. 차가 움직이고 공장에서는 연기가 폴폴 나온다. 제법 조용했던 이곳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로 금방 시끄러워졌다. 여학생들도 점점 말을 나누다 이내 왁자지껄 대화를 나눈다. 물론 몇몇만 그렇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책을 보거나 잠을 자는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여전히 서서 갔고. 조금씩 쭈그려 앉으니 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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