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1부 57화 '님'
“아니야. 거기까진 생각하지말자.”
몸을 돌려 자세를 바꿨다.
대자로 눕자 천장이 한눈에 보였다.
과거엔 잘 때나 쓰던 방. 지금은 창고.
그 방 천장에 보였던 작은 야광별이 생각났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네.”
작은 낙서나 곰팡이 하나 없는 깨끗한 천장이다.
과거엔 정안이 썼을 방.
“정안이는….”
정안이도 몇백, 몇천 번째쯤 튀어나오는 수많은 자식 중 한 명 이었을까?
그렇다면 지금 ‘이루나’를 제 자식으로 삼고 있는 것도 아줌마에겐 정상인 것이다.
그래…. 여기선 매우 일반적이다.
정안의 어머니는 수많은 자식을 하나 같이 제 유일한 자식으로 여겼다.
이정안이 있을 땐 이정안의 어머니였고.
이루나가 있을 땐 이루나의 어머니였다.
당연히 자식을 생각했다고 말하고.
그걸 증명이라도 한다는 듯 헌신적인 행동을 하고.
몇 시간 전에 화를 내도 저녁 준비를 하고.
귀에 대고 잘 자라고 속삭이며 볼 뽀뽀를 하고 나가는 것까지.
그런 일을 수십 명, 수백 명의 존재와 접촉하며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다만 매일 사랑한다고 애교를 부리는 게 남자일지 여자일지.
아이일지 학생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수많은 자식은 아줌마를 보고 모두 하나뿐인 제 엄마라 생각했을 것이라.
아줌마도 그들을 보며 한결같이 제 자식이라 생각하고 애지중지했을 것이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평범한 모자, 모녀일 거라 평가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한 기분에 속에서 동시에 더 이상하고 각진 감정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세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어차피 누군가는 사라져야 했다.
수많은 자식이 아니라 수많은 어머니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식이 아닌 어머니를 살려주었다.
신은 어머니를 남겨두셨다.
관리자의 ‘님’도 어머니를 ‘처리’하지 않았다.
뭣도 없이 그저 어머니였다.
그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복잡한 기분은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다.
동정할 필요도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을 사랑하니까.
‘…진짜로 자식 생각하긴 했어요?’
이정안. 그다음 ‘이정안’인 이루나.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을 ‘이정안’들.
아줌마는 그 많은 존재를 보고 지나치며 작은 의문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놈이 그놈. 그 자식이 그 자식.
내 자식은 그저 내 자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아줌마가 좋은 어머니는 아닐 거라는 추측은 이제 기정사실로 되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른은 어른대로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자식을 향한 일말의 걱정은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 애정까지 있을 거란 가정은 못 한다.
동정하고 싶진 않지만 제 자식 기억 못 하는 건 아줌마의 잘못이 아니다.
알지만 화가 났다.
여태 본 것들은 터무니없는 망상과 환각이라는 식으로 덮으려는 모습이 하찮게 보였다.
그보단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상황을 만든 그 ‘님’이라는 존재가 미웠다.
관리자를 꿈에서 만났을 때 들은 말이 기억났다.
‘휴, 우리 님이 당신을 엄청나게 사랑해. 위에서 항상 당신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어쩌겠어? 당연히 버려져야지.’
이렇다 할 죄 없이 사라진 선량한 어린아이.
제 자식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남의 자식을 제 품에 안는 저 여자.
그리고 온 장기가 뒤틀리는 이 상황을 억지로 맞춰주며 버티는 나.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미 잘못되게 설계를 마친 것이다.
말 그대로 ‘님’이. 또는 관리자가.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무언가가.
님. 관리자.
결과적으로 누가 했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모든 걸 멀리서 지켜보며 낄낄거리다 어느 순간 지루해지면 하나의 장난으로 넘기고 잊어버릴-.
그 빌어먹을 모습이 상상되니 안에 있는 것들이 위아래 구분 없이 섞이는 것 같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되게 역겹네.”
그때는 재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물을 봤을 땐 오금이 저렸었다.
그럼 그 꿈도 그냥 넘기면 안 되는 것이다.
“하, 이건 뭐 수수께끼도 아니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벌러덩 누웠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으로 이불을 끌어왔다.
여름이지만 창문 새로 들어오는 바람은 꽤 차가웠다.
그렇다고 닫기엔 꼼짝없이 인간 찜 구이가 될지도.
이불을 펄럭이며 곱게 덮고 생각을 이어갔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결론은, ‘님’이라는 존재만 잡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곳의 처음을 만든 게 그거니까.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의 신은 순순히 ‘님’이라는 존재한테 죽지 말라는 듯 도와주고 있다.
개꿈이라 넘긴 것들도 사실은 무시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보라색 꽃과 잼만 봐도 이전부터 자주 나오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변화를 이해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건.
정보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무의식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 일단 그 꿈에 대한 것부터 떠올려야 해!”
꿈이 그저 꿈이 아니라 본다면 하얀 공간에서 봤던 루나와의 일도 기억해야 한다.
아니지, 그 전 일도!
벌떡 일어나 의자를 끌어 앉고 공책을 꺼냈다.
가방에 닥치는 대로 쓸어 담는 바람에 공책은 없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가져올 걸 그랬나.”
다른 곳도 찾아봤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 한 군데 남았다.
침대 밑.”
과연, 생각한 대로 몽당연필과 포스트잇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처음엔 어떤 들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보랏빛 꽃에서 나오는 강한 향기에 취해 기절했다.
취한 것보단 중독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기절하기 직전에 누군가의 두 발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던 곳이 정안이가 아지트라고 했던 곳….
그게 대강 스무날은 훨씬 넘은 일이었다.
그 사실을 여태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온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해독제가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할 암시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하얗고 커다란 예쁜 달.
숲속에 있었던 커다란 들.
거기에 핀 수많은 보라색 꽃.
그 외에 생각할 건 황홀함?
여태껏 보라색 꽃만 생각하느라 잘 몰랐다.
이 모든 것에 어떤 의미를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니.
“그나저나 소름 돋네.
발이 보였던 것도 꿈이 아니면, 누가 날 데리고 건물에 두고 갔다는 거잖아?”
해치려고 왔다면 그대로 두거나 어떻게든 숨을 거둬도 됐을 것인데.
왜 살려뒀을까?
그건 그거대로 의문이다.
“아직도 날 보고 있을까?
아, 일단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겠으니 영….”
생각이 복잡해지니 다른 것들을 잊어버릴 것 같다.
“일단 패스.”
시지프를 처음 만났을 때 쓰러져 있던 저를 발견했다고 했다.
쓰러졌을 때 꿨던 꿈을 생각했다.
끝없는 암흑 속에서 둥둥 떠다니며 뭔가를 많이 생각했었다.
같은 지구에 있을 법한 곳이라고 말하기엔 이상할 곳에 떨어졌고.
불안하고 두렵고 괴상한 외눈인의 외모에 겁을 먹었었다.
아마 그런 것들을 걱정했었다.
그다음에는 벽에 그려진 구름을 봤다.
여러 몽실몽실한 구름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약간의 회색이 섞인 구름이었다.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이 자체가 익숙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이전에 본 적이 있던 건 아닐까?
그 뒤에는…수많은 작은 알약이 몸을 삼킬 만큼 공간에 차올랐다.
꿈인 것도 모르고 살겠다고 주먹으로 두드렸고 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벽이 부서짐과 동시에 하얀 알약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이건 뭘 뜻하는 걸까?
벽에 그려진 구름. 새하얀 알약.
“…일단은 이 정도.”
그 뒤부터는 아줌마와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사실 아줌마는 그전부터 싫어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정안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무도 심고 요리도 하고 점토로 조각도 해봤다.
“…재미있었지.”
추억은 이만 꺼내고 꿈을 떠올리는 것에 집중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은 아니고 특수한 공간이라고 했던가.
하여튼 친구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며칠이고 나왔었다.
걔가 친구랍시고 뭐든지 질문해주면 답을 해준다고 했었다.
“잼과 차에 쓰이는 원료가 다르다는 걸 알았지.”
그 외엔 루나의 얼굴이 시지프였다는 점?
뭐, 그 꿈 이후로 그녀랑 가까워진 것 같다.
피하려고 해도 자꾸만 만나고 같이 놀기도 했으니까.
관리자가 나왔던 꿈, 죽었다 깨어난 것까지 생각했다.
노트에 다 적고 보니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여럿 나왔다.
[결론: 숲속에서 깨어나자마자 꽃향기에 중독당함 -> 누가(살인마?) 데려가서 건물에 둠(정안 아지트) -> 꽃가게(끝없이 떨어지는 하얀 낭떠러지) -> 시지프 얼굴의 친구 루나가 등장(하얀 특수 공간) -> 관리자(언니라고 불림, 정안과 함께 죽었었음) -> 정안이가 사라지고 나는 그 엄마의 딸이 됨 -> 죽다 깨어남(저승사자? 기린. 하얀 공간. 바다?)]
“…이게 말이 돼?”
그렇게 말했지만 여태 일어난 일을 생각해보면 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휴, 우리 님이 당신을 엄청나게 사랑해. 위에서 항상 당신을 보고 있다고.’
그때 말한 관리자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망할….”
이렇게 해서 뭘 어떻게 찾아.
“운명의 여신은 무슨, 그냥 나 농락하는 거지?”
설마 ‘한낱 인간 따위가 신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따위의 메시지를?
하-.
한숨을 푹 쉬고 보니 글을 더 쓰기가 힘들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간단히 풀었다.
팔을 뻗어 보기도 하고 목을 앞뒤 좌우로 돌리기도 했다.
이따금 관절이 빠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몸을 풀고 보니 빛이 새어 들어온 게 눈에 들어왔다.
침대 위에 있는 창문을 통해 하얀빛이 은은하게 드리워졌다.
그 반만 비추는 탓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침대의 반을 비춘 게 선명하게 보였다.
침대 위로 올라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작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침대를 비추던 빛이 그림자에 가려졌다.
“벌써 다시 커졌네.”
곧 달의 주기가 한 번 지나갈 것이 분명하다.
정안이 사라진 그 날 달도 사라졌었다.
대충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그때부터 열흘 넘게 지나갔다.
“무슨 찐빵 같네.
손으로 꾹꾹 누른 찐빵….”
달님은 아실까요.
작은 달님이 사라졌다는 걸.
그렇게 다시 책상으로 향할 때였다.
“달님, 달님…님?”
‘휴, 우리 님이 당신을 엄청나게 사랑해. 위에서 항상 당신을 보고 있다고.’
“우리 님…위에서 보고 있다.
잠깐만…위에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