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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1부 54화 당신 마저 (54/66)



〈 54화 〉1부 54화 당신 마저

그렇게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쿵쿵대던 심장소리가 잦아들다가 멈췄다.
이제 고요함과 우울한 암흑만 남아 주위를 맴돈다.
그런데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
이미 죽어버린 몸에서 흘러들어온 이 감각은 도대체 무엇일까?

눈을 감았지만 영원한 안식은 아직 오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것도  안에서 말이다.


이것도 죽음의 과정일까?
몸 안의 모든 장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위가 음식물을 녹이는 과정.
근육과 관절의 세포가 분열되는 순간.
기관부터 작은 세포의 운동까지.
매 순간 느껴진다.
모든 감각이 섞이고 뒤엉킨다.
기관에서 세포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피가 혈관을 따라 빠르게 움직인다.
 끝은 두꺼운 목뼈로 뚫린 구멍이다.
순행하는 피들은 앞으로 나아갔고 곧 바깥으로 나갔다.
더불어 피에 섞인 다른 것들도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뜨거웠던 피가 미지근하게 식어간다.
 식은 핏덩이들이 굳어간다.
끈적끈적 거리다 못해 꾸덕꾸덕 해졌다.


일부는 위로 향하는 혈관을 따라 올라간다.
그리고 잘린 혈관에서 올라오니 입 안이었다.
깜깜하고 사방이 막혀있어 뜨겁다.
피가 계속해서 울컥울컥 쏟아진다.
무감각한  안이 따뜻해진다.

한편 동시에 머리에도 피가 흘러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뇌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컹물컹한 뇌가 꿈틀꿈틀 거린다.
뇌와 뼈만 있는 머리가 불쑥 튀어나오다 들어가길 반복한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피부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모든 감각은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얀 방이었던 장소가 언제부터 바뀐 것 같다.
암흑 속에서 미묘하게 변한 공기의 흐름이  사실을 알려준다.
차갑게 굳은 손에 남아있던 미세한 근육에서 꺼끌꺼끌한 질감이 느껴진다.
얼굴에는 가루 같은 것이 날아와 붙더니 다시 날아간다.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리거나 바람이 얼굴을 치대는 느낌은 없다.
그럼에도 이따금 찝찝하게 젖어가는 차가운 감각.
종종 입술에 닿는 가루.
그 끝으로 새어 들어와 액체로 가득한 속에서 떠다니고.
벽에 닿아 가라앉아 혀에 닿는 까칠한 촉각.
머리카락이 누가 당기고 노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다 얼굴에 붙을 때.
비로소 이곳이 바다라고 확신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그렇다고 넘긴다.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을 담당하는 뇌가 죽어 뭔가를 깊게 생각할 수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는 건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미 죽었는데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강한 빛이 보였다.
눈꺼풀에 막힌 동공이 움직이지 않으니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내 차갑게 식은 딱딱한 볼 위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누군가 양 볼을 만지고 있다.
따뜻한 체온이 얼굴 전체로 퍼진다.
그리고 얼굴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방울  방울.
뜨거운 액체가 피부에 닿아 흘러내려 간다.
입술에 닿자 피부가 뜨거워진다. 눈물인가.
누군데 제 몸을 쓰다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잠잠하던 귀 주변의 공기가 나쁘게 돌아간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말이 선명하게 읽혔다.

“미안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를 목소리가 보인다.
보인다고 말하기엔 몸은 이미 죽었지만 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공명이 터진다.

죽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지?
죽었다면 이런 감각을 느낄 리가 없다.
실제 몸이 어디에 있는 걸까?
역시 그 집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
차가운 바닥에 엎어진 채 식어 굳은 것이겠지.
분명 그럴 것인데.
지금 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건 도대체….


끝없이 미안하다는 말이 온몸에서 울린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빛이 일렁인다.
거무죽죽한 혈관 하나하나가 다시 붉어진다.
뇌의 뉴런 세포 하나가 스파크를 튀며 다른 세포를 깨운다.

“달나라에는…토끼가 살지 안…그곳은…살아….”

미안하다는 메아리가 소음이 되어 머리를 울린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하얀빛이 온몸을 감싼다.
쿵쾅쿵쾅. 심장이 움직이고 혈관에 피가 돈다.
허했던 목에도 다시 피가 움직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모르겠지만 다시 살아나고 있다.
뇌가 살아 산소를 받는다.

의식이 점점 돌아온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또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인가.
하얀빛이 어둠과 멀어진다.
다시 눈앞에 깜깜해질 때쯤 생각했다.
이게 꿈일 리는 없다.
목뼈가 부서지고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이 생생함.
결코 단순한 꿈이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여태까지 꾼 모든 꿈이 의미 있는 영상일 것이라-.


그리고 다시 의식을 잃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누워 고요한 암흑 속에서 잠들었다.
그러다 텔레비전의 전원을 누르면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영상이 보이듯.
깊은 잠에서 깨어난 건 시지프의 목소리에 외침에 끌려 눈을 떴다.







“…루나 씨!”
“지프 님…언제 왔어요? 아니, 그 보다 울어요?”
“일 끝나고 왔죠.”
“왜 울어요. 제가 죽어서요?”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죽었다니요? 무슨 헛소리에요. 잠꼬대는 그 정도만 하고 일어나요.”
“일어나요? 아….”

포근한 감촉에 시선을 돌리자 폭신폭신한 이불이 손에 감겨있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보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시지프는 그 옆에서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저녁 차렸으니까 먹어요.”
“네….”


방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다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옆에 챙겨온 갈색 가방이 세워져 있다.

“소파에서 잠들었나….”


문을 열고 나가 거실로 향하자 샐러드와 고기가 유리상에 올려져 있다.
그 앞에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밥이 그릇에 예쁘게 담았졌다.

“먹어요.”
“네,  먹겠습니다.”

그렇게 그릇 긁는 소리가 날 때까지 서로 말없이 먹었다.
시지프는 일찍이 다 먹고 빈 그릇을 치우며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쭉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먹는데 꽤 부담스러웠지만.
그보다 배고픈 게 더 커서 맛있게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릇은 제가 치울게요. 앉아 계세요.”
“앗.”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빈 밥그릇을 가져갔다.
순식간에 상을 깨끗이 닦고 설거지를 했다.
결벽증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천성이었나 보다.

시지프가 설거지까지 끝내고 다시 거실로 왔다.
소파에 거리를 두고 앉아 어색하게 다른 쪽을 쳐다봤다.
그래도 어색하다.
벽에 아주 연하게 격자무늬가 난 것을 보며 흥미를 느낄 정도였다.
이 어색한 기류를 깬 것은 시지프였다.

“그보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아, 네.”
“무슨  말 있으신가요?”
“네?”

입가에 웃음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머리카락 색에 비해 튀는 파란 눈.
이름표가 바뀌고 주변에 변해도 한결같이 자상하다.
그러나 이 사람도 모든 걸 까먹었겠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저는 다른 곳에서 온 루나입니다.
지구라는 행성에 집이 있는데 여기서 돌아갈 방법을 모르겠어요.
제가 기억나시나요?
제 옆에 있는 작은 꼬맹이는 기억나시나요?
기억이 안 나신대도 이곳에 대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다짜고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루나 씨?”
“그냥…아까 왜 우셨는지 궁금해서요.”
“아, 제가 눈이 조금 건조해요.”
“아, 건조증 있으세요?”
“네. 특히 피곤할 땐  그래요. 어제도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신경 쓰지 마세요. 가끔 일어나는 일이에요.”

시지프가 싱긋 웃었다.


“그럼…저 누군지 알아요?”
“네? 갑자기?”
“네, 저 누군지 알아요?”

뜬금없는 묻자 그녀는 조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루나 씨는 루나 씨죠.
저희 꽃집에 자주 찾아오는 손님 따님!”
“또?”
“참 착하고 귀여운 여학생 정도….
아! 스텔라 고등학교에서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다-라는 말을 어머님께 매번 듣고 있답니다.”
“또?”
“과학자 하고 싶다고 매번 제집을 아지트 삼아 오는 밝은 사람?
꿈을 이루고 싶어서 언제나 노력하는 열정적인 학생!”
“…또?”
“글쎄요? 왜요? 무슨  있어요?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아. 정말 까먹었구나.
 잊었구나.
마음속에서 어렵게 쌓은 모래성이 무너진다.
당신마저. 믿고 있던 당신마저-.


“…그냥 별건 아니고, 어제  꿈이 생각났어요.”
“진짜 무슨 일 있으시구나.”
“…저는 지프 님 집에 있었어요.
근데 웬 이상한 사람이 ‘언니. 언니.’ 하면서 뒤에 따라 들어오더라고요.
무서워서 숨었다가 다시 나가려는데 그 여자한테 들켰어요.”
“음.”
“그리고 목이 부러져 죽으니까 깨어났어요.”
“요즘 너무 공부하느라 힘들고 피곤하니까 그러신 것 같아요.
푹 쉬다 가세요.”

시지프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이대로 가면 학업에 매진하다가 미친놈 취급당한다.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프 님!”

이렇게 놓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잡았지만, 너무 차가워 다시 손을 놨다.

“음?  할 말 남으셨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루아침에 변한 사람들의 반응.
바라보는 시선, 감정, 행동. 모든 게 달라졌다.
저 사람의 눈도 달라졌다.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눈동자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그저 자신의 손님의 딸로 바라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놀고 친하게 지내고, 제가 그 집 딸이 아닌 것도 알면서 어느 순간 갑자기 손님 딸로 기억하시고…이상하잖아요.
 그 집 딸도 아니고, 전교 1등도 아니에요.”

이제 모두의 입에선 사랑한다고 외치지만.
내 입에선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자꾸만 가슴을 쿡쿡 쑤셨다.


“루나 씨,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지극히 정상이에요!”


그녀의 양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도 잡생각은 많지만 멀쩡하다고요!
앞으로 절 병자 취급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루나 씨. 좀 피곤하신 것 같은데 쉬러 가세요.”
“쉬어야 할 건 당신이에요. 시지프.”
“…루나 씨.”


아, 왜 이러는 걸까.
모른다니까 그냥 혼자 떠나도 되는데.
왜 하필 이 사람이 날 기억해주길 바랄까.
그보단 정안이가 돌아와 주는 걸 원해도 되는데.

아아. 정안아.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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