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1부 49화 별똥별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다. 약속할 수 있냐고?
“어?”
“…….”
“…물론 그건 아니지만, 오늘은 안 돼.”
약속이라니. 이제 떠날 사람한테 무슨 약속을 바라는 거야.
[그럼 내가 부탁할게. 같이 가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이쪽은 화가 났다고 말을 하는데 저쪽은 주눅 들지도 않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부탁이라고 말하기엔 요구 같은데.”
뭔데 저렇게 강하게 밀고 가는 건데?
[진짜, 꼭 주고 싶은 게 있어.]
정안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같이 놀자 했을 때도 간절하게 바라는 저 얼굴에 넘어갔었다.
“그래도 지금은 안 돼. 이따 비 그치면 나가자.”
순수한 아이는 활짝 웃으며 좋다고 폴짝폴짝 뛰었다.
“비 그치고 금방 오는 거야. 알았지?”
하긴 화해도 했고, 막말로 언제 다시 얘랑 놀 수 있겠어?
애가 먼 데 갈 것도 아닐 텐데 좀 가서 준다는 선물도 받지 뭐.
“근데 주려고 하는 선물은 뭐야?”
싱글벙글 웃던 정안은 제 앞에서 검지를 입술에 대고 씩 웃더니 컵에 물을 뜨러 갔다.
“비가 조금 빨리 그쳤으면 좋겠다.”
선물의 정체에 콧노래를 부르다가도 바깥의 몹시 심술 난 날씨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
…
…
한창 오후가 지나갈 때 들어왔던 분식집은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금방 지나갈 것 같던 소나기는 생각보다 많이 내리다 세차게 불던 바람만 약해졌고.
벼락은 아니었지만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불안하게 만들었다.
분식집 앞에 쳐진 지붕 앞에 서서 모자 달린 겉옷을 벗어 정안에게 입혀주었다.
“비가 그나마 그쳐서 겉옷으로 정안이 너 정도는 가릴 순 있겠다.
곧 천둥도 치겠다. 꼭 가야 하는 곳이라고 했지? 어디야?”
탁탁탁! 정안은 가게 앞에서 무작정 뛰어가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황급히 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차도 느리게 움직였고 그마저도 몇 대 없었다.
건너편에서 멈춰서 멀뚱멀뚱 이쪽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정안에게 향했다.
비가 와서 뭐라 말하기도 힘들어 다시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찰박찰박.
길가에 조금 고인 물웅덩이가 신발과 종아리 뒤를 적시고.
세게 내리는 비에 입고 있던 옷이 서서히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정안에게 입혀준 파란색 운동복도 언제부턴가 물을 먹고 진한 남색으로 물들여졌다.
무겁게 떨어지는 비를 맞는 양어깨와 두 팔다리는 따갑게 느껴져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빨리 앞서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참고 뒤에서 따라 걸었다.
정안의 느린 걸음에 맞춰 한참을 걷다 보니 세게 내리던 비와 불안하게 들리던 천둥소리는 어디로 간 건지.
걸음이 멈췄을 때는 먹구름 대신 커다란 달이 비추는 밤하늘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정안이 간다고 해서 도착한 곳은 숲의 입구였다.
“여기가 가고 싶었던 곳이야?”
간다고 한 게 아지트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여길 왜?
오랜만에 씨앗을 보고 싶었던 건가?
그럼 아까 말을 해도 되는 거잖아.
내가 안아들고 빠르게 가면 금방 볼 수 있는 건데?
“정안아?”
아니면 달을 선물이라고 준비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많이 귀엽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진짜 너무 추워.
아니, 심지어 달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거잖아.
비록 크기는 다를 지라도 항상 볼 수 있는 거라고!
“정안아, 설마 선물이라는 게 이거야?”
“….”
“정안아?”
멍청하게 달만 쳐다보다가 정안이 쪽으로 돌아봤더니 그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뭘 얼굴 앞에 들이대서 놀랐네.
“이게 그 선물이야?”
아주 작은 지퍼백이었는데 안에는 두꺼운 재질의 자주색 종이가 어떤 것을 감싼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 지금 열어봐도 돼?”
그의 반응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지퍼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종이 뭉치를 꺼내어 펼쳤다.
“이건….”
정안이 선물이라며 손에 쥐여준 것은 눈에 익은 라벨이었다.
바로 얼마 전 정안의 어머니에게 돌려줬던 그 잼 라벨.
“이게 왜.”
이게 왜 여기 있어?
황당하면서 짧은 순간 온몸의 감각이 쭈뼛 섰다.
“이거 분명히 아줌마한테 돌려드렸는데.”
한때는 잼의 원재료와 보라색 꽃에 대해 알아보려고 몰래 뜯어간 거였지만.
이거를 되찾겠다고 안달 난 정안의 어머니가 손으로 목을 졸라 버린 뒤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 아줌마가 죽고 못 살아서 가져간 그 라벨이 지금, 이 손에 들려 있다.
“정안아, 어디서 났어?
이거 네 어머니 거야. 누나 거 아니야. 자, 돌려줄게.”
다시 종이에 싸고 봉지에 넣어주자 정안은 고개를 저으며 물리고 억지로 쥐여 주었다.
“이걸 나보고 가지라고?”
병에서 멋대로 떼서 갖고 다니다 네 어머니한테 죽을 뻔했는데.
두 번 가졌다간 그때는 진짜 죽을 지도 몰라.
“안 돼. 누나 거 아니니까 돌려줄게.”
역시 고개를 저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봉지를 쥔 오른손을 지나쳐 빈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의 작은 신장에 맞게 쭈그려 앉자 저의 작은 검지로 손바닥에 이런 말을 적었다.
[가져야 해.]
“어째서, 이유가 뭔데?”
[흔들린다고 했잖아.]
“흔들린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아.”
‘네 말을 안 믿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래.
만약에, 설마. 그런 말에 마음속에서 휘둘려서 그래.’
아침에 정안의 집에 잠깐 들어갔을 때 사과하면서 그렇게 말했었지.
“시지프, 그 아줌마가 그만큼 못 믿는 사람이라는 거야?”
[모두. 안 돼. 흔들리고, 확신이 없잖아.]
“….”
[하고 싶은 게 있다며. 돌아가고 싶다며.]
“맞아. 난 집에 돌아가고 싶어. 원래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겠고, 모든 것에 확신이 없어.
그래서 흔들리고, 불안하면서도 계속 의지하게 돼.”
[그러니까 있어야 해. 가져야 해. 확신할 수 있는걸. 반드시 이루고 싶다면.]
“아….”
그의 차분하고 단호한 투의 메시지 때문일까?
비를 맞아 덜덜 떨면서 경직되었던 몸과 긴장했던 정신을 조금씩 풀어주는 것 같다.
“그래, 맞아.
난 반드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서 집으로 돌아갈 거야.”
정안이도 간절히 바란다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도 믿지 마. 의지하지 마.]
“응. 확실한 것만 믿을게.”
정안은 약속하자는 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응, 약속해. 이번엔 반드시 지킬게!”
꼭 잡은 작은 손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 덜덜 떨렸던 몸이 그 작은 온기에 녹아내리는 것 같다.
“정말 고마워.”
따뜻해.
“이 곳에서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꿈에서 봤던 차가운 손이 너무 무섭고 널 잃을까 봐 두려워했는데.
생각해보니 넌 엄마가 있고 나를 살릴 만큼 강한 아이였구나.
“하필 너라 정말 다행이다.”
정안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예쁘고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는 싱긋 웃고 있는 여자 얼굴이 비쳤고.
달빛이 점점 더 이쪽으로 밝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달이 참 밝네.”
너의 눈은 노란색이 아니겠구나.
하얀 달이 되어 이 땅에서 빛나겠구나.
“비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조금만 더 구경하다 갈까?”
물에 젖은 벤치를 대충 닦고 앉아 아이도 좋다고 옆에 풀썩 앉아 밤하늘을 쳐다봤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몸을 집어삼킬 것 같은 커다란 달의 모습에 넋을 놓고 봤는데.
지금은 그보다 아주 작고 약하지만, 더 예쁜 달이 옆에 앉아 자기를 닮은 것을 본다.
“예쁘다, 그치?”
정안은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에 반사된 아이의 몸이 반짝반짝 빛났다.
태어나서 몇 번이고 밤하늘에 뜨는 크기와 모양이 각기 다른 달을 바라봤겠지만.
언제나 처음 보는 것처럼 순수하게 바라보는 저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아지트에 있을 때 요정이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안아, 저기 요정이 오는 것 같은데. 맞아?”
하늘에 빠르게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수히 많은 별똥별이 보였다.
금색은 아니지만, 흔히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말을 못 들은 건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하늘만 쭉 바라봤다.
문득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준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안아, 정안아.”
손가락으로 어깨를 톡톡 치자 그제야 알아들은 정안은 고개를 돌렸다.
“우리 소원 빌래?”
그는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가 살던 곳은 말이야.
이렇게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에는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소원을 빌면 뭐든지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
“그래서 말인데 우리 새로 약속도 했으니까, 소원은 따로 빌어 볼까?
대신 서로 뭐 빌었는지 말해주지 않기!”
세차게 끄덕이는 반응에 서로 신나서 자세를 고치고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꼭 감고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 세 번 외쳐야 하는 거야. 알겠지?”
“….”
사실 빌고 싶은 소원은 여러 개 있었다.
정안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정안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유학 안 보내줬으면.
정안이가 자기 하고 싶은 쪽으로 잘 커서 성공했으면.
내가 기억을 되찾고 집에 무사히 돌아갔으면.
지금 숲에 심어둔 씨앗이 물을 머금고 자라 엄청 튼튼하고 절대 부러지지 않는 엄청나게 큰 나무가 되었으면.
정안이랑 나, 우리 둘 다 행복했으면.
하지만 엉뚱하게도 이상하면서도 유치한 소원을 빌어버렸다.
나중에 또 정안이랑 놀게 해주세요. 또 정안이라 놀게 해주세요. 정안이랑 놀고 싶어요.
“…….”
속으로 생각하다 보니 끅끅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이런 식으로 소원해버렸다니.
하긴, 애초에 이런 소원 빈다고 팡하고 마법처럼 이뤄질 리가 없잖아.
정안이는 곧 유학을 갈 거고 나도 돌아가기 위해 어딘가로 떠날 거고.
그래도 이왕 이렇게 빌 게 된 거, 이뤄졌으면 좋겠다.
“…휴. 됐다!”
글씨를 꾹꾹 눌러쓰듯 마음속으로 꾹꾹 최대한 간절하게 소원을 빌고 눈을 번쩍 뜨자.
눈을 감기 전에 보였던 수많은 별똥별의 행진은 끝이 난 건지 한두 개만 보이다 사라졌다.
“에이, 우리가 눈을 너무 오랫동안 감았나 보다.
정안아! 너도 이제 눈 떠도 돼… 어?”
방금 전까지 벤치 옆에 앉아 있던 정안이가 안 보인다.
“…정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