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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1부 48화 오! 로망스(4) (48/66)



〈 48화 〉1부 48화 오! 로망스(4)

이제 레망은 완전히 몸을 돌려 로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날 당신의 노래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추고 골목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전 아마 신의 주검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겠죠?

싱긋 웃는 레망의 눈에 흐르는 눈물이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붉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로엔은 검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한때 극단에서 쫓겨나고 절름발이가 되어 비틀리는 거리를 걸어갈 때 참 억울했어.
지금 생각해도 참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


….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은 네가 여기 있고, 내 노래를 사랑하는 호르를 비롯한 사람들이 있잖아.


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금방 눈물이 그친 그녀를 바라봤고.


그가 웃자 그녀도 웃었다.

-로엔 씨….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목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은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해.

로엔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정말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둘은 마주 보며 서서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다 하늘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 배경이 둘 사이로 배어 나와 브라운관의 하얀 빛을 물들였다.


-오늘따라 노을이 참 붉네요. 그렇죠?


-응, 그러게.

- ….

- …춤출까. 우리.

- …좋아요.


장면은 둘만 남은 광장에서 로엔은 레망과 춤을 추면서 끝이 나고.

검은 화면 위에 천천히 글자가 띄워지며 로엔이 말했다.

______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불행했지만
알고 보면 가지고 있던 것이 많은 이들이었다.

물론 행복하다고 여기 멈춰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삶이 불행하다고, 지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행복의 기준은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는 조금씩, 매일 새롭게 변하고 있다는 것.

쥐어지지 않는 것을 쫓다 넘어지고 부러진대도 괜찮다.
길 끝에 황홀한 노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Etiam si parva sunt vita incipit, romance,
est amor verus erit in fine illius romance.


______

“…….”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불이 켜지면서 정안과 둘만 남은 본관을 비추었고 제작진 소개 자막이 빠르게 올라갔다.


주연, 조연, 음향, 참여회사 이름 등등….

영문 비슷한 문자로 길게 적힌 글들이 줄줄이 올라가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공책이 보였다.

[우리 이제 나가자.]

정안이 공책에 글을 적은 것이었다.

“…그래, 그러자. 지금 몇 시지?”


[아직 한창 오후야. 배고픈데 밥 먹자.]

물어볼 줄 알고 미리 적어둔 건가?

정안은 공책 아랫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응. 나가서 밥 먹자. 누나도 배고프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데리고 문을 열고 본관 밖으로 나갔다.






거리를 나서자 날이 조금 갠 하늘이 거리 위에서 움직였다.


늦은 점심인데 뭐 먹을까.


고민하는 와중에 정안이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를 쓰더니 공책을 얼굴 앞으로 훅 들이댔다.

[비가 아직 안 와서 다행이다.]

“응, 그러게. 우산이라도 챙겨왔으면 그런 걱정 없을 텐데.”

[지금 시기에 내리는 비는 조심해야 한대.]


“응, 누나 조심할게. 정안이 너도 조심해.”

그는 내 말에 싱긋 웃으며 긍정을 표했다.


점심은 건너편에 보이는 식당 중 아무 곳이나 골라 해결하기로 했다.


사거리로 가서 횡단보도를 밟고 건너가자 때마침 분식집이 열려 있었다.

들어가 보니 손님 하나 없는 텅 빈 식당이었다.


가게 주인은 잠시 쉬고 있었는지 빠르게 뛰어나와 자리를 안내했고.


주문하라고 말하면서 만들고 있던 떡볶이를 국자로 살살 돌려주었다.

안내판을 보며 주문을 마치고 정안과 조금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영화 어땠어?]


“음…제목만 볼  로맨스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거운 내용이 나와서 생각하면서 봤어.”

수년 동안 조연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주연으로써 무대를 선 날 첫 공연에서 다쳐 절름발이가 되어 극단에서 쫓겨난 로엔.

화목하고 유복하던 가정이 망가지고 무너져 가족들 모두가 죽고.

결국, 홀로 남아 비참하게 끝을 맞이하려 했던 레망.

어둡고 힘들었던 과거를 가진 둘이었지만 어쨌든 그 둘이 만나서 극복하는.


정확히 말하면 로엔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거지들을 만나서, 레망은 로엔의 목소리에 이끌려 따라가다 행복해진 것이다.


비참하게 살다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레망이 그날 거리를 나서지 않았다면 로엔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고.

“두 인물  힘든 과거를 지났지만 어쨌든 서로 만났고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서 나쁘진 않았어.”

비록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극복한  사람은 아마 각각 배우와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까?

“지루하지 않은 영화였어.”

[그럼 재미있었어?]

“음…. 그건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지만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로맨스 코미디를 생각하고 갔지만, 전혀 코믹하거나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고.

특히 노을이  마지막 장면은 어쩐지 거북하게 느껴졌다.

“레망은 20대, 로엔은 30대잖아.
물론 나이 차이로 따진다면 대여섯  차이 나지만…그래서 마냥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같고.”


제목이 ‘로망’이 들어가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정이나  다 여자로 해서 이야기를 넘어갔다면 괜찮았을  같은데.

굳이 말하자면 지루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조금 아쉬운 영화였다.

“….”


말하다 보니  말은 없고 괜히 민망해져서 정안에게도 물었다.


“정안이 너는 재미있었어?”

정안은 이쪽으로 멀뚱멀뚱하게 쳐다보더니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재미없는 영화가 되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얼렁뚱땅 영화관을 따라갔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걸까?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졌고 이제는 정안이를 다시 편하게 대하게 된다.


마침 가게 주인인 뚱뚱한 아줌마가 이쪽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왔다.

목에서부터 무릎까지 덮인 빨간 앞치마 앞으로 보이는 떡볶이의 붉은 빛깔이 더 강렬하게 보인다.


“감사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 접시와 순대 접시를 조심스럽게 받아 식탁에 올려두었다.

갓 만들어진 뜨거운 상태라 그런지 입안이 따갑다.

“습-. 아, 맵다.”

내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허우덕 대는 모습을 본 걸까?


정안은 먹으려다 멈칫거리더니 옆에 있는 순대를 집어 이로 잘라 먹었다.


덕분에 순대는 금방 먹었지만 떡볶이는 물로 말아 먹다 시피 먹어치웠다.

“후, 배부르다.”

위와 배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지는데.

하긴, 어지간히 매운맛이 아니었어.


“정안아, 소화도 할 겸 우리 조금만 쉬었다 나갈래?
많이 먹었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안은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깥은 여전히 수증기로 가득 찬  구름으로 가득했다.

도대체 저 우중충한 하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가 공책에 뭘  적지 않으니 이어갈 주제가 없어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혼자 또 나불거리면 민망해지는데 이제 그런  싫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턱을 괴고 그에 따라 바깥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큰 구름 사이로 번뜩번뜩 보였던 하얀 빛이 어느 순간 다시 사라졌고.


다시 하늘은 오늘 낮에 밖을 막 나왔을 때처럼 꺼뭇꺼뭇한 구름만 남았다.

거리는 어두워져 오후가 저녁처럼 어두컴컴해졌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헐.”


큰일 났네. 지프 님이 찾겠다.


집 가다가 시지프 만나면 정안이가 또 무서워할 텐데.


정안이는 빨리 집에 보내야 겠다.


“정안아. 우리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

툭툭. 정안이 팔을 툭툭 쳤다.

[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혀 있던 말.

이 날씨에 어딜 가려고?

황당한 말에 고개를 들어 정안을 쳐다봤지만 정작 그런 말을 한 어린아이는 마냥 신나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안 돼. 감기 걸려.
오늘은 이만큼 잘 놀았으니까 다음에는 더 많이 놀자.”


“…….”

“아무리 고집 부려도 안 돼.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었잖아.
이따가 비가 좀 그치면 집에 데려다줄게.”


 된다는 말에 마음이 상해서 토라지기는.

더 못 논다는 것에 삐진 건지 공책을 펴서 뭐라고 쓱쓱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검지를 올려 얼굴에 들이밀었다.

“한 번만? 안 된다니까.”

“…….”


“이상한 고집 피우지 마.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


나름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서 속을 안 썩일 거라 생각했던.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어린 아이는 ‘비오는 날인데 가보고 싶은 곳을 당장 하고 싶다.’는 엉뚱한 고집에 사로잡혀 포기를 못 하고 가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탁도 아니지. 거절하는데 이렇게 매달리는 건  쓰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행동에 갑자기 화가 저 아래서부터 치밀어 오르지만, 꾹 참고 물었다.


“꼭 가야 하는 곳이야? 내일도 모레도 아니고, 당장 오늘?”


어린아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이렇게 날씨가 궂어선 오늘 안에 끝나지 않을  같은데?”


아이는 공책에 휘갈겨 써서 보여주었다.


[소나기잖아. 금방 지나가는 거라 기다리면 돼.]


“곧 저녁일 텐데?”

[엄마 늦게 오셔. 선물 줄게.]


“선물? 선물을 어디에 뒀는데?”


[내가 가고 싶은 곳.]

맙소사.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

“…….”

대꾸할 힘이 없어 말을 말았다.


대여섯 살이 반드시 가야하는 이유가 뭘까?


 나이에 반드시 가야만 하는 장소가 있나?


[화났어?]

저도 모르게 찌푸리는 표정을 지었던 걸까?


작게 떨리는 연필을  손과 꿈틀거리다 축 처지는 입술이 보였다.


“네가 자꾸 안 된다는 걸 해달라고 하니까…조금.”


사실 많이 화났다.


저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나가선 딱 감기 걸리기 좋을 것이다.

뻔히 몸에 문제가 생길 텐데 계속 가자고 조르는 정안의 태도가 조금 짜증이 났다.


“다음에 같이 놀아 줄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약속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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