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1부 44화 아주 자연스럽게
몸이 조금 으슬으슬해서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았지만.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밤새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해졌다.
이게 다 집에 오자마자 시지프가 빠르게 이것저것 챙겨다 준 덕분이다.
침실 문을 열고 나서자 익숙한 역한 냄새가 났다.
거실로 나가자 시지프는 이미 일어나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유리상에 신문을 활짝 펴서 눈으로 읽고 있었다.
역한 냄새의 정체는 신문 왼쪽에 놓인 보라색 차였다.
조금 미간을 찌푸렸지만 맛있다고 먹는 것일 테니 참자고 생각하며 코를 막지는 않았다.
“지프 님,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루나 씨도 잘 잤어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신문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말하기도 뭐해서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문득 서 있던 게 조금 민망해져서 차와 먼 그녀의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심심한 걸 알아차린 것일까?
시지프는 열심히 신문을 읽다 이쪽으로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읽어 볼래요?”
“아, 아니에요.”
“읽어봐요. 곧 성인이 되시면서 세상일도 알아 둬야죠!”
아아. 지프 님.
저는 못 알아보는 문자로 이루어져 있을 그림 같은 신문을 읽을 자신이 없어요.
심지어 영어도 잘하지 못한다고요!
하지만 시지프의 성화에 알았다고 말하고 1면의 내용을 읽었다.
다행히 이상한 문자로 쓰여 있을 것 같았던 신문은 한글로만 적혀 있어 안심하고 읽었는데.
1면 첫 줄에는 ‘요즘 뜨고 있는 리베라 공주 스캔들, 그 진실은?’이라는 제목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리베라?”
“그거 말고요. 여기 어제 소식 읽어 봐요. 벌써 기사가 나왔어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잦은 낙뢰와 장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날은 계속되는 소나기와 낙뢰가 치는 날씨로 도로 운전은 물론 대중교통 이용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선박과 비행기는 모두 취소되었고 지하철 외에 다른 교통수단은 오랜 시간 지연되거나 역시 전체 운행이 취소되었다. 기상청에서는 빗물의 많은 양과 비정상적으로 내리치던 낙뢰는 앞으로 열흘간 전국적으로 지속할 예정이라고 발표했고, 예측할 수 없는 어제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해선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다.]
헉. 열흘이나 그 지긋지긋한 날씨가 지속할 거라고?
게다가 원인을 아직도 몰라?
답답함에 서둘러 이어지고 있는 아래 내용을 읽었다.
[이 현상이 언제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어 결국 정부에서는 홍수 지역을 포함한 다른 지역은 앞으로 예정인 지하철의 주요 노선을 제외하고 운행 중지하기로 했다. 이 현상에 대하여 전문가 000은 ‘이 현상은 여태 맞이했던 여름 장마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볼 수 없던 것이며,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 지도자들의 화해와 회의의 방향에 따라 달렸다.’라고 답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보일 이 이상 현상을 맞이할 자세가 필요하다.]
기사는 얼추 예상될 것 같은 전문가의 말로 마무리했다.
어쨌거나 어제 날씨에 대한 결론은 ‘모른다.’라는 건가?
지구에도 온난화로 이상 현상이 일어났었지.
보면 볼수록 사는 존재가 외눈박이일 뿐 지구랑 다를 건 딱히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루나 씨, 그래서 열흘 동안은 여기서 머물러야 할 텐데. 괜찮겠어요?”
“어쩔 수 없죠. 집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사실 기사를 읽고 나서 우문을 던졌었다.
벼락 좀 쳤다고 정전이나 운행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지만 열흘이나 쉬어야 하나?
하지만 곧바로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 정도로 무서운 날씨인데 열흘이나 유지될 예정이라고 한다면 중지하는 게 맞는 거라고 답했다.
“설령 오늘 아침 날씨가 맑대도 오후에는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는 것이고, 이미 운행은 중지한다고 했으니까요.
괜찮고 말 게 없죠. 오히려 지프 님은 괜찮겠어요? 제가 여기서 더 머물게 되었는데.”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어차피 저는 루나 씨 집 찾아 주려고 길 떠나려고 했잖아요.
저야말로 잘됐어요. 열흘 동안 루나 씨 살 좀 찌워야겠어요.”
“네? 갑자기요?”
“갑자기는 무슨! 루나 씨 원래도 말랐는데, 지금의 루나 씨는 더 말랐어요.
마치 예쁜데 마른 꽃 같아요.”
“마른 꽃….”
그녀는 단지 꽃에 비유했지만, 처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건 사실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먹는 건 거르거나 적당히 샐러드나 샌드위치로 때우기 일쑤였고.
게다가 정안을 따라 아줌마에게서 도망칠 때는 아예 저녁을 걸렀었으니.
마음고생하고 힘들었던 날에는 먹는 것도 먹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얼굴을 볼 때면 핼쑥해진 게 눈에 보였다.
“운동은 했는데 먹는 양을 안 늘려서 그런가 보네요.”
“어머, 그렇다면 더 먹어야겠네요!”
시지프는 양 손을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 다이어트할 예정 없죠?”
“딱히, 없어요.”
“다행이다.
있어도 없어야 해요. 아직 쑥쑥 크고 많이 먹어야 할 나이잖아요. 이제 아침 먹을까요?”
그녀는 신문을 반으로 접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다음 기사 내용이 궁금했지만, 그녀가 그대로 자기 방에 갖다 놓고 와 버렸고.
곧바로 주방에 가서 아침 준비를 하러 가서 읽고 싶다는 말을 삼켰다.
“뭐, 신문은 매일 보는 것 같으니까 기회가 되면 보여 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그녀가 차려준 아침은 식도로 술술 넘어갔다.
뭐 언제나 그렇듯 맛있었지만, 오늘은 살을 찌우겠다는 말대로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왔다.
고기를 먹는 내내 그녀는 젓가락을 들지 않고 턱을 괴고서 이쪽을 쳐다봤는데.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저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바라본 거라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아침을 먹어 치운 뒤 설거지를 하는 그녀에게 깨끗하게 비운 그릇들을 갖다주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면서 받는 그녀의 얼굴에 대고 잠시 나갔다 오고 싶다고 말했다.
“네? 아까 기사 안 봤어요?
위험하니까 대신 말하려다 보여준 건데….”
“조금 답답해서 바람 쐬고 싶어요. 마음 정리도 하고 싶고.
집 근처에서만 돌아다니다가 위험해졌다 싶으면 다시 돌아올게요.”
그녀는 안 된다고 말하려고 한 것 같지만, 조금 슬픈 표정을 짓더니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아무래도 자기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나가지 말라며 방에 가뒀대도 창문을 깨서라도 나갔을 테니.
문을 열고 나와 시지프의 바로 옆집 검은 지붕이 달린 대문 앞에 섰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려 금방이라도 비가 왈칵 내릴 것 같았다.
긴장한 탓에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고 조심스레 벨을 눌렀다.
“나야, 정안아.”
…
…
…
바람 좀 쐬고 오겠다는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내일 죽을 위험을 가졌는데.
이 날씨에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면 산책을 하고 싶어서 나갈 리가 없지.
단지 정안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특히 어제 기차역에서 생생한 그 꿈을 꾸고 나서 그 마음이 더 강해졌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간격을 두고 벨을 두어 번 정도 눌렀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끽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정말 다행히도. 문을 연 것은 정안이었다.
“정안아….”
“….”
힘없이 열린 문 너머로 정안이 보인다.
항상 보였던 검정 눈과 짧은 머리칼. 작고 통통한 몸에 잘 어울리는 검은 멜빵바지를 상상했는데.
녹아내릴 것 같은 힘없는 눈과 탁해진 검은 눈동자. 그 아래 깊게 파인 거뭇한 눈살.
지금 눈에 들어온 정안의 모습도 꿈일까?
게다가 넥카라 달린 티셔츠와 낯설게 보이는 청반바지를 입은 모습은 축 늘어진 인형 같다.
그 며칠 새에 고생이 심했던 걸까?
찔리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하얀 피부는 어디로 가고 얼굴색은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고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에 벨을 눌렀지만 반가움보다 걱정이 되었다.
“정안아, 괜찮아?”
눈만 보면 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안은 질문에 대답 대신 대문을 열어둔 채 뒤로 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저 뜻은 따라 들어오라는 의미다.
대문을 닫고 현관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정안은 2층에 올라갔고 홀로 남아 멍청하게 있기도 뭐해서 자리에서 두리번거렸다.
이곳을 나간 지 이틀밖에 안 되었기에 가구가 새로 생겼다거나 빠진 건 없었고.
오히려 이 집에 2주 동안 있었다는 게 긴 꿈으로 다가올 만큼 휑했다.
아줌마는 정부의 발표가 나든 말든 일을 하러 나가신 건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집에 있었다면 정안이 대문을 열어줄 리도 들여 보내줄 리도 없을 것이다.
언제 내려왔는지 정안은 주방으로 들어와 익숙한 하늘색 표지의 공책을 들고 왔고.
식탁 맞은편에 앉아 공책을 펴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안중에도 없는 건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표정으로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내었다.
“….”
아, 언제 말을 꺼내야 할까?
아까 대문에서 사과부터 하고 올걸.
지금이라도 말을 꺼내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
언제 이야기를 하지. 언제 사과하지?
머리를 쥐어뜯으려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소곳하게 앉았는데.
문득 주방 전체를 밝히는 전등이 주황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꽃 가게에 달린 은은한 주황색이랑 똑같은 전등이다.
다른 점이라면 모자가 사는 집의 주황등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는 것.
빛이 아래로 내려오고 한참 글씨를 쓰는 정안에게 닿는다.
조금 누레 보였던 큰 얼굴이 붉게 보였고.
얼굴선이 닿는 경계 부근에는 초록 띠가 그려졌다.
전체적으로 무미건조하던 그의 표정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자연스럽게 정안의 얼굴도 찬찬히 바라봤다.
큰 얼굴에 작은 생채기 없이 깨끗한 얼굴이다.
2주 전에 났던 상처들은 온데간데없이 깨끗하게 나아 있었고 조금 길었다 싶은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어졌다.
왼쪽 뺨에 작은 점이 찍혀 있는 건 처음 봤다.
지금 이렇게 봐도 모르는 사실을 깨닫는데 앞으로 이 어린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곧 학교도 들어갈 테고 마냥 밉게 보였던 나도 아마 기억 속에서 잊혀.
하루하루 지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어려운 문제를 마주하게 될 텐데.
하지만 난 정안이를 잊을 생각도 없고 괴롭게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그 스스로는 내가 없던 사람처럼 잊힌대도 사과하는 게 맞지 않을까?
어린애라고 이 사소해 보이는 것에 지나칠 수가 없을 것 같아.
“정안아.”
공책을 보고 있던 정안의 시선이 이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맞춰 입을 열었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