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1부 38화 퍼런 위성 아래 돌아가는 빌어먹을 행성 (38/66)



〈 38화 〉1부 38화 퍼런 위성 아래 돌아가는 빌어먹을 행성

화내느라 폭삭 늙어버린 아줌마는 헉헉대며 땀을 뻘뻘 흘렸다.

“못 들었어? 나가라고.”

아줌마의 차가운 말투에 대꾸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채 열지도 않은 쇼핑백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손수레가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프 님께 손수레 갖다 드린다 해놓고 아직 안 갖다 드렸구나.

덕분에 저걸 챙기는 데 편하겠지만. 나가는 김에 갖다 드리고 올까?

여길 떠나면 더 볼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달칵.

수레를 펴고 그 위에 크고 무거운 쇼핑백을 올렸다.

어찌 보면 갑자기 쫓겨나는 상황이었는데 이상할 만치 후련하고 조금은 기뻤다.

속상하다든지, 억울하다든지. 그런 감정 없이. 마음이 텅 빈 것처럼.

그래서 아무렇지 않았고 빠르고 아주 자연스럽게 준비했다.

아줌마는 언제 올라온 건지 그새 2층 계단 입구에 서서 이쪽을 노려봤고.


처음 보는 쇼핑백과 그 양에 의심스러운 듯 어디서 난 거냐고 물었지만 무시했다.

나중에 아줌마는 훔친 거냐며 소리 지르고 욕을 퍼부었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묵묵히 앞만 보며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탁. 탕. 탁.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손에 딸려 굴러오는 수레바퀴가 텅텅거리며 내려오는데.


계단에서 부딪히는 거친 소리가 어쩐지 지금은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청량하게 들린다.

작별 인사도, 마지막 한풀이도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결국 쫓겨났네.
뭐.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화냈던 거니까.”


터벅터벅 걸어가 시지프 집 앞으로 가서 벨을 눌렀지만 자는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에 놓고 나올까. 무심코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주인 있는 집인데 멋대로 그러면 안 되지.
그냥 앞에 놓고 가야겠다. 그리고 이 짐들은…수레랑 같이 놓자.”

수레를 끌어와  앞에 두고 조금 전까지 안에서 화를 내고 있었던.

지붕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옆집을 바라보았다.


저기를 나온 뒤에 앞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흠, 사거리를 지나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른 도시로 이어진다고 했으니.
사거리 쪽으로 가볼까?”

…그렇다면 가기 전에 한 군데만 들렀다 가볼까. 그것도 아마 마지막이 될  같으니까.






발이 닿은 곳은  입구를 지난, 정안과 함께 씨앗을 심었던 자리였다.


그동안 비가 와서 조금 쓸리긴 했지만 심은 자리가 움푹 파이거나 씨앗이 빠져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처음 생각했던 대로 씨앗은 나무로 자랄 생각이 없는 건지 새싹도 나지 않았다.


“역시 작은 묘목을 심을 걸 그랬나.”


그저 이 씨앗은 정안과의 추억을 쌓기 위한 매개체였을 뿐.

어떻게 자라는지 새싹이 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았던 걸까?

정안이가 남몰래 키웠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난 심은 뒤에는 한 번도 이 곳에 와서 본 적이 없었다.

나무가 자라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아직 안자라는 것일 수도 있겠지.

남몰래 열심히 움직여서 땅을 뚫고 나올 때가 있겠지만.


아마 이 나무가 다 자랐을 때 내가 그 모습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여길 떠나고, 정안이도 여길 떠나면.”

잊히려나.

입꼬리를 올려 애써 웃어보려 했지만 씁쓸함에 금방 내려와 웃는 건 그만두었다.


다시 입구로 돌아와 벤치에 앉아 위로 올려다봤다.

눈을 감은 것처럼 깜깜한 하늘에 외롭게 떠오른 달이 보인다.

별 하나 없이 달은 누런 가로등 빛보다 밝고 퍼렇게 빛나고 크게 자리하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처음 봤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커진  같은데.

“이런 상황에 봐도 달은 참 예쁘네.”

덕분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지만 정말 기분이 좋아져서 웃은 건 아니었다.


달. 어떤 말로는 루나. 또는  하늘에 보이는 유일한 위성.

뜬금없지만, 여기 외눈들도 달나라에는 토끼가 산다고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달나라의 토끼라고 한다면 하얀데 조금 분홍빛이 도는 새빨간 눈을 가진 토끼가 생각난다.


 달에선 하얀 토끼  마리서 떡방아를 찧는다는.


어릴 때라면 아마 흔히 들었을 것 같은 동화 같은 이야기.

정작 저기엔 단 한 마리도 안 산다는 게 사실이지만.

나에게 이 세상은 저 먼 곳에서 빛나는  같다.


행성이 둥근지 네모난지도 모르는 세상에 가진 것 없이 던져졌는데.

그곳에는 떡을 왜 찧는지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떡만 만드는 토끼들만 잔뜩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던져졌고, 갈 곳 없이 여기로 걸어왔다.


“빌어먹을 달 같으니.
콱 떨어지고 터져버려서 가벼운 먼지조차 안 남았으면 좋겠어.”


“루나 씨!”

뇌까리는 동시에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시지프였다.

“지프 님.”

“야밤에 여기서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길게 말해요?”

“….”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달이 뜬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수레랑 짐들은 왜 놓고 가셨어요?”


“…필요 없어서요.”

대답해놓고 자조했다. 필요 없어서가 뭐냐 필요 없어서가.


“아까 집으로 들어가신다고 다급하게 나가시더니. 집으로 들어가셨어요?”

“…네.”


“여기서 이렇게 있으면 감기 걸려요. 얼른 집으로 들어가세요.”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밤이 지나 새벽으로 넘어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마음이 약해진 걸까.

거짓말로도 들어가겠다는 말은 못 하겠다.

물론 울음이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단지 막막하고 씁쓸하니까. 제발 그 누구도 건들지 않았으면.


“괜찮아요?”

“…늘 똑같죠.”

안 괜찮다는 거네요. 시지프가 웅얼거렸다.

“그래도 짐을 버릴 것까지는 없잖아요.”

“있어요.”


“왜요?”

“…들일 공간이 없어졌으니까?”

시지프는 입을  닫았다.

그때 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갔고 내가 말을 꺼냈다.


“흠. 달이 점점 커지네요.”

아까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해놓고 보니 정말 그랬다.

처음에는 100원짜리 동전 크기였는데 지금은 큰 접시만 하다.


“네. 하지만 그러다 곧 사라질 거예요.”

“바람 들어가는 풍선 같네요.”


“그래도 참 예뻐요.”

그리고 다시 조용해지자 이번엔 시지프가 입을 열었다.

“떠나면 어디로 가실 거예요? 학생이시잖아요.”


“집으로 돌아가겠죠.”


“집이 어디인데요? 제가 같이 모셔다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러게. 집이 어딜까? 어디로 가면 집이 나올까.

알고 있다면 여기서 당장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밤에는 어두워서 혼자 다니면 위험할 거예요.”


“아니요. 데려다주실 필요는 없고, 오는 지프 님댁에서 묵을  있을까요?”

“…알겠어요.”

시지프는 흔쾌히 허락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집에 들어가 편히 잠들  있었다.

…아주 편한 건 아니었지만.







해가 일어나기 전, 어제 낮에 잤던 침대에서 기지개를 피며 먼저 잠에서 깨었다.

시지프는 이미 일어난 건지 방 안으로 음식 냄새와 찌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문을 열고 복도를 나서자 거실에서 나오던 시지프와 마주쳤다.


이미 식사 준비를 다 마치고 나를 부르려고 온 건지 앞치마도 반쯤 벗겨져 있었다.


“잘 잤어요?
배 많이 고프죠. 얼른 와서 먹어요!”


“네.”


시지프는 웃으면서 반겼다.

거실 상에는 따끈따끈한 쌀밥과 고기, 그리고 검은 과일이 버무려진 샐러드가 올려져 있었다.


밥이다.


“이거….”

“친척 집에선 이렇게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그리고 다 먹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쭉 먹기만 했다.

중간에 시지프가 쌀은 자기 친구가 선물로  거였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배고팠으니까.

시지프도 어느 순간부터 옆에서 아무  없이 그릇을 비웠고.

밥그릇을 싹싹 비우고 상을 정리하고 나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제는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이제 친척이라는 말로 덮기엔 거짓말로 들통날 게 뻔했다.

여차하고 시지프가 가서 따지면 금방 알게 될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데.


어떻게 말하면 상대가 나를 믿어줄까?


“저 사실 친척 없어요.”

말문을 그렇게 열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집은 다 모르는 사람들이고, 방학 중에 여행하다가 혼자 길을 잘못 들었어요.
그런데 마침 저  아주머니께서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저를 며칠 묵게 해주셨어요.”

“아주머니라면 친척이라고 하셨던?”

“네, 맞아요.”

“그럼…저에게 거짓말을 하신 거예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전 이방인이었고, 처음엔 지프 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꺼릴 거로 생각했거든요.”

“아.”


“그래도 운이 좋았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막막했는데 아주머니께서 먹여주고 재워주셨으니.”


“그럼 저한테 말씀해주시지. 찾아드릴  있는데.”

“제가 길치 중에 길치인 데다, 집이 여기서 꽤 멀어서 어디로 가야 할인지도 몰라요.”

“그런….”

 보고 나면 거짓말은 아니다.


정말로 가진 것이 없고, 길을 잃었고 집이 어디인지 모르니까.


“그래도 그동안 저 집에서 살면서 꼬마애도 친했는데, 결국 나가라고 하시더라고요.
2주 가까이 집에서 머물렀는데,  거슬렸겠죠.”


“왜요? 루나 씨가 어떻다고!”

“저는 이방인이잖아요.”


“외모가 달라서요?
그런 거로 따지면 저도 이방인인걸요. 눈도 똑같이 두 개고.”

“3년이면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그래도 여기선 있을  없는 일이에요.”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는 거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죠.”

단호한 대답에 시지프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말았다.

“그나저나 일찍 나가야겠어요.”


잘못해서 만나면 꽤 곤란해지니까.


“조금 있다가. 출근 시간 지나고 넉넉할 때 가요.
사람들 사이에서 끼어 가지 말고 이따 저랑 같이 가기로 해요!”


“어디인 줄 아시고?”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고 가면 되죠!
돈도  벌었는데 몇 달 쉰다고 문제 되겠어요?”

 여자.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하지만 낮에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치면 제가  민망해질 것 같은데요?”

“대낮에요? 아니요. 그럴 확률은 거의 없어요. 여긴 휴일이 없거든요.”


“휴일이 없어요?”


“네. 이쪽 주변 마을은 대부분 그런 것 같아요.
아주머니도 보시면 매일 일하러 나가시지 않던가요?”

“네.”

그게 일인지 애인 만나러 가는 건진 나도 모르겠지만.


음식을 사올 돈은 꾸준히 들어오는 거 보면 일도 하는 거겠지.

“이 근처에서 회사에서 대부분 다니는데, 거긴 특수 경우가 아니라면 병가조차  안 내주기로 유명해요.”

‘특수 경우’라 하면 역시 범죄와 관련된 경우.


그만큼 노동자에게 휴일을 주는 일이 없다는 건가?


그럼 내가 정안이를 데리고 아지트에 다녀왔을 때 아줌마가 있던 건…실종신고라도 했다는 이야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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