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1부 36화 롱드레스와 루나 (36/66)



〈 36화 〉1부 36화 롱드레스와 루나

*

칼이 날아와 코앞에서 사라졌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어린아이도.

노란 조명 아래 거실에 보이던 큰 자루도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아.


죽은 건가?

잠깐만. 서너 살  어린아이가 식칼을 들고 와서 날린다고.


다시 생각해보면 현실이랑 너무 동떨어진 전개 아니야?


그래. 이건 현실이라기보단 꼭 꿈에 가까운….


*


“…헉!”


“루나 씨! 괜찮아요?”


“…헉. 헉.”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 올라 헉헉대는데.

시지프가 침대 옆에 하얀 의자에 앉은 채 양손으로 왼손을 꼭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손을 뻗으면서 말을 하려는데 목이 따끔거려서 주춤 거렸다.

“아까 소리를 막지르셔서 아플 거예요. 말하지 마세요.”


휴지로 눈물을 닦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 저한테 사촌 동생 일을 이야기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렇게 힘들어하실 줄은 몰랐어요.”

언제부터 여기에 계신 거지?

딱 그런 생각을 했을  표정에 다 드러난 것일까? 시지프가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했다.

“그러니까, 집에 가실 시간이 된 것 같아서 깨우려고 찬물이랑 간식거리를 들고 갔었어요.”

그녀는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는지 조금 빨갛게 부은 눈에서 다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런데 가보니까 루나 씨가 침대에서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고, 몸을 들썩이면서 괴로워하셨어요.”

훌쩍거리는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몸은 벌벌 떨고 있고, 땀도 엄청나게 흘리셔서 죽는 줄 알고 너무 놀라서. 죄송해요.”


단순히 조금 불쾌한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는데 잠꼬대까지 했었나 보네.

물론 따진다면 ‘조금’은 아니었지. 특히  자루는….

“그냥 악몽 꾼 건데.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답하고 미지근해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후.”


물을 한 컵 마시고 나니 목이 조금 시원해진 것 같다.

“피곤해서 잠을잤더니 이런 꿈을 꾸네요.”


“피곤했다니, 사촌 동생 일 말고도 많이 힘든 일 있던 거예요?”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이 나이에 힘들 게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말대로 악몽이니까. 조금 피곤해서 그런 꿈을 꿨나 봐요.”


“괜찮다는 소리만 하지 말고.
피곤하시다니 일단 좀 눕고, 저에게 다 말해 봐요.”

“저 진짜 괜찮은데…정말 괜찮아요.”

눈을 피하자 시지프가 얼굴을 들이밀어 억지로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괜찮아도 말해줘요. 듣고 싶어요.
많이 걱정했어요.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보였는지.
전 정말 괜찮으니까. 다 이야기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다 이야기하라고?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아니면 꿈만?

원래의 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이곳이 떨어진 뒤의 이야기를?

정안이랑은 사촌 관계가 아니라는 거짓말부터 사실은 당신을 많이 의심했다는 것까지?


그런 걸 그녀에게 말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유쾌하지 않았던 꿈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저렇게 걱정하는  보면 대충 말을 흐리고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


차라리 꿈 이야기를 하는 게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보다 더 낫겠지.

“흠. 그게, 그러니까.”

결국 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그녀는 말이 끝날 때까지 말없이 경청했다.

“…뭐, 이런 꿈이었어요. 정말 피곤해서  것 같아요.”

“피곤해서 꾼 것 치곤 상당히 자세한걸요?”


“가끔 꿈 중에도 이상할 만큼 선명한 게 있잖아요. 그런 꿈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꿈속 거실에서 본 그 자루가 마음에 걸렸다.

여자아이야 얼굴도 보이지 않고 형체만 겨우 드러나서 정말 피곤해서 해괴했을 수도 있지만.

아이 하나 정도는 들어가도 한참 남을 거대한 자루에 들어있는 게 도대체 뭐였을까.


거실 한구석을 차지할 만큼 컸던 물체였고.

칼로 뚫린 자루 구멍에선 초록색 물이 벌컥벌컥 쏟아져 나왔다.

물론 노란 조명에 비친 그런 물체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일반 하얀 LED 조명이었다면 아마 초록 물은 초록색이 아니라-.


“루나  정말 많이 피곤하셨구나.
꿈은 자주 꾸고 선명하게 보일 만큼 좋지 않은 거라던데.”

“그러게요. 하지만 정말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하죠!
현실이면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절할지도 모르는데.
정말 꿈이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지프 님. 이건 정말 뜬금없지만 궁금한 게 생겼어요.”


“뭔데요?”

“부모 모두가 아이를 버리는 경우도 있나요?”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설마 아까 꿈에서 아이가 엄마를 자꾸 외친 것 때문에 그래요?”

“….”


“음. 애를 버린다는 건 주변에서 흔하게 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부모가 바빠서 조금 방치되는 경우는 많이 본 것 같아요.”

“아.”

“워낙 바쁜 세상이잖아요.”

“그럼 이혼 가정은요?”


“어머! 이혼 가정이라니.
어머. 세상에나.”


“없나요?”


“말이라고 하나요.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신이 만든 최고의 조합이라고 부르는걸요.”


신이 만든 최고의 조합? 이혼은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무리 세상이 과학 기술이 발달 되어서 종교가 약해졌다지만,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둘 다 벌을 받는걸요.”


“특수한 경우라면, 부부나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 같은 걸 말하는 거죠?”


“여러 가지가 있지만, 범죄가 그사이에 끼면 특수한 경우로 자리 잡겠죠.
그래서 다들 결혼을 중시하고 있어서 요즘은 다들 결혼을  하더라고요.
물론, 저도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하긴,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지구랑은 다른 관점.


아니지. 과거 역사를 보면 이혼은 꽤 예민한 주제잖아?


다만 종교가 거기서 강하게 작용한다는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시지프의 반응도 묘하게 거슬리고.

“하여튼 그런 우울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계속 괜찮다고 말해도 눈에 보이는  안 괜찮아 보인다고요.”


“그건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루나 씨가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앞으로는 잠도 좀 자고 밥도 제때 챙겨 먹어요.”


“네, 알겠습니다!”

하하 호호. 걱정 어린 말에  웃어넘기다 당황했다.

“잠깐만요, 지프 님? 저 깨우려고 오신 거라면서요.
지금 몇 시예요?”

“몇, 시?”

아차. 여기 시계 없는 세상이었지.


“그니까 지금이 점심인지 저녁인지. 그걸 물어본 거예요.”

“아.
저녁때 즈음에 왔으니 지금은 시간이 한참 지났겠네요.
어머! 그럼 루나 씨 얼른 집에 가셔야 하는  아니에요?”

“이만 가볼게요!”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시지프를 뒤로 하고 급하게 밖으로 나오자 주변이 온통 꺼뭇꺼뭇한데.


이미 날은 어두워지다 못해 검은 하늘에는 붉고 푸른 별이 한두 개 떠오르고 있었다.


“정안이 아직 안 자겠지?
오늘이라도 사과하려고 했는데. 내가 미쳤지 미쳤어.”


끼이익.

쇳소리와 함께 천천히 대문이 열리자 문 너머로 정안의 어머니가 씩 웃으면서 맞이했다.

“아, 아주머니.”

원래는 밖에서 대문을 두들기면 항상 정안이가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는데.

항상 보이던 대여섯 살의 귀여운 꼬마는 어디로 가고.

웬 괴상하게 망가진 여자가 눈과 입이 찢어질 듯이 웃고 있다.


게다가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쁜 건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말없이 기분 나쁘게 웃는 표정이 보기 싫었다.


아줌마를 피해 마당을 지나갔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정안의 방을 두들겼다.

하지만 이미 자는 건지 반응이 없었고 문고리를 살짝 돌렸지만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

“정안아….”

“학생, 고마워.”

깜짝 놀라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는 아줌마가 서 있었다.


단발 파마에 얇은 벨트가 달린 베이지색의 롱드레스.

아까는 어두워서 괴상하다고만 생각했지만.


다시보면 옷차림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처럼 꽤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뭘 그렇게 놀래?”

“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가 아줌마의 시선 따라 아래를 보니.


깜짝 놀란 탓에 저도 모르게 몸이 방문에 착 붙어 있었다.


“손버릇도 안 좋은데 겁도 많네. 딱 좀도둑 상이야.”


“뭐라고요?”

“게다가 거짓말로 어린 마음 상처도 주고.
다행히 우리 아들이 일찍이 알아봐서 다행이야.”


“….”


정안이가 거짓말로 상처받은 걸 어떻게 알지?

설마 정안이가 저 아줌마한테  말한  아니겠지.


“엄마가 누군지도 모른다니. 딱한 일이야.”


기억을 잃은 이야기는 정안이밖에 모르는데?


설마. 아닐 거야.

아지트에 가기 전부터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 전부를.

정말 여태 나랑 이야기했던 모든 걸 말했다고? 그것도 저 여자에게?


“하지만 학생 덕분에 드디어 우리 집에도 평화가 찾아왔어.
그건 진심으로 고마워.”

“무슨 말씀이시죠?”

“글쎄.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비록 좀도둑일지라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해서 와봤어.”


아줌마는 씩 웃고는 깔깔거리며 손가락질을 했고 여전히 알  없는 말들만 내뱉었다.


그래.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도, 내가 정안이랑 멀어진 걸 기뻐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겠어.


비록 그 이유가 아주 사소한 ‘병 라벨’에서 시작했대도 말이야.

하지만 그게 ‘평화’가 찾아온 거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정안의 엄마가 터벅터벅 바로 앞까지 걸어와 말했다.

“우리 애는 아무나 못 줘. 어디서 좀도둑이 홀려 보려고 같잖은 짓을.”

“무례하시네요. 말 좀 가려서 하세요. 어른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부끄러워도 어른은 어른이야!”

“뭐예요?”


발끈한 모습이 가소롭다는 듯 아줌마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이 찢어질 만큼 웃었다.

깔깔거리며 웃는 꼴이 마치 난쟁이가 제 모습 생각 안 하고.


평범한 사람 얼굴이 못생겼다는 소리를 하는 꼴이랄까.


“뭐, 꼬맹이가 해볼 수 있는 게 있다 해도 학생은 멍청해서 가지지도 못하겠지만.”

아줌마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밟고 내려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어나서 그런지 어깨랑 허리는 뻐근하고 당장 열고 싶은 문은  닫혀 있고.


숨기고 싶은 사람에겐 계속해서 말을 털어놓게 되고 피하고 싶은 사람은 자꾸만 다가온다.

평소처럼 힘이 없거나 기분이 좋았다면 넘어가도 될 테지만.


잠에서 막 깨어나 허둥지둥 뛰어와 지쳤는데 이성이라는 정신을 붙잡기에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전쟁이다.


그대로 걸어가 싱글벙글 웃으며 계단을 밟고 천천히 내려가는.


그 빌어먹을 뒷모습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화장 떡칠하고 헬렐레 나돌아 다니는 아줌마한테 그런 소리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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