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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화 〉1부 34화 신장 1미터 남짓한 아이가 식칼을 쓰는 법 (34/66)



〈 34화 〉1부 34화 신장 1미터 남짓한 아이가 식칼을 쓰는 법

시지프는 눈물을 닦는 내게 휴지를 쥐여주고 컵에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따라 가지고 왔다.


“목도 많이 갈라졌네. 이거 찬물인데 드시고 기운 차리세요.”

“감사합니다.”


벌컥벌컥 물 한잔을 한 번에 마시고 상에 컵을 내려놓고 시지프에게 말했다.


“지프 님.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저를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면 항상 저 곤란할 때는 지프 님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머. 감사하다니요?
전 루나 씨를 제 가게서 만났던 날부터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니고, 아주 오랜 친구.”

“정말요?”

“그럼요…그리고 동질감이라든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루나 씨랑 있으면 제 마음이 편안해지고, 제 마음속에 있던 비밀도 털어놓게 되더라고요.”

“아. 그럼 그 짝사랑 이야기도 저한테만?”


“당연하죠! 생각해 보세요.
서른두 살의 꽃집 가게 아줌마의 짝사랑 이야기를 누가 위로해주겠어요.
게다가 사랑 이야기도 몇 년  짝사랑에 상대는 이젠  하늘의 별이 된 사람인데.”

시지프는 시선은 이쪽으로 고정된 채 검지만 들어 위를 가리켰다.


“아무한테 이야기하다간 위로를 받기는커녕 사람들의 가십거리로 올라가고 심하면 고인을 욕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런 의미에서 루나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시지프는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오른손을 잡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온 웃는 얼굴에 입가에 선명하게 보이는  보조개가 보였다.


와. 어쩜 이렇게 사람이 착할 수가 있지?

이런 사람을 그동안 괴한으로 몰아가고 무턱대고 피하고 의심하다니.

난 정말 나쁜 애였어.

이제는 정안이가 왜  여자를 만나지 말라 했는지  이해가  가.


이해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납득이 안 가니까 믿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이렇게 다시 보면 두 사람  좋은 사람인데.

정안이고  역시 왜 자꾸 그녀를 피한 건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마음속으로 편견과 의심 때문에 그녀를 의심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시지프는 계속해서 내 칭찬을 해주었다.

“저런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요즘 학생들도 마냥 착하지 않은데 루나 씨는 항상 친절해요.”


“고마워요.
근데 아까 저랑 있으면 얘기하지 않으려던 비밀들도 이야기한다고 하셨잖아요?”


“네. 맞아요.
루나 씨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나 봐요.”


“마음을 끌어내는 능력이라. 그런 거로 따지면 지프 님도 능력자라고요.
왜냐하면, 저도 지프 님이랑 대화하게 되면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막, 말하게 되거든요.”


“와! 정말요? 세상에.
오늘 해가  뜨는 건가요? 이런 말은 저에겐 행복으로 돌아온다고요!”

시지프는 나를 꽉 껴안았다.


몸 전체에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옷에서 나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로 들어왔다.

“저도 행복해요. 지프 님.”


그렇게 대답하고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 껴안고 있었다.

따뜻한 생명체에게서 느껴지는 온도와 은은한 향에 제대로 취한 건지.


아니면 귓가에 들른 그녀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듣기 좋아서인지 다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딱딱한 소파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무색해질 만큼.

그 자리에 앉아 서로를 부둥켜안고, 안기던 순간은 화끈거렸기에.

이것도 또 하나의 흔적으로 남을 것 같다.






“하. 흠.”


시간이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하품이 절로 나온다.


“지프. 지금 오후가 넘어갔나요?”


“아뇨? 하지만 곧 오후로 넘어갈 것 같아요.”

배고픈 상태서 맛있는 고기와 단 간식을 배부르게 먹어서 그런 걸까?

에어컨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소파에 편하게 앉아 편하게 있다 보니 힘이 쭉쭉 빠졌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머릿속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몸은 소파와 일체가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


졸리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나 일어난 지 서너 시간도 안 지났는데.


일어나자마자 배부르게 먹고  편하게 쉬고 있다 보니 집에서 자던 시간은 잊어버리고 피로가 몰려오는 것일까?


졸음이 몰려와 눈은 끔뻑끔뻑 거리며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다.

누가 버터를 입에 통째로 먹인 것처럼 혀가 꼬인다.

말도 제대로 안 나와. 이거 왜 이래?


“루나 씨. 피곤해요?”

옆에 앉아 있던 시지프가 물었다.

“네. 그런  같네요…. 조, 조금 졸려요.
 이러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은데.”


“그 정도예요?”


“네. 빨리 집에 가야겠어요.”


쿵.

무리하게 소파에서 일어나려다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억!”

“루나 씨! 괜찮아요?”

시지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단 예.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는데.

머리가 저릿한 게 아마도 앞에 있던 작은 유리 상에 부딪힌  같다.


안 그래도 혀가 꼬여 말이 안 되는데 아프니까 흐린 발음이 옹알이하는 것처럼 되었다.


“아으. 으. 괘안아요, 전.”

“정말. 목소리에도 힘이 없으시네.
그래도 여기선 자지 말고 제 방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요.”


“으. 그래도 될까요.”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아니. 사실은 질문을 가장한 동의였다.

말 자체는 질문이었지만 몸은 이미 구부정한 자세로 일어나 거실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으니.

조금 졸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 간신히 실눈으로 보니 시지프는 비틀비틀 따라가는 내 오른팔을 잡고 끌 듯이 안방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미안해요. 지프 님.”

“괜찮아요. 자, 여기에요.”


흐린 눈으로 언뜻 보니 벽이나 가구가 온통 진한 남색과 분홍색과 하얀색으로 이곳저곳 칠해져 있었다.


“1층에는 안쪽 방이 있구나. 신기하다….”


“다행히 침대가 공간이 넓어서 루나 씨의  몸에는 불편하지 않을 거예요.
 주무시고. 일어나면 저 불러주세요.”


그때 기억은 흐릿했지만 시지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럴게요. 라고 대답했던 것 같고.


이불을 덮을 새도 없이 침대에 올라 몸이 닿자마자 잠에 빠져 버려서.


 뒤에 시지프가 방을 나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졸리지?
마치. 마치 약을 먹은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으음.”


아. 머리 아파.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떠보니 온 주변이 캄캄하다.


아, 어지러운데 아무것도 안 보여.

벌써 밤이 된 건가?

“아, 머리야!”


왼손으로 주먹을 쥔 채 부딪혔던 이마를 문질렀다.

딱딱한데 누르면 아프고, 볼록하게 나온 걸 보니 부은 것 같다.


“아까 지프 님이 자라는 곳에서 그대로 잠들었나 보네.”

일어나서 이마를 문지르며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깜깜하네. 방에 불이 꺼져 있어서 그런가?”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와 벽을 더듬더듬 만지다 마침내 스위치를 찾아냈다.


달칵. 스위치를 켰는데 침실 전등이  켜진다.


“고장이라도  건가? 지프 님!”

문을 열며 시지프를 불렀는데 복도는 조용하다.

“지프-.”


이름을 다시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복도의 왼쪽 부분에서 노란 조명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

아침에 거실에서 불을 켰을 때는 하얀 색이었는데.

그래서 평범한 백색 엘이디인 줄 알았더니 자는 동안 지프 님이 그새 바꾸셨나?

집에 사람이 올 걸 알면서 뻔히 날 초대했을까?
물론 정확히는 내가 가자고 했지만, 먼저 온 건 지프 님이었고.


집에 가자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OK’라고 했어.


설령 누군가 오는 걸 알았어도 미리 말해주셨겠지!


그 전에, 거실 불이 켜져 있었던가?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알 수는 없겠지만.

거실에 있는  지프 님이 아니라면 저기에 있는 건 누구인 거지?

달깍. 달깍. 달깍. 달깍!


불안함에 문을 조용히 닫고 스위치를 계속해서 눌렀지만, 침실의 불은 켜지지 않았다.


여긴 1층 안쪽 방. 즉, 도망갈 곳도 없다.

문고리를 돌려 다시 조심히 열고 문틈 새로 바깥을 봤지만.


노란 조명이 거실에서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푹.

“음? 이게 무슨 소리야?”

복도 쪽에서 뭔가를 박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강하게 어떤 것을 찌르는 소리 같은….


“…찌르는 소리?”

설마. 지프 님이…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지프 님이 찔리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제발 아니어야 해.


하지만 거실에 있는 다른 제 3자에게 붙잡혀 있는 거라면.

지금 들리는 소리는 지프 님의 몸을.


빨리, 빨리 가서 구해드려야 해!


하지만 섣불리 갔다가 나도 같이 위험해지면 어떡하지?


묵직한 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침실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렸다.

 돼.

정신 차려.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한테도 안 물린다고.


“후.”


숨을 고르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했다.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중에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게 있던가?


윗도리나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보니 주머니칼이 나왔다.


아무래도 소리가  곳은 불이 켜진 거실이겠지.


주머니칼을 들고 있는 오른손을 주먹 쥐고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복도 벽에 딱 붙어 살금살금 거실까지 걸어가 마침내 거실 코앞까지 도착했다.

고개만 빼서 조심히 거실을 보니 백색의 LED 대신 노란 조명이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길고 큰 둥그스름한 회색 물체가 있었고.


 앞에는 어린아이가 뒤통수가 보이게 쭈그려 앉아있었다.

신장만 보면 아주 작아서 서너 살 정도 되는  같은데.


오른손에 칼을 들고 앞에 눕혀진 매트 같은 것을 푹푹 찌르고 있다.


앞에 찌르는 물체는 머리가 아프고 시야가 흐릿해서 잘 안 보였지만.


찌르는 자리에서 붉은색이 안 보여서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는  알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만약 누군가 죽어갔다면 본능적으로 소리부터 질렀을 테지.

하지만 아이가 왜 어떻게 이 집에 있는 건인지는 모르겠고.


애초에 저 큰 물체를 끌고 와서 식칼로 푹푹 찌르고 있는 모습도 기괴해 보인다.

마치 예행연습을 하는 것처럼….

“히히힛!”

푹. 푹.


커다란 회색 물체에 식칼을 꽂다 빼는 소리.


어깨를 들썩이고 낄낄 높고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고 무릎에서 얼굴까지 오한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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