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1부 30화 세대 차이? 아니면 성향 차이?
시원하게 맞는 에어컨의 찬 공기가 맨살이 드러난 팔을 스치고.
큰 선풍기 바람이 팔락팔락 불어 삐져나온 옆머리를 살랑 만지고 지나간다.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치킨이 나왔다.
아침에 먹었던 샌드위치는 허상이었을 거로 생각할 만큼.
또 정신없이 둘이서 우걱우걱 먹었고.
치킨집에서 금방 나와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지프 님 말대로 정말 맛있었어요.”
“그렇죠?
저긴 또 가고 싶게 만들어요!
그렇게 먹고 먹다 보면 제 배는 커지는데.
그럴수록 제 지갑은 홀쭉해지는 거예요.”
“지갑이 홀쭉해질 때까지 먹고 싶게 만드는 맛이었어요.”
“홀쭉해질 때까지요?”
내가 던진 말에 시지프는 꺄르르 웃었다.
“그랬다고 하시니 제가 다 뿌듯하네요.
이제 어디 갈까요?
이쪽은 이제 노래방 아니면 식당뿐인데.”
“피시방은요?”
“컴퓨터에 10년도 더 된 게임만 있죠.”
“인터넷은요?”
“네? 인, 뭐요?”
“아. 아니에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지프의 반응에 씁쓸해진다.
역시 인터넷 같은 네트워크 서비스는 없는 건가?
핸드폰, 네트워크 서비스, 시계.
다 있는데 이런 건 없다.
조금 허접한 곳이라 해도 나름대로 도시라고 불리는 곳인데.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도 없다면.
이 세계의 시대 자체가 아직 과학적으로 발전이 되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럼. 영화나 보러 가실래요?”
“영화요?”
“요즘 영화를 안 봐서 뭐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한 번 가서 볼만한 영화 찾아봐요.”
“저야 좋죠.”
그렇게 해서 가게 된 다음 장소는 영화관이었다.
이 마을의 영화관은 치킨집에서 다시 반대편으로 건너고, 조금 오래 걸어야 보였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커다란 건물이 우뚝 서 있어서 대단히 커 보였지만.
만약 이 마을이 계획대로 도시가 되었다면 다른 건물도 컸을 것이기에.
영화관이 이렇게까지 크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들어가 보니 외눈박이 직원은 안 보이고 음악 소리만 크게 들린다.
“평일인가요? 사람이 적네요.”
“여긴 평일이고 휴일이고 개념이 없어요.
그래서 늘 가면 사람이 없죠.”
“네?
손님이 없으면 영화관이 유지가 안 되지 않나요?”
“영화사가 대기업이라서 아직은 유지가 되고 있죠.”
“아.”
”루나 씨가 오기 이전엔 시장님이 와서 한동안 돈도 꽤 벌었을 거예요.
아. 아마 시장 선거 때였겠네요!
굳이 올 필요가 없는 마을이 저희 마을인데 나름대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이라나, 뭐라나.
그런 명분으로 한 번인가 왔었죠.”
“여기가 몇 년 된 곳인데요?”
“약 3백 년 정도?
그래서 보면. 아파트보다는 다소 낡은 주택들이 대부분이죠.
3백 년 전엔 이 땅이 꽤 유명한 땅이었대요.”
“어째서요?”
“농사도 잘되고 사람도 아주 많았대요.
몇 년 전에 도시 계획을 세우겠다고 싹 갈아엎고 만들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지프 님은 여기 마을에 대해서 되게 자세히 아시네요.”
“귀라는 게 왜 있겠어요.”
“그럼 원래는 다른 모습이었겠네요?”
“그러지 않았을까요?
뭐. 아무튼 지금이 중요한 거죠.
그런 지루한 거에 더 관심 두지 말고.
우리가 볼 영화나 생각해봐요.”
“오늘 지프 님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나니.
로맨스 장르의 영화를 보고 싶어요.”
“오. 마침 두 개 있어요.
‘사랑은 무한대’랑 ‘오! 로망스’
둘 다 로맨스 영화 같은데 오른쪽은 살짝 코믹할 것 같아요.
뭐 볼까요?”
“글쎄요.
아까 오전에 지프 님의 시를 듣고 와서 그런가.
사랑의 무한대가 조금 더 끌리네요.”
“그럼, 그거 보러 가요!”
시지프는 당장 표와 팝콘, 콜라를 결제해서 돌아왔다.
영화를 보려면 위층으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팝콘과 콜라를 받고 움직였다.
건물의 층수는 고작 2층이었지만 건물 자체가 높아, 계단이 아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이런 것도 있으면서 핸드폰은 왜.”
아니지. 생각하지 말자.
‘본 3관’이라고 적혀 있는 문을 열었다.
들어가 보니 앞에는 커다란 브라운관이.
수많은 붉은 좌석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놓여 있었다.
“우리는 F 열 7번 8번 자리에요.”
시지프의 말에 조심스럽게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오며.
자리를 찾아 꾸역꾸역 앉고 팝콘을 몇 개씩 집어 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10분 정도 몇 번의 광고가 지나가고, 광고에 슬슬 지루해질 때쯤 불빛이 일순간에 꺼졌다.
“이제 시작되려나 보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사랑은 무한대’
...
...
...
[아, 안 돼! 영자야. 영자야. 엉엉.]
“흐아앙. 흑. 으. 엉엉.”
사랑의 무한대.
이름만 들어도 말 그대로 사랑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늘어놓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옆에서 시지프는 사랑도 뭣도 아닌 이 애매한 영화를 보면서 울고 있다.
어차피 단둘이 있는 장면에서 운 거니까.
딱히 다른 사람에게 민폐가 되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이렇게 울어버리면 옆에서 지루하게 보던 사람은 마냥 당황하게 된다.
“슬퍼요?”
“죽지, 죽지 마. 흐앙.”
“울지 마세요. 지프 님.”
내가 취해서 선택을 잘못했다.
그래. 아침에 들었던 그 시에 취했던 게 분명하다.
사랑 타령만 하는 시에 취해 ‘로망’보다 ‘사랑’에 끌린 것이다.
아까 코믹로맨스라고 생각했던.
오, 로망스인가 뭔가 하는 그걸 선택해야 했다.
시지프는 지금 여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보면서 울고 있다.
영화에서의 전개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랬다.
영화에는 20대 초반의 남녀가 등장한다.
둘은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고,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지만.
여자가 남자를 친구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남자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포기하지 못하고 친구라는 이유로 옆에 붙어 계속 매달리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여자는 계속해서 남자를 밀어내고 거절했기에 둘은 연인 사이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다 여자가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게 되면서 곧 죽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남자는 매일매일 여자가 입원한 병원에 가서 꽃부터 갖가지 선물을 가져왔고 극진한 간호 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다쳐서 회복하지 못했던 여자는 결국 죽게 된다.
“흐아앙.
루나 씨. 루나 씨! 영자. 영자가!”
“네. 영자가 죽어서 너무 슬프겠어요.”
“우리 영자가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흐아아앙!”
엉엉 우는 시지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며 달래주었다.
감성에 강하다지만 서른두 살에 이런 뻔한 로맨스 영화를 보고 펑펑 울 수가 있다니.
나이로 감성을 나누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이란 생활은 다 해봤다는 사람이.
이런 영화에 눈물샘이 터질 수도 있는 거야?
시지프를 처음 봤을 땐 뭐든 하하 호호하고 넘길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아주 여리다는 것. 이건 이거대로 반전이다.
“흑. 영자야. 영자야!”
“아이고. 지프 님.
자, 뚝. 영화 끝났어요.”
시지프는 품에 꼭 안고 울었다.
영화가 끝나도 그녀의 눈물샘은 생각 보다 그치지 않아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한참 동안 남은 팝콘을 다 집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
...
...
“지프 님. 이젠 괜찮으세요?”
“네.”
“아까 그 이야기가 그렇게 슬펐어요?
결론은 해피엔딩이었잖아요.”
“그럼 뭐해요.
주인공인 예쁜 영자가 죽었어요.
스물셋 밖에 안 된 주인공이 죽었다고요.
하. 또 눈물 나려 그래. 흑.”
시지프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휴지로 삭삭 닦았다.
“인제 그만 그쳐요.”
“이렇게 슬픈 걸 어떻게 참아요!”
시지프가 눈물을 찍어내며 소리쳤다.
눈물이 또 흘러나오는 걸 보니 아까 영화에 감정이 또 올라오는 것 같다.
“남자주인공 이름이 재현이었죠?”
“네.”
“그래요. 지프 님.
그 예쁜 영자는 죽었지만.
일편단심이던 재현이가 그렇게 실컷 슬퍼해 주고 3년 상 다 치러주고.
마지막에 영자랑 똑같은 얼굴에 점 찍고 다른 여자애를 만나잖아요.
그 정도면 된 거죠.”
“재현이느은, 흑.
새 여자 만났으니까. 이젠 꽃길만 남았지만, 흑.
영자는요. 영자는 어떻게 해요?
흑. 우리. 우리 불쌍한 영자.”
아. 내가 이상한 건가.
바로 옆에서 직관하고 다독여주고 했지만.
지금 저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 봐야 영화 아닌가?
현실에서 저런 이야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저건 영화잖아.
허구성이 들어갔다고.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의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걸까?
역시. 아까 그 로망스를 골랐어야 했나.
이건 내가 고른 거지만 진짜 별로였다.
아니. 애초에 마지막에 나온 여자나 여주인공이나 같은 배우가 연기한 거잖아.
보면서 ‘아 그래도 같은 사람이 연기한 거니까 그걸로 만족하자.’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지.
아. 그런 생각은 나만 하는 건가?
시지프는 옆에서 이 영화가 명작이라느니 뭐라 하고 있지만.
나는 이해가 안 간다.
“지프 님. 알겠어요.
영자 죽어서 슬픈 거 먼저 풀고 갈까요?”
“훌쩍. 어디서요?”
어디긴 어디냐.
숲 입구에 가고 싶어도 거긴 너무 멀어서.
근처 편의점에 앉아 라면을 하나씩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자. 지프 님.
우리 지프 님의 영자 생각하면서.
이왕 말하는 김에 첫사랑이었다던 그분 이야기까지 여기서 다 풀고 가요.”
“흑. 고마워요.
킁!”
그렇게 또 2번째로 크게 우는 시지프의 영자 이야기와 첫사랑이 섞인.
흔히 ‘퓨전’이 된 사랑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었다.
...
...
...
“괜찮으세요?”
시지프는 코를 세게 풀었다.
“킁!
네. 인제 괜찮아요.”
그녀의 예쁜 눈은 퉁퉁 부어올랐고 코는 뻘겋게 변했다.
평소에 들렸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금은 조금 갈라진 게 들린다.
“그 영화가 지프 님을 이렇게 울릴 줄은 몰랐네요.”
“네.
근데 저. 인제는 괜찮아요.”
“그래요.
이제 가요.”
“얼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면. 안 돼요?”
“얼굴 좀 가라앉힐 때까지 앉아 있다가 가면 금방 저녁이 될걸요?
저야 상관없지만. 지프 님이 저랑 많이 못 노실 텐데.”
“아. 그러네요.”
시지프는 사용했던 휴지를 비닐봉지에 따로 담고.
마스크를 꺼내 쓴 뒤 자리에서 툭툭 일어나 가자고 했다.
“루나 씨. 이번에는 어디 갈래요?”
그녀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약국이요.”
그렇게 해서 이번에 가게 된 곳은 약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