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1부 29화 빛과 치킨집의 상관관계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
“루나 씨가 그렇게 말해줘도 어쩔 수 없는걸요.”
집도 꽤 큰 집에서 살고.
그런 높은 담을 만들 정도면 어느 정도 사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풀이 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부모님이 좀 사는 편인가?
그녀의 태도가 조금 이해가 가진 않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마저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여기 사람들은 왜 꽃을 사러 안 올까요?
기념일부터 관상용까지.
살 일은 되게 많을 것 같은데.”
“제 말이요.
이런 재미없는 도시에 꽃 한 송이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뭐. 키우기 귀찮아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귀찮아서 그런 걸까요.”
“뭐.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바빠서 안 사는 거겠죠.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이 나가서 밤에 들어오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선인장이나 다육식물이라면 모를까.
꽃 한 송이 사서 집에 두고 키울 여유가 안 될 거예요.”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간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다른 생명을 관리하라니.
작은 식물이래도 힘들 것이다.
“하긴. 꽃은 관리를 안 해주면 시들어버리니까요.”
“맞아요.
사실 이해는 가는데.
꽃을 파는 제 눈엔 정말 슬픈 현실이에요.”
“장사하는 사람 눈엔 자기 상품이 안 팔리면 속상하죠.”
시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잖아요.
다들 하나 같이 손질하고 관리해서 ‘저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외치고 있는데.
그런데 자기를 데려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아.”
“특히 꽃은요.
화분처럼 심어서 파는 애도 있지만.
뿌리를 잘라서 꽃다발로 만들어서 파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애들은 아침에 와서 안 팔리면 금방 시들고 버려지는 거예요.”
시지프는 흥분해서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관리를 해줘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서.
아주 싱싱하지 않으면 손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렇겠죠.
조금이라도 시들어있는 식물은 상품 가치가 없으니까.
오히려 그런 식물들을 내놓으면 가게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고요.”
“전 그게 너무 슬퍼요.
이렇게 예쁜 애들이 자기 데려갈 임자 찾다가 서서히 시들어 죽어 가는데.
꽃잎이고 이파리고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예요.
아침 일찍 데려온 순간부터 꽃잎 하나하나 만져주던 순간이 생각나요.”
“지프 님은 감성적인 분이시네요.”
“루나 씨한테 이런 이야기 처음 하는 건데.
좀 그런가요?”
“좀이 아니라. 조금 지나치게?”
“전 너무 이성적이고 차가운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게다가 여긴 가뜩이나 건조하고 답답해서 그러고 싶지 않은걸요.
지나치면 어때요.
인생은 늘 적당 하기만 하면 재미없는데?”
“지프 님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게 목표인 건가요?”
“정확히는 할 수 있다면 제가 좋아하는 것들만 하면서 살고 싶죠.
가끔 여기 있다 보면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아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데.
그걸 한다고 보람차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정말 숨만 붙으면 된다는 식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원래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시지프 님의 고향처럼.”
그 말엔 동의하지만.
3년이나 이곳에서 살았다는 사람이 이렇게 자기가 사는 마을의 욕을 하기도 하나?
아니면 지금 여기서 사는 걸 후회하고 있다는 건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한창 돌아다닐 때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곳이 많았어요.
하기 싫은 일도 즐겁게 하는 사람들도 만나봤고요.”
슬슬 듣기가 싫어진다.
“그래도 여기 온 걸 후회하진 않으시죠?”
“그럼요.
기왕 여기서 살자고 마음먹었으니 마냥 짜증만 부릴 수는 없어서.
답답할 땐 가끔 숲 입구에 가서 좀 쉬다 오고 그래요.”
“아. 그 첫사랑?”
“그렇죠.”
대화를 마치고 시지프는 맞은편 인도로 넘어가자고 말했고.
곧 신호가 바뀌어 횡단보도를 따라 건넜다.
넘어오기 전엔 단순히 식당이 여러 개 있고 가운데에 pc방이 끼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식당도 정말 여러 종류로 있다.
시지프의 말로는 돈가스, 추어탕, 여러 분식집만 있는 게 아니라.
피자나 슬러시만 파는 가게도 있다고 한다.
“먹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이죠.
집에서 해 먹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외식하는 집도 많아요.”
“낮에는 전부 일하러 나가지 않아요?
다른 도시에서 먹어도 될 텐데.”
“그건요.
저쪽 보면 큰 건물이 양쪽에 하나씩.
총 두 개 보이시죠?”
시지프는 뒤로 돌아 맞은편 건물 너머에 보이는 두 큰 건물을 가리켰다.
“저번에 파출소 갔을 때 도로만 보였잖아요.
루나 씨는 별로 신경 안 쓰셨겠지만.
맞은편 건물 뒤에 있는 저 건물들이 그 파출소 근처에 있어요.”
“아. 그래요?
전 전혀 몰랐는데.
아마 전부 건물색이 회색이니까.
이곳이든 저곳이든 다 비슷하게 보여서 파출소만 있다고 착각했나 봐요.”
“네. 그럴 것 같았어요.
저 두 건물이 조금 큰 회사에요.
본사가 아니긴 해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있죠.
여기 근처에 식당이 많은 이유는 저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에요.”
“루나 씨! 저희 밥 어디서 먹을까요?”
시지프.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전 모릅니다.
영어도 아닌 단어랑 복잡한 한자가 뒤죽박죽 섞여 있거든요.
간간이 일본어가 적혀 있어서 그런 건지.
간판에 적힌 게 문자가 아니라 각각 다양하고 난잡하게 어질러진 추상화로 보인다.
밥 한번 먹으러 가려면 언어 공부부터 해야겠다는 걸?
“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래요?
그러면 둘 중의 하나만 골라 봐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두 곳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피자집과 치킨집이었다.
“피자와 치킨이라니.
정말 어려운 문제네요.”
“왜 어려워요?
치킨집 가면 되지.”
“네?”
“치킨집 가고 싶어요!”
“그럼 왜 물어본.”
“모르겠으면 치킨집 가는 거예요.
자. 가요!”
시지프는 당황해하는 나를 뒤로하고 천연덕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 생뚱맞은 행동은 뭘 의미하는 거지?
“뭐지.
방금 나한테 물어본 거 아니었나?
내가 대답을 했던가?”
물어봐 놓고 자기 혼자 정해서 들어가는 건 뭐야.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딱 이런 거야? 어이없네.
“루나 씨?”
“네?”
시지프는 안에서 문을 살짝 열어 얼굴만 빼꼼 내민 채 불렀다.
“거기서 뭐 해요?
어서 들어와요!”
“아. 네.”
그냥 물어봤다는 기억 자체를 잃어버렸나.
이해할만하고 가까이 다가가려고만 하면 멀어지게 되는 느낌이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
딸랑-.
정오가 지난 치킨집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시지프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새 자리를 찾아 앉아 있었다.
“사람도 많은데 용케 자리를 찾으셨네요?”
“운이 좋았어요.
마침 딱 두 자리 빈 테이블이 하나 남아있다고 해서.
바로 제가 앉았어요!”
“덕분에 점심도 금방 먹을 수 있겠어요.”
“매운 거 잘 드세요?”
“아니요. 잘 못 먹어요.
양념치킨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간장치킨 하나 시킬게요.”
시지프는 직원을 불러 주문을 하고, 치킨이 나오는 동안 수다를 떨었다.
“루나 씨는 학교 여기서 얼마만큼 떨어져 있어요?”
“좀 멀어요.”
“저런. 많이 힘들겠다.”
“덕분에 주변이 다 모르는 분들 이긴 하지만.
나름 지낼 만해요.”
실상은 어디 갔다가 객사할까 봐 하루하루 겁먹은 채 움직이고 있지만.
일반 고등학생으로 알고 있는 시지프에게 그걸 내비칠 수는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잠시 멈췄고.
창밖에 보이는 거리를 보다가,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근데 점심이래도 식당 안에 들어가는 경우가 아니면 조용하네요.
아까 밖에 있을 때는 사람이 많이 안 보였는데.”
“아마 다들 바빠서 여유를 못 즐기는 거 아닐까요?
밥도 후다닥 먹고 들어가고.
정신없이 일하고 나면 저녁이 되어서야 ‘저녁이구나!’
하고 집에 들어가는 거죠.”
그러고 보니 우리가 들어 온 뒤로 외눈박이들이 가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게요.
하지만 저 같은 학생들도 있잖아요.”
“요즘 애들은 웬만하면 학원 두세 개는 기본적으로 다니잖아요.
일찍 끝나고 저녁이 되어서 지하철 타고 돌아오면 벌써 밤이고.
놀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아. 듣고 보니 그렇게 되네요?”
“네.
그러고 보면 루나 씨 부모님이 현명하셨네요.
학원을 안 보내니까 방학에는 이렇게 여유 있게 점심으로 치킨을 먹을 수도 있잖아요.”
“시간은 그렇다 쳐도 치킨은 시지프 님이 사주시는 건데요. 뭘.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루나 씨랑 먹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꼬마 아이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그러게요.”
“뭐.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아쉬워요.
루나 씨가 와준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감지덕지죠.
루나 씨. 한낮에 조용한 거리 어때요. 완전 보기 좋죠?”
“보기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용해서 아까보다 조금 편하게 밥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좋은 거죠.”
“그래요?”
“그럼요. 좋은 게 좋은 거예요.”
“그럼 좋은 거네요.”
그렇게 대답하고 턱을 괸 채마저 바깥을 감상했다.
태양이 하얗게 빛난다.
문득. 어느 과학자가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대한민국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태양에서 내뿜어지는 초당 30킬로미터인 수많은 강한 빛줄기 중.
하나가 나를 만나러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그게 하나가 아니고 여러 줄기가 모여서 거대한 광선이 되어 나한테 날아온다면?
과학은 잘 몰라서 답은 알아내고 싶지 않지만.
치킨집의 유리를 통과하고 들어와 눈에 닿는 그 순간까지 걸리는 시간이 몇 초든 몇 분이든.
그 빛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나에게 날아올지.
그게 뭐든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이 여자의 속내와 생각을 더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그냥 이 순간이 편안하면 그만인 거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들어 온 시원한 치킨집에서 다리를 꼰 채 앉아 속 편한 생각을 하며 턱을 괴고.
요정이 답답해서 제 발로 돌아올 때까지는 이러고 있고 싶다.
비록 앞에 있는 저 감성적인 사람이 한밤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래도.
집에 있는 귀여운 아이가 사이코패스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