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1부 28화 늘 열여덟 살이던 그 사람
“우와. 지프 님의 첫사랑이라니.”
“그게 그건가요? 흐흥.”
신기해하는 내 반응이 웃겼던 걸까?
시지프는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호호 웃었다.
“놀라워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한 번쯤 진득한 사랑은 해보잖아요?”
“그런가요.”
“그런가요. 라니.
루나 씨는 첫사랑이라든지. 짝사랑이라든지.
그런 거 상관없이 기억에 남는 사람 없어요?
아니다.
루나 씨 나이면 한창 사랑에 눈을 뜰 나이 아닌가?”
“사랑이라니요.
아직 그런 감정을 품기엔 전 너무 어린 나이에요.”
“어머. 이것도 의외네요.
지금은 이성만 보면 꺄르르 웃음 나올 나이라고.
전 그렇게 생각했는데?”
“풋. 아니에요!”
진득한 사랑은 무슨.
스쳐 가는 설렘은커녕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사랑을 품는다. 라.”
시지프는 깔깔 웃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처음 제게 와서 말을 걸었던 장소가 딱 이런 곳이었죠.
맞아.
마침 바람도 딱 이렇게 시원했고.”
그 사람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벤치에 앉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지프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고.
바람이 삐져나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건드렸다.
“참 그때는 좋았죠.
그 사람은 참 멋있었어요.
마치 백마 탄.”
“백마 탄 왕자님!”
“네. 맞아요.
백마 탄 왕자님 같았어요.”
시지프는 피식 웃었다.
대답한 뒤에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 웃는다.
“지프 님은 그분이랑 얼만큼 친했었어요? 많이 친했어요?”
“네.
제가 좋아하는 건 꼭 붙잡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어떻게든 친해지겠다고 그렇게 꼭 붙어 다녔죠.
결국 고백은 못 했지만.”
“아.”
“그래도 그 사람이랑 있을 때는 늘 행복했어요.
그래서 기억나는 순간은 많았었지만.
특히 그 첫날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그렇게 말하는 시지프의 눈망울은 촉촉해졌다.
“괜찮아요?”
“네.
그냥. 조금 슬퍼서요.
이것도 이젠 한낱 과거에 불과한 거죠.
그 사람. 어릴 때 죽었거든요.”
“예?
주, 죽었다고요?”
“네.
지금 제가 서른둘이고 18살에 그 사람이 죽었으니까.
벌써 14년이나 지난 일이네요.”
시지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옆에 듣는 나는 마음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첫사랑.
처음으로 사랑했던 짝사랑. 사랑.
처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이 사랑을 가르쳐 주다가 죽었다.
새로운 감정이 마음속에 들어갔는데.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사람이, 그 영혼이.
사랑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때 느낄 모든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괴로운 시간을 보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슬프셨을 것 같아요.”
“그럼요. 며칠 동안은 밥을 굶었어요.
게다가 굉장히 밝고 착했던 사람이었는데.
정신병에 걸려서 죽었었다니까.
도저히 밥이 안 넘어가더라고요.”
“정신병이요?”
“우울증이었죠.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학교 선생님께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세상에.
심지어 정신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일반적인 사고사보다 더 한 충격을 겪었을 텐데.
“힘들었을 거예요.
그 차가운 도시에서 버텨야 했으니까.”
시지프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눈 아래를 살살 찍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말대로 14년이나 지난 일이니까요.
사실 잊어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시간이죠.”
“그런데도 잊지 않고 기억하셔서 여기에서 사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짝사랑을 오래 했었으니까요. 11년이면.
이젠 제 마음속에만 있는 하나의 추억이지만.”
“11년이요?
그렇다는 건 일곱 살부터 좋아하셨다는 건데.
학창 시절 내내 좋아하셨으니 더 잊기 힘들었겠어요.”
“네.
그래서 그런지 그 뒤에 다른 사람은 눈에 안 보이더라고요.”
그 말이 쓸쓸하게 들리고.
마음속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던 사실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서만 가둔 채.
그저 심장 속에서 간직한 채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
마음을 표현할 미래조차 떠올릴 수 없고.
그조차 언젠가는 다른 사랑에 의해 사라진다 해도.
잘려 나간 나무의 밑동처럼 한편에는 그 흔적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는 것.
“이십 대에는 이것저것 왔다 갔다 직업을 여러 번 바꾸다가.
서른둘에 뭐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마침 이 도시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며칠 머물면서 처음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재미없는 도시가 왜 1위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갔죠.”
“그러다 이 장소를 발견한 거예요?”
“네. 마지막 날에 떠날 준비를 끝내고 시내 바깥을 돌아다니는데.
우연히 이곳에 왔다가 그 애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런데 이전처럼 마냥 슬프지는 않았고.
이 아이가 나를 위해 공간을 만들었구나. 여기서 나를 기다렸구나.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든 것 있죠?”
시지프는 말하다가 큭큭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죠.
어쨌든 여기에 살면서 종종 여기에 오면 그 애가 생각나요.
루나 씨한테 이야기하고 보니 역시 그때는 저에겐 행복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시지프의 짙은 파란 눈이 어쩐지 더 어두워 보이고.
살짝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쓸쓸해 보인다.
그리운 사람이, 그리운 사랑으로 들린다.
많이 사랑하셨구나.
“그립진 않아요?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해도 첫사랑이잖아요.”
“많이 그립죠. 보고 싶고.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 사람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데.
이젠 그리운 사람이니까. 기억은 기억으로 남아야죠.”
그녀의 대답이 분위기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쓸쓸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되돌릴 수 없으니.
“만약. 되돌릴 수 있다면요?”
“음.”
멍청한 질문이지만 그녀의 대답이 듣고 싶다.
“그렇다면 되돌리기 위해 무슨 짓이건 하겠죠.
왜냐하면 전 그런 성격을 타고났고.
그 사람을 여전히 보고 싶거든요.”
“역시 그런가요?”
“그렇죠.”
사랑 이전에 같이 인생을 함께하고 싶던 사람이었으니까.
그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한참 동안 하늘만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고.
서로 하늘만 바라보다, 갑자기 시지프가 시를 낭송하고 싶다고 말했다.
“뜬금없이 시를요?”
“별 건 아니고.
그 친구가 자주 제 앞에서 불러주었거든요.
이 분위기에서 부르고 싶어요.”
“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흥미가 생기네요.
어떤 내용인데요?
한번 읊어주세요!”
“큼큼!”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옛사랑의 시를 읊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사랑하라.
언제 어디서나 하얗게 핀 백합같이.
울지마라.
굽어도 늘 곧게 보이는 할미꽃같이.
살아가라.
시들어도 늘 화려한 붉은 장미같이.
꽃 따라 걸어가라.’
“사랑하라. 울지마라. 살아가라.
시가 참 좋네요.”
“그렇죠?
그 친구가 지은 시예요.
이때부터 좋아했나 봐요.
제가 꽃을 좋아한 거요.
지금은 굳이 그 친구를 안 떠올려도 자주 생각이 나요.”
“그것도 참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꽃에 비유한 시라.
과연 시지프가 좋아할 만한 시다.
첫사랑이란 그런 것일까?
달콤한 꿀처럼.
생각보다 매우 떫고 야리다는 걸 알면서도 먹게 되는 것.
그렇게 조금만. 조금만 더.
속으로 외치면서 끊임없이 먹다 보면.
어느 순간 혀에는 달콤함보단 쌉쌀하고 떫은맛만 남는다.
“자. 한참 쉬었으니까 인제 그만 가볼까요?”
“그래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시지프와 자리에서 일어나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보니 거리는 한산했다.
오후가 되어 가는 하늘은 쨍쨍한 해가 한가운데서 땅을 달군다.
이윽고 사거리에 도착했다.
“루나 씨는 시내에 어디 어디 가보셨어요?”
“음. 마트, 병원, 꽃집이요.”
“정말 기본적인 곳들만 가셨네요.
이제껏 문화생활 한 번을 안 하셨구나!”
시지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냥. 시간이 좀처럼 잘 안 나서요.”
“예?
그래 봐야 나이도 어리시고.
지금은 방학이라 시간 많을 때 아닌가요?
아.
혹시 학원 다니고 있어요?”
“아니요. 안 다녀요.”
“그런 거라면 제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네요.
학원 다니면서 피곤한 사람을 부른 꼴이 되니까.
괜히 제가 미안해지거든요.”
시지프는 씩 웃었다.
“아무튼 잘 됐다.
오늘 저랑 거기 다 가 봐요.
어디부터 가보고 싶으세요?”
“지프 님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알려주세요.
파출소는 어제 갔으니까 다른 곳으로요.”
“그럼, 왼쪽부터 둘러보러 가요!
점심도 지난 것 같으니까 밥도 먹고요.”
시지프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그런데, 뭔가 바뀐 것 같다.
“어? 지프 님.
신호등이.”
“음? 신호등이 왜요?”
“그게. 어제는 깜빡깜빡 거렸는데.
오늘은 또 잘 켜져 있어서요.”
“아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다음에 오면 고쳐져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런데 정말 금방 고쳐주고 갔네요!”
“여기저기 뒤죽박죽 섞여 있고 허술한 면은 있어도.
이런 건 금방금방 고쳐주더라고요.”
“발전은 없어도 퇴보는 안 되겠다.
뭐. 이런 느낌이네요.”
“네, 맞아요.
이 마을에 얼마 안되는 장점 중 하나죠.”
“그렇군요.
마침 신호도 바뀌었으니까 건너가요.”
길을 건너 맞은편에 있던 학교를 지나 천천히 걸었다.
사거리에서 왼쪽을 돌자, 돈가스 식당 간판이 보인다.
식당이 정말 많이 보이고 중간에 노래방도 많이 있다.
조금 멀리 영화관으로 보이는 큰 건물이 보였다.
“저번에 말씀드렸죠?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에는 보시다시피 노래방이랑 영화관이 있어요.
식당은 맞은편에 많이 있고요.”
“노래방 옆에 있는 돈가스 집은요?”
“아. 중간중간에 식당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맞은편에 있는 분식집을 추천해요.”
“아. 맛이 저쪽이 나아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죠.
이쪽 식당은 노래방이나 영화관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경쟁하는 맞은편에 비하면 이쪽이 자리가 더 좋으니까요.”
“건너편에는 피시방이 있네요.”
“마을이 작아서 하나밖에 없지만요.
덕분에 독점장사를 하고 있죠.
저쪽 사장은 돈 좀 벌고 있을 거예요.
학생들이 많이 가니까요.”
“에. 지프 님도 독점장사하는 거 아니에요?
꽃집도 이 마을에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럼 뭐 하겠어요. 사람들이 오지를 않는데.”
시지프는 힘없는 목소리로 씁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