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1부 27화 새 옷은 수레를 타고 (27/66)



〈 27화 〉1부 27화 새 옷은 수레를 타고

그게 단지 이방인이어서.

며칠 머문다는 게 일주일을 넘어가 눌러앉듯이 살아서 같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화가 터진 이유는 ‘라벨지’ 때문이었다.


 라벨지가 얼마나 대단한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

지금은 정안을 돌봐주고 있으니 망정이지 언젠간 여기서 나가야 할 날이  것이다.


그럼 그땐 기본적인 주거는 어디서 찾지?


일해서 돈을 벌겠다 한들 거리에 나가서 바로 할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애초에 갑자기  떨어진 이방인인 나를 받아줄 곳이 있나?


그때는 정말 옆집에 시지프한테 부탁해서 신세를 져야 할까?


아니. 그녀 역시 받아주지 않을 거다.


마냥 피하려고 생각했던 상대에게 가서 부탁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친해지고 싶든 위선이든 그녀만의 선이 있을 것이다.


  안에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동거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고.


“아, 아니지.
쫓겨난 뒤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  어쩔  없는 거였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수레에서 쇼핑백을 밀어내려 침대 옆에 두고 손수레를 정리하고.


쇼핑백에서 옷이 나오지 않게 꽉 묶어 둔 가방끈을 풀어 비슷한 티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색깔이나 디자인은 매우 흡사하다.


아마 박음질이나 옷의 사소한 차이점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다른 옷이라는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옷도 단순히 예쁜 것도 있는데 편한 옷도 많이 주셨구나.
아. 이건.”

파란색의 작은 쇼핑백에는 상표도 뜯지 않은 속옷 상자들이 들어있었다.


크기는 제각각이었지만 대부분 몸에는 맞는 것들이었다.

어디 속옷뿐인가?


양말도 하얀색부터 갖가지의 색깔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이미 줄 것처럼 준비해둔 것 같네.”

매일 같은 옷만 입는 걸 보고 속옷도 없을 거로 생각해서 미리 사둔 걸까?


속옷까지 준비했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긴 하지만.

엄연히 생판 남인데.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여태 생각했던 것들은 전부 우연과 상황이 만들어낸 편견일지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내일 딱 한 번만 더 만나볼까.

그때, 옆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안이 일어났나 보다.”

...
...
...

정안이 일어나고 원래 하려던 ‘종이 인형 만들기’를 하고.

정신없이 정리하고 저녁을 먹고.


피로에 잠이 들고 나니 순식간에 다음 날이 되었다.


자기 전에 잠깐 정안에게 어떤 핑계를 대고 나갔다가 올까 고민했지만.


그 생각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아주머니가 정안을 데리고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2층에서 내려오면서 잠깐 봤는데.

끌려가는 정안의 뒷모습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중요한 자리에라도 가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알 바가 아니지.


오히려 저렇게 둘이 나가면 나야 좋지.

오늘은 다른 옷을 입어도 괜찮을지도.

간단하게 청소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화장실로  아침 샤워와 양치질을 끝낸 다음.

거울을 보며 여기저기 뻗친 머리를 두 손으로 억지로 눌러 잠재우고.

방에 들어가 하얀 쇼핑백에서 입을 옷을 골랐다.

한쪽에 정돈된 원피스가 눈에 보여서 입어보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예쁘고 팔랑거리는 옷보다는 편한 옷차림이 좋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청바지와 팔과 통이 넓어 보이는 얇은 반소매 셔츠를 꺼냈다.

입어 보니 살짝 여유 있는 게 움직이기도 편하고 아주 시원하다.

“확실히 지프 님이 입었다면 조금 컸겠다.”


침대에 던져놓은, 땀에 젖은 빨간 셔츠와 다른 청반바지가 보인다.


“아. 진짜 너무 좋다.”

지금 입은 옷이  것에 가까운 상태라 좋은 것도 있지만.


열흘 만에 다른 옷을 입었으니 그냥 기분이 좋은 정도가 아니다.


침대 머리 위에 그어 둔 열 개의 작대기가 보인다.

기분도 좋고. 흥에 겨워 춤이 절로 쳐진다.

“얼쑤! 좋다! 좋아.
아주 좋. 잠깐만.”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준비해놓고 언제 만나는 거지?”


지금 나가서 마냥 기다려야 하나?

시지프는 과일 가게에서 보자고 했지 딱히 언제 만나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설마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지금 몇 시지?


이거야 원. 시계가 없으니  수가 있나!

‘지금!’

“어? 지금?”


머릿속에서 갑자기 지금, 이라고 외쳤다.


“누구지?
누가 방금. 지금이라고 했는데.
잘못 들은 건가?
웬 여자 목소리가.”

‘지금 가!’


“꺅!”

지금 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머릿속에서 울렸다.


소리를 지르면서 주저앉았는데 몸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


“뭐, 뭐야.
왜, 왜 환청이 들려.”

‘가!’


이번에는 확실해.

“뭐야. 계속 들리잖아.
야. 야!
너, 너 대체 너 누구야. 누구냐고!”

‘가! 가! 가! 가!’

“꺅!
아!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는데 무슨 힘이 생긴 걸까.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던 두 발이 미끄러지듯 거짓말처럼 움직여졌고.

2층에서부터 대문을 지나, 과일 가게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가고 있어.
제발 그만 말해!”

도대체 뭐지?

 목소리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야?

왜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건데!

의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가’라고 외치다.


과일 가게 앞에 다다르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몸은 가게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헉. 헉!
이제 안 들리네.”

“어머. 루나 씨?”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숨을 고르는데 멀리서 시지프가 걸어온다.


“미리 와서 기다리신 거예요?”

“시지프 님?”

“딱 맞춰서 오셨네요?
 오실 것 같더니 와주셔서 정말 기뻐요!”


“아, 네. 저도요.”


다행인 건지. 이제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땀을 엄청나게 흘리셨는데.
뛰어오신 거예요?”

숨을 헐떡이며 쭈그려 앉아 몸을 숙인 모습을  시지프는 많이 걱정하는 것 같다.

“지각할 것 같아서요.”


후. 숨을 크게 내쉬고 쭈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아. 근데 지프 님. 오늘 옷이?
밀짚모자 쓰고 오셨네요.”


시지프는 빨간 체크무늬 셔츠 위에 남색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때요.  어울리죠?”

“네.
머리를 양 갈래로 땋기만 하면 농부의 느낌도 날 것 같지만.
그냥 아래로 묶기만 하셔서 아쉽네요.”

내 장난에 웃음보가 터진 시지프는 심술궂다며 주먹으로 팔을 툭 때렸다.


“헐떡거릴 만큼 그렇게 뛰어오셔 놓고.
저에게 장난하실 기력이 남아 있으시다니.
배고프실 줄 알았는데?”

“네. 아주 많이요.”

“제가 또 누굽니까.
이렇게 맛있는  잔뜩 챙겨왔어요.”

시지프는 팔에 걸치고 온 큰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반투명한 반찬통을 보여주었다.


통 안에는 샌드위치가 들어 있는 게  보인다.


“역시 시지프 님!”

“루나 씨도 참. 부끄럽게 띄워주시기는.
그런데 이걸 어디서 먹죠?”

“제가 먹기 좋을 만한 곳을 알아요.”


우리는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솔직히 말해서.
루나 씨가 오늘   거라 생각했어요.
애는 두고 와도 되는 거예요?”

“오늘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근데 시간도 이렇게 딱딱 맞춰서 오신  정말 의외였어요!
여기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요.
시간을 재주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고, 살아가죠.”

“그냥 달리다 보니 우연히 맞춰서 온 거죠. 뭐.”

“아무튼  이렇게 만나니 좋아요.”

“아. 저기에요. 지프 님.
도착했어요.”


숲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하니 맑은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뒷머리가 두 귀를 스친다.

“여기 저 와봤어요.  입구 맞죠?”

“네, 맞아요!”


“못 보던 새에 벤치도 생겼네요.
여기 앉아서 먹어요.”

시지프는 한쪽에 가방을 툭 내려놓고 뒤적뒤적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가방에서 샌드위치 서너 개가 들어간 통을 두 개 꺼냈는데.


하나는 베이컨이랑 감자가, 다른 하나는 계란과 샐러드가 들어갔다.

베이컨을 먹을까, 감자를 먹을까.


그래. 베이컨이다.

뚜껑을 열고 샌드위치를 두 손으로 들어   베어 물었다.


먹자마자 탄성을 지르는 건 기본인  시지프의 음식이다.

먹고 삼키고 나면 또 입에 넣기를 반복하고. 그러다 보면 금세 사라졌다.

“더 드세요.”

그 말에 사양하지 않고 한참을 먹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시지프도 옆에서 우걱우걱 먹는 소리가 났고, 곧  먹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와. 진짜 맛있어요.
아까 먹느라 정신없었지만. 잘 먹었습니다.”

“저도요.
루나 씨가 정신없이 먹긴 했지만.
저도 열심히 먹어서 딱 반씩 먹었어요!”


“그래요?”


그 말이 뭐가 그리 웃겼는지 사춘기 걸린 소녀처럼 시지프랑 한참 동안 깔깔 웃었다.

웃다가 지쳐서 의자에 팔을 걸치고 등을 대었다.


몸이 뒤로 젖히자 자동으로 하늘을 보게 된다.


하늘에는 몽실몽실한 하얀 구름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아. 진짜 날씨 좋네요.”


“그러게요.
마을 구경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놀다 갈까 봐요.”

짹짹.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참새 소리가 지금은 기분 좋은 노랫소리로 들린다.


이상한 환청도 안 들리고.


맛있는 거로 배를 채우고 속 편하게 하늘을 보는 이 순간이 참 편안하다.

“여긴 나무는 많은데  밖이라 벌레가 적어서 쉬기 좋은 것 같아요.
지프 님은 여기 자주 오세요?”


“네. 자주 오기만 하는 정도가 아니죠.
저한테는 꽤 뜻깊은 장소에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이 장소 때문이거든요.”

“그래요?
이유가 뭐예요?”


시지프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 고향이 생각나는 장소거든요.
나무도 많고, 꽃도 많은 곳이었는데.
그만큼 건물도 많아서  차갑다고 생각했던 곳이에요.”

“지프 님은 도시 출신이었구나.”


“네.
그런데 도시는 어딜 가나 똑같나 봐요.
고향에는 예쁜 꽃이나 나무가 그렇게 많았는데.
묘하게 차가운 곳이라서 싫어했던  기억나요.”

“그러면 여기도 싫어하는 장소 아니에요?”

“정확히는  장소에서 봤던 사람이 좋았죠.”


“아아!
설마 지프 님의 첫사랑과 만난 장소.
막. 그런 곳인가요?”


“뭐. 정말 오래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비슷한 거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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