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1부 21화 레몬껍질 수프
“아. 그러셨구나.
여기 나쁘진 않죠.”
“그런데 루나 씨가 같은 동네에서 지낼 거란 생각은 들었는데 그게 바로 옆집일 줄은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집이랑 미리미리 이웃사촌 할 걸 그랬어요.
어제라도 만났을 때 같이 이야기했으면 알았을 텐데!”
“아니에요.
저도 금방 머물다 가는 거라.”
하하. 어색하게 웃어버렸지만, 마음은 패닉 그 자체다.
머릿속은 빠르게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왜 이 타이밍에? 너무 뻔할 뻔 자잖아.
그저께 저녁에 괴한이 문을 두들기고 무섭게 하더니.
어제는 갑자기 길거리에서 마주치더니 오늘은 갑자기 이웃사촌이라고 밝힌다고?
물론 1년 이웃사촌이면서 한 번도 안 만날 수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건 너무 부자연스럽잖아!
무슨 방귀 냄새도 아니고. 냄새가 나도 너무 강하게 난다고!
분명 다 알고 온 걸 거야!
꽃집에서 함정도 설치하고 그저께 집 앞에 찾아온 괴한도 저 여자일 거라고.
아냐. 근데 자기 가게에 누가 그런 짓을 해?
정말 머리에 문제 있고 멍청한 게 아니라면.
근데 또 생각해보면 진짜 멍청한 거였을 수도?
아니지. 사실 두 가지 일을 각각 다른 사람이 벌인 걸 수도 있잖아?
아니면 함정은 사실 내가 정말 잠들면서 겪은 건데 착각한 걸 수도 있고.
하지만 너무 선명했단 말이야.
그건 꿈이라 하기엔 둥둥 떠다니는 그 싸한 느낌까지 모든 게 생생하고 느껴졌다고!
가만 보면 눈만 두 개고 지구인 아닌 거 아니야?
외눈박이의 돌연변이라던가!
아니지. 막말로 저 사람이 다 했다고 해도 나한테 그러고 싶었던 이유가 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사람 건들고 괴롭히고 무섭게 하는 게 취미라던가?
아니. 그런 끔찍한 사람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그럼 아까 본 게 맞았나 보다.”
“에, 네. 네?”
시지프의 말에 깜짝 놀라고 심장이 벌렁거린다.
“아.
실은 아까 잠깐 일 때문에 꽃집에 가다가 마트에 막 들어가는 루나 씨랑 이 꼬마아이를 봤거든요.
언뜻 보여서 아닌가 싶었는데.
장바구니 들고 있는 거 보면 맞았네요!”
“아아! 그러셨구나. 아하하.
왜 전 못 봤는지. 봤으면 인사드렸을 텐데요.”
“인사도 여러 번 했는데. 못 보셨구나.”
그녀가 호호 웃으며 말하자,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까 너무 시끄러워서 못 들었나 봐요.
참, 그 오른손에 들고 있는 꽃은?”
“아, 이거요?”
시지프는 즐거운 듯 씩 웃으며 꽃다발 안을 보여주었다.
짙은 파란 수국이 여러 송이가 들어가 있었다.
“수국이네요?”
“네. 아주 예쁜 파란 수국이에요. 예쁘죠?”
“아, 네.
하얀 수국이나 다른 색 없이 파란 수국만 들어 있는 꽃다발은 처음 보지만요.”
“오는 길에 모르는 사람한테 선물로 받았어요.
아이 예쁘다.”
아. 남자친구가 아니었구나.
근데 저렇게 비싼 꽃을 모르는 사람한테 ‘선물’로 받기도 하나?
시지프는 수국을 갓난아기 머리 쓰다듬듯 손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참. 루나 씨. 저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요?”
“음.
입술? 평소엔 되게 연해 보였는데 오늘은 좀, 빨가네요.”
“빨갛죠?
오늘은 조금 진한 거로 발라봤어요.
입술만이라도 매혹적으로 보이게요.
빨간색이 기본인데 보라색이 섞여 있죠..”
“입술만이라뇨.
얼굴 자체가 장미 같으신걸요.”
“낯간지럽게 시리. 그래도 듣기엔 좋네요.
루나 씨는 오늘도 아이랑 노시는 건가요?”
“네. 지프 님은요?”
“집에 왔으니 이만 들어가야죠.
저도 요리 좋아하는데 만들면 받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가만히 있는 정안을 힐끔 보고 말했다.
“글쎄, 오늘은 집에서 같이 먹을 사람이 많아서요.”
“어머.
그 정도 양이면 꽤 많아 보여서 될 줄 알았는데.
집에 어머니랑 여기 아이밖에 살지 않나요?”
“네?
아, 아. 손님이 오시기로 했어요!”
예리하게 찔러보는 듯 계속해서 들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무심코 거짓말을 했다.
“어머. 1년간 그런 사람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루나 씨 그 새 친구 많이 사귀셨구나. 맞죠?”
“하하하.
저희 이만 들어가 볼게요. 다음에 봬요.
가자. 정안아.”
덜컥-.
어쩐지 점점 캐묻는 듯해서 정안을 데리고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왜 자꾸 마주치는 거야.
내가 돌아다니는 길을 알고 있나?
알아야 할 이유는 뭔데? 으, 소름 돋아.”
식탁에 장바구니를 내리고 나니 다리가 풀리고, 비틀거리는 몸은 벽을 따라 힘없이 내려왔다.
주저앉아 멍하니 있다 보니 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하.”
하필 옆집에 사는 사람일 줄이야.
그리고 왜 이런저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 건지.
셋이서 먹는데 많이 사든 적게 사든 무슨 상관이람?
설마 아주 친한 친구 같은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처음 만났을 때 나 역시 시지프와 대화하면서 나름 편안하다고 생각하긴 했지.
하지만 고작 그걸로 친해졌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아아. 정안이한테 다시는 안 만난다고 했는데. 이게 다 뭐야.
거실에 작은 상에 앉아 어제 만들다 만든 점토를 조각칼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정안이 보인다.
“정안아. 오늘은 쉴까?”
정안은 시선은 점토에 고정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한 30분, 아니지.
여기는 시계가 없지. 조금만 있다가 하자.”
정작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었을 땐 땀이 나지 않았는데 사람 하나 만나고 오니 식은땀이 이마에서 줄줄 흘러나온다.
“시지프.”
시지프는 좋은 사람이지만, 어쩐지 거슬리고 싸하다.
그녀는 겉으로만 보면 괜찮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전에 생각했던 것들도 있긴 하지만, 갑자기 1년 전부터 옆집에서 살았다던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하는 도중에 느껴지는 묘하게 싸한 태도가 거슬린다.
하지만 여기 마을 사람들은 나를 상당히 차가운 태도로 대했다.
정안이 옆에 붙어 다니니까 익숙해져서인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친절한 마트 직원이 아니라면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노란 눈을 달고 있는 외눈박이들은 피부부터 옷까지 회색이라서 길을 걷다 보면 그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렇게 보고 나면, 정안이나 시지프나 둘 다 친절한 사람인 거지.”
낯선 곳에 떨어져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걸 거다.
여기 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중에 반은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했고, 하물며 죽을 뻔한 날도 있었다.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다들 남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으니까.
나만 보면 말 거는 시지프가 유독 눈에 띄는 걸 수도 있다.
사실 여기서 더 살다 보면 내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 많이 볼 수 있을 텐데.
“요리하다 보면 생각이 사라지겠지.
후, 이제 일어나자!”
그렇게 작게 말하고 벌떡 일어나 정안을 불렀다.
달려오는 정안의 뒤로 거실에 작은 상에 보이는 점토로 만든 얼굴은 거의 다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걸 진짜로 하는 거야?”
정안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초롱초롱한 눈을 껌뻑껌뻑했다.
나는 정안이 공책에 적어 둔 메뉴를 읽었다.
“그래도 나 알아볼 수 있게 한글로 싹 적어놨구나.
애플 라이스. 피어 소이빈 페스트 수프. 레몬 필 수프?
해석하면 사과 밥, 배 된장국, 레몬껍질 수프 인 것 같은데.
설마 내가 생각한 것들이 맞니?
과일이랑 섞은 음식을 하자는 말이지?”
정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러니까. 이게 주식이라는 거잖아? 적어도 너희 집에서는.
정말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이 이거라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안의 모습에 말이 안 나온다.
뭐, 사과 밥이야 만들어 먹는 걸 언뜻 들어본 것 같은데.
레몬즙을 수프에 종종 뿌리는 건 봤어도 아예 레몬껍질을 수프에 넣고 만드는 건 처음 본다고.
게다가 배 된장국은 또 뭐야?
이런 음식은 아예 들어본 적도 없어.
애초에 처음 여기 왔던 날에 먹은 저녁밥은 의외로 멀쩡했다고.
그래. 처음 온 날에는 그냥 밥에 고기도 있었는데?
“정안아. 그럼 누나 처음 온 날에 먹은 건 뭐야?”
[그거는 내가 하는 법을 몰라.]
“정안아. 너 이거 맛있어?”
[마시써.]
“맛이 있다는 건지. 맛이 쓰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우리 오늘은 조금 다른 음식을 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뭐 안 넣은 순수한 음식을 만들어도 되잖아.”
[엄마는 이러케 헤야 조아해. 엄마한테 해주고 시퍼.]
“이렇게 해야 엄마가 좋아하셔?
그, 그래.
어, 엄마한테 요리해드리고 싶구나.
우와. 기특하네. 우리 정안이. 하하.
그래도 오늘은 특별하게 정안이 네가 해주는 거니까 조금 다른 맛으로 하면 안 될까?
누나 한번 믿어 봐.
이거보다 백배는 맛있게 해줄 수 있어.”
정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씩 웃었다.
“고마워.”
다행히 정안이 순순히 물러 나준 덕에 처음 듣는 이상한 요리를 먹는 참사는 피했다.
저게 맛있다고?
아주머니가 좋아한다는 말을 정안에게 했었어도 그건 농담이었을 것이다.
먼저 오늘 사 온 게 뭔지 알기 위해 장바구니를 열었다.
안에는 검은 껍질에 쌓인 사과와 배, 레몬 같은 과일과 마트에서 봤던 알 수 없는 풀들과 당근이나 토마토 같은 여러 채소와 가공식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는 이름이 어려운 간 고기와 계란 정도.
고기는 소고기 아니면 돼지고기 같은 육지 고기 같다.
내가 이걸 보고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사과랑 배는 샐러드로 만들고, 스카치 에그라는 거 해보자.”
음식은 어쨌든 맛이 중요하다.
창의성이나 예술성. 그런 요소는 요리 분야의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것이다.
요리가 취미고 그냥 즐기면서 해보는 사람이어도 평범하고 익숙한 거로 하는 게 좋다.
정안은 그래도 밥은 해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과 밥은 나에겐 생소해서 정안의 집에 있는 쌀로만 밥을 짓기로 했다.
“그래? 그럼 먼저 밥을 해보자.
정안이, 아주머니, 누나까지 세 명이니까.
여기 있는 컵으로 4컵 정도면 될 것 같아.”
나는 일반 종이컵 크기의 컵을 건네주었다.
정안은 듬뿍듬뿍 떠가며 솥을 채웠고.
나는 중간중간 솥에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떨어지는 자잘한 쌀알들을 주웠다.
칙-.
취사가 시작 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자, 밥은 금방 될 거니까.
샐러드와 스카치 에그를 만들고 나서 설거지나 뒷정리를 하고 나면 딱 밥이 완성될 거야.
이제 재료를 손질해보자!”
[그게 뭔데?]
“그게 뭐냐면.
정안이 너, 삶은 달걀 알지?
달걀을 기름에 튀긴 요리야! 신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