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1부 15화 장님과 안경 (15/66)



〈 15화 〉1부 15화 장님과 안경

그래. 이거다.

연필을 들어 상상한 것들을 그려본다.


“아.”

물론 손은 상상대로 따라줄 리가 없지.


상상 속은 화려해도 실제로는 별거 없듯이.

머릿속에서 생각한 환상적이고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밤 풍경은.

 손으로 열심히 그려보니 날개 빠진 나방처럼 꼬불거리는 낙서가 되었다.

오늘을 통해 나에 대해  가지  알게 된 것은 그림을 정말 못 그린다는 것.


세상에, 아까 그렸던 그림보다 더 못 그렸네.

형편없는 그림 실력에 헛웃음이 나온다.


기억을 잃으면서 몸에 익은 실력과 특유의 예술 감각을 동시에 잃어버렸다면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지구의 지식은 기억하는 걸 보면.


아마 손재주는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서 생기지는 않을  같다.

혹시 나중에 돌아갔는데,  실력으로 화가 하겠다고 그림 학원이라도 다니던  아니겠지?

이렇게 그린 그림에 칭찬이라는 걸 부여할 수 있는 건 아마 정안이밖에 없을 거야.

에잇. 정안이 그림이나 보면서 눈 정화 해야겠다.


정색하게 될 만큼 못 그린 그림을  뒤집어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정안은 집중해서 그리고 있다.


정안의 작은 등 너머로 힐끔 보니, 가운데에 세로로 선을 긋고 양쪽으로 나눠서 뭔가를 그리고 있다.

그림을  가지로 나눠서 그리려나 보네.


자기 이름 뜻이 여러 개가 되는 건가?

더 궁금했지만 집중하고 있는 정안을 방해하기 싫어서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정안의 등 너머로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안은 그림을 그리다가 공책을 들더니 연필로 이곳저곳을 더 수정하고  웃었다.

그림을 보니 조금 전에 생각한 것처럼 가운데에 선을 그어 두 가지 세상을 표현했다.

왼쪽에 그려진 세상은 도시를 배경으로 얼굴이 몸만큼이나 큰 외눈박이들이 여럿이 모여 있다.


그들은 도시생활이 고되고 피곤한 건지. 모두 눈에 그늘이 깊고 진하게 그려졌다.

그림자가 지지 않은 하얀 백지  눈동자는 공허해 보인다.

또, 그들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구부정한 자세로 걷고 있다.

게다가 오와 3열을 맞춘 채 모두 오른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도,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기 달랐다.

또한 뒤에 있는 사람들은 주름지거나 구멍 난 옷을 입고 무표정으로 걷고 있는데.

가장 아래쪽. 그러니까, 가장 앞에 서 있는 5명의 외눈박이는 주름 없는 양복이나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다.


마치 밤에 외눈박이들이 도시의 불빛에 오열 맞추면서 눈뜨고 걷는 훈련을 하는 것 같다.

하나 같이 퀭한 눈에 한껏 입꼬리를 올린 모습은 억지로 웃는 것 같고 불쾌한 골짜기를 연상시켜서, 괴상한 외모에 불쾌한 분위기까지 더해준다.

반면에 다른 한쪽에 그려진 광경은 분위기가 다르다.

그림 속에는 한 남자가 자연 속에 있었는데, 남자의 몸이 어지간히 큰  아니다.


그는 산과 나무가 빽빽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소파에 누운 듯이 산봉우리 능선을 따라 가로로 누운 채 한쪽 팔을 들어 머리에 손을 댄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남자 주위에는 아주 작게 보이는 동물들이  있는데, 모두 눈을 번뜩이며 그를 째려본다.


남자는  시선에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지루한 듯 두 눈을 반쯤 뜨고 시선은 이 그림을 보는 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누워 있는 상체는 살짝 앞쪽으로 숙인 채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

“오, 심오하다.”


그림을 다 본 나는 정안에게 그렇게 말했다.


보통 같으면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하겠지만.


당장 이 그림을 보고 드는 생각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밝은 느낌의 그림은 아니었고, 이름의 뜻보다는 오히려 이 그림을 통해 뭔가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같았다.

메시지라고 해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지만.

이게 정안의 이름의 뜻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니.

생각해보니까, 어떤 뜻을 가졌으면 이런 그림이 나오는 거지?

“정안아, 넌 이름 뜻이 뭐야?”

정안은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두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돌리고 손가락을 구부려 동그랗게 만들어서 자신의 외눈에 갖다 댔다.


“악, 외눈박이용 안경인 거야?”

앞을 더  보라는 의미인가?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면 앞이 잘 보이니까.

이해는 잘 가지 않았지만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정안의 행동이 그저 귀엽다.


...
...
...

얼마나 학교에 있던 걸까.

 뒤에도 여러 주제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하늘은 벌겋게 칠해지고 있다.

그림만 그릴 거라 길래 마냥 지겨워질 줄 알았던 하루가 생각보다 재미있게 흘러갔다.


천천히 걸으며 붉은 노을을 구경하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현관에서 아주머니가 막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정안은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엄마의 겉옷을 붙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희 다녀왔습니다.”


내가 아직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건지 라벨을 훔친 나쁜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줌마는 그 전부터 그랬듯이 대답하지 않고.

겉옷을 붙잡고 있는 아들의 손을 자기 손으로 뿌리치고 우리 곁을 지나가 대문을 열고 나갔다.


아들에게 조차 싸늘하기만한 저 여자의 행동에 더는 짜증 내기가 싫다.

그냥 쌀쌀맞고 자기 멋대로인 사람인가 보다.


그저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나도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거다.


순간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정안과 함께 주방으로 가서 식탁에 앉아  그릴지 생각해 봤다.

“우리. 이번엔 뭘 그릴까?”


[하고 시픈  해슬 떼 핸보칼 모습.]

“우리가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이루었을 때 행복할 미래를 그려보자고?
저번에 건물에서 이야기했던 뭐, 그런 것들?”

정안은 아까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풋.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그려보겠다는 표정이네.


“흠.”

내가 하고 싶은 건,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이전 기억을 되찾고 다시 살던 곳,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을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정말 좋은 가족이어서 행복하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런 가정이 아니라면. 절망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고생하면서 다시 돌아 온 현실에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까?


절망, 좌절, 후회.

부정적인 생각은 돌아갈 거라는 결심이 서기전부터 했었다.


처음에는 기억을 잃고 스스로가 누군지 몰라서 그리고 이곳이 무서워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원래 세상에 사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순수하게 궁금하고,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아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만큼 바보 같은 생각도 많이 들었다.

이를테면, 알고 보니 이곳이 더 행복한 곳이었다면. 원래 살던 곳으로 가보니 그곳이 더 끔찍하고 차가운 세상이라면 어떻게 하지.

그곳에 정안이같이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고 싶은 걸 이루고 행복할 내 모습이라.”

행복한 미래. 그거야말로 최고의 결말이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행복할 내 미래.

물론 이렇게 둘이 있다가 어느 순간 헤어진다면 돌아갔을 때 당장은 정안이는 그리워할 것이다.

나무를 심었던 추억도, 오늘같이 그림을 그리는 일도, 앞으로의 일들도  과거 아닌 과거가 될 것이다.

다른 세계로 넘어왔을 때 남긴 추억을 지금, 이 순간을.


돌아간다면 이 모든 일을 추억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곳의 삶이 더 행복하다면 아마 곧 이 어린아이도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행복.”

그런 게 나에게 오긴 할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앉아 있는데.


이런 하루도 얼마나 갈지.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불안하고 두려운 걸 어떡해.


이런 것들만 보고 나니 우울하기만 하다.


이럴 거면 그림 그리는  무슨 의미가 있어.

정안이 손가락으로 내 팔을 찔렀다.


[안 그리길래.]


"아, 아냐. 뭘 좀 생각하고 있었어."


정안이는 지금 내 표정이 보이겠지?


초조해하고, 시무룩해져선 어깨가  늘어진 것까지 하나 하나 다 보일 거야.

이러지 말자. 이런 생각도 적당히 해야지.

좋은 생각만 하자.

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돌아가면 정말 행복하게 살 거야.


그래. 맞아.

오늘 아침에 씨앗의 미래를 그렸었지.


분명 자랄 수 없을 씨앗인데.


나는 그리면서 튼튼하고 커다란 나무로 자라길 바라고 있었잖아.


그래!


설령 자라지 못할 씨앗이라고 해서.


될 수 없을 거라 해서 나무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어.


난 지금 그런 씨앗이 된 거야.

‘기억을 되찾고 원래 세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을 꾸고.

기왕 돌아간다면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소망을 가진 그런 씨앗.

돌아갈  없을 거라는 생각이 모든 걸 지배해서.

꿈도 꾸지 않고, 제대로   번 해보지 못하고 포기한다는 건 안 되지.

연필을 들어 공책에 ‘행복’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당장 생각나는 대로 두서 없이 적었다.


[부, 명예, 높은 학력, 금은보화, 월등한 재능.
화목한 가정, 서로를 아끼고 의지하는 형제자매.
서로 신뢰하는 친구,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애인.]


머릿속에서 나올 만한 말들은 다 쓴 것 같다.

물론 사소하고 작은 다른 일들도 많겠지만 그런  하나하나 쓰다 보면 끝이 없겠지.

공책을 눈으로 좌우로 훑으며 찬찬히 목록을 읽었다.


싹  그리면 괜찮지 않을까?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것들만 그리는 거지.

돈도 많고 명예도 있고, 좋은 학교를 나온 능력자.

화목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주위가 행복으로 넘치는 사람.

소시지에 케첩을 뿌릴까 말까로 고민할 필요 없이 두 개 다  버리는 거야.


꿈같은  없이도 잘 자라나는 온실 속의 화초.


‘나는 키도 크고 다리도 길쭉하니까 모델이나 해볼까?’ 하면서 프로들을 고용하는 신입.

쩝. 뜬구름 그 이상이다. 다시 생각하자.


이제부터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갑자기 왜 이런 가상의 설정을 부여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하나 정해놓고 보자.


신장이 크긴 하지만.

그것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여학생.


그림은 못 그리고.


힘은 여자 치곤  세서 무거운 물건을 잘 옮기지만 장사할 그릇은 아닌.


그렇게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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