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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1부 14화 뿌리 없는 나무 (14/66)



〈 14화 〉1부 14화 뿌리 없는 나무

앞으로도 쉽게 흙 위로 싹은 얼굴을 내밀지 않을 것이라는 미래가 그려진다.

정안은 해맑게 웃으면서 눈을 반짝이며 씨앗이 묻힌 자리를 바라봤다.


저거, 상처를  크게 받을 지도.

“우리, 여기 씨앗 친구 앞에 앉아서 씨앗이 다 컸을 때의 모습을 그려볼까?
나무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거지.”


씨앗을 묻은 자리 주변에서 움직이지 않는 정안에게 말했다.

정안은 그 말에 부리나케 씨앗을 묻은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잡는다.

말이야 정안이를 위해서 그리자고 한 것이지만, 나무로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은 마찬가지다.

 자라나면 씨앗을 심었던 그 첫 순간은 잊지 못하겠지.

그래. 그런 소망을 담아 그리자.


분명 저 씨앗도 움직여 보겠다고 지금,  순간에도 꿈틀거리겠지.

위에 덮은 딱딱한 흙을 걷어보겠다고 끝없이 건들어서, 마침내 덮인 흙을 뚫고 땅 위로 나올 거야.


그렇게 힘겹게 나오면 비가 오고 눈이 와도 끊임없이 자랄 테고.

사계절이  번 지나가고 나서 다 자라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나무가 되어 지친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줄 거야.

사각사각.


살랑살랑 부는 바람 소리와 함께 들리는 시원하게 그어가는 연필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 걸까. 생각하는 대로 술술 그려진다.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


그건 마치, 연필을 마법 봉 삼아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휴,  됐다.”


그림은 금세 완성되었다.

완성한 그림의 나무는 잎이 우거지고 많은 가지가 뻗어 나가고 있다.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는 화창한 날씨 아래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유독 크게 자라난 튼튼한 나무.


두꺼운 몸을 가진 나무 기둥에 누군가 기대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실 그렇게 썩 잘 그리진 않았지만, 상상했던 것을 그림으로 얼추 비슷하게 옮겼으니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정안이는 아직 그림 그리고 있나 보네.


고개를 돌려 지켜봤는데 손이 바쁜 걸 보니 아직 덜 그린  같다.

할 것도 없으니 정안이 그림 그리는 모습이나 볼까.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건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 그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하나 보네.

보통의 대여섯  정도  어린 애들이 그림을 그릴 때 저런 표정을 짓던가?


여러모로 신기한 아이다.


그래서 저 애를 만난  일주일도 안 됐지만, 나중에 꼭 크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

넌 꼭 성공해라.

저런 거리에 보이는 흔한 회색 외눈박이들처럼 뛰지 말고, 그 재능 버리지 말고.

귀에 들리는 여러 말에 휘둘리지 말고  곧게, 묵묵히 너의 하루에 집중하며 살아가라고.


이유는 모르지만 왜인지 모르게,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 어린아이에게 문득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잘하지 못하는 걸 잘하라고 말하는  바보 같지만.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를 보며 씨앗이 자라는 미래를 생각한 정안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


역시 아무래도, 큰 나무를 그리겠지?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한참 시간이 지나갔다.

정안은 연필을 내려놓고 공책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기도 하고 햇빛에 대보기도 하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듯 나한테 그림을 건네주었다.

어디 보자. 기대하며 공책을 착 폈다.

정안의 그림에는 작은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엥? 이게 뭐야.

 나무를 그렸을 거라 생각과 달라 실망했다.


그러나 그림의 아래를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분명 땅 위에는 작은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래 뻗은 뿌리는 두껍고 길게 이어져 있다.

뿌리는 그림을 벗어나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동그랗고 커다란 씨앗이 뿌리로 돌돌 말려진 채 빠져나오지 않고 나무의 중심이 되었다.

작긴 해도 나무는 나무네.

비록 작지만 단단하고 튼튼한 나무를 표현한 것이다.

연필로 그렸지만 정안의 나무는 상상이 간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아래 자라는 작은 나무.

작지만 파릇파릇하고 질기다.


색을 칠하지 않아도 컬러풀하게 보인다.

그런 정안의 그림을 보고 나니, 나름 잘 그렸다 싶었던 그림이 달라 보인다.


분명 땅 위에만 보면  자란 나무 같지만.


땅 아래는 뿌리나 씨앗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꽉 막힌 모습이야.

뿌리나 씨앗이 보여야  부분은 흙으로 꽉꽉 메꿔져 있어.

저 안에 뿌리가 썩어있을지, 잘려있을지, 잘 자라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나무는 씨앗과 뿌리가 있어서  수 있는 건데.

나름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상상하려 노력해도 흑백으로만 보이는 그림이다.

그때, 정안이 손가락으로  팔을 콕콕 찌른다.


시무룩해 힘이 없는 내 얼굴을 본 것일까? 공책에는 [예쁜 그림이야.] 라고 적혀 있다.

“아니야. 누난 다음에 좀 더 열심히 그려야겠다.”


입술을 툭 내민 채 대답하자, 정안이 또 뭔가를 적어서 보여주었다.

세 줄로 적혀져 있는 말을 천천히 눈으로 읽었다.

[더펴 이짜나.
이븐 거만 보여주는 개 나븐 건 아니야.
그리구 부리도 업는  아니고 가려진 거야. 여러보기 저넨 아무도 몬라!
이거뚜 뿌리 마늘 거야!]


덮여 있잖아. 예쁜 것만 보여주는  나쁜 건 아니야.

그리고 뿌리도 없는  아니고 가려진 거야. 열어보기 전엔 아무도 몰라.


이것도 뿌리 많을 거야.


공책을 보고 정안을 바라보자 아이는 반짝거리는 눈을 찢어질 듯이 눈웃음을 짓는다.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처음에 경악했던 저 징그럽게 보이던 표정도 이제는 순수하게 웃는 것처럼 보인다.

생긴 건 괴상하고 이상하다 할지 몰라도, 깊게 생각하고 눈치 있게 행동하는 것은  누구도 정안에게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이래서 누군가를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지 말고 지내면서 판단해보라는 거구나.


그래, 큰 나무면 어떻고 작은 나무면 어떻겠니.

애초에 씨앗도 뿌리도 없는 나무는 없고, 나무는 나무일 뿐인데.


“고마워.
누난 너도 나무도,  다 잘 자랐으면 좋겠어.”


선선한 바람이 나무가 열어둔 길을 따라 흘러가며 우리 둘을 지나치고, 햇빛은 나무 사이로 가늘게 들어왔다.


회색 도시에서는 맡을 수 없는, 숲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는 풀냄새와 섞여 코에 들어온다.


“아, 날씨 좋다.”

숲에서 나와 바로 집에 가서 쉬면 좋았겠지만, 이제 점심을 막 지났기에 벌써 가는 건 이르다.


아침에 따로 챙겨온 간단한 음식을 점심 삼아 먹고 조금 더 그림을 그린 뒤에 집에 갈 것이다.

이번엔 어디를 가볼까 하다가 정안이 뛰어갔다.


“가보고 싶은 곳이 따로 있나 보네?
그래, 이번엔 정안이가 가자는 곳으로 가자!”


그렇게 해서 향한 곳은 슈퍼마켓 옆에 자리한 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라 하면, 점심시간이 시작하고 10에서 20분 정도 지난 지금 운동장에 나와서 축구라도 할 텐데 여기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학교 살짝 열린 교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눈치 봤는데, 정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열린 교문을 통과했다.


그러고는 익숙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관중석까지 뛰어갔다.


“헐?”

저래도 되는 거야?

물론 교문도 열려있고 암만 경비아저씨도 안 보인다지만 엄연히 학교인데?


정안은 얼른 오라는 듯 손을 크게 흔들고 있다.

“가, 가도 괜찮은 거겠지? 하지만 여긴 학굔데.”

일단은 정안이가 여기 있고 싶다 했으니까.

그림만 그리고 나가면 괜찮을 거야.

혹시 무슨 문제 있으면 내 잘못이라고 하고 혼나지 뭐!

그렇게 말하면서 정안이 있는 곳까지, 중간중간 주변을 살피며 달렸다.


눈치를 보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관중석까지 달렸지만 지나가는 경비아저씨나 학교 주임 선생님은 안 보인다.


후, 여긴 아무도 없나 보네.

정안이 있는 3번째 계단까지 올라가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안 걸리고 편하게 먹고 그림도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어리둥절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나에게 정안이 공책을 펼쳐 건네주었다.

[소푼 가써.]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나 보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정안은 궁금한 걸 딱딱 알아서 대답해준다.


소풍 갔어. 짧지만 이해하게 되는 대답이었다.


경비아저씨는, 뭐. 휴가라도  거겠지.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이제 얼른 먹자!”

...
...
...

밥을 먹고 나서 그린 그림의 주제는, ‘서로의 첫인상’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얼굴을 흘끔흘끔 보며 그리고, 그린 그림들을 바닥에 나열해 보았다.


하나는 순한 눈매를 가진 두 눈과  생머리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입술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동그란  눈에 긴 속눈썹이 강조된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바꿔서 자기 얼굴이랑 얼마나 닮았는지 비교해보자!”

오, 어깨에서 약간 넘어간 머리길이도 맞췄고.


티 나지 않는 속 쌍꺼풀까지 표현 했는걸?

정안이 그려준 그림과 얼굴이 많이 닮아서 기분이 좋은데, 정작 정안은 그림을 받고 아랫입술이 툭 나와 있었다.

정안이 자신의 얼굴 옆으로 그림을 나란히 보여주었다.


푸하핫.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했더니, 정안을 그린 그림에는 눈썹이 없었다.

어린아이의 연한 눈썹을 깜빡하고 안 그리는  없는 것 같이 되어 버렸다.

르네상스 시대 천재였다던 다빈치의 눈썹 없는 부인을 그린 그림 제목이 생각이  듯  듯 하다.

“미, 큭큭.
미안해. 실수로 안 그려서 눈썹이 사라져버렸네.”

그렇게 말하면서 머릿속은 별명으로 ‘정나리자’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주제로 다시 그리자. 이건  아니야.”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다시 봐도 너무 웃기다.


[이버네는 자기 이르므로 그림 그리기 하자.]

“이름을 그림으로 표현하자고? 너랑 내 이름을?”

그래, 좋아.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로 그리게 된 주제의 제목은 ‘자기 이름을 가지고 그림 그리기’였다.

이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루나’는 달이라는 뜻이지.


단순하게 말해 달 그림을 그리면 된다.


이 이름은 꽃집에 있던 시지프가 만들었다던 시폰 케이크의 이름이 ‘루나’라는 말을 듣고 얼떨결에 쓰게 된 이름이지만, 이 세계에 온 뒤로 가지게  몇 안 되는 것  하나였다.


가진 거라곤 존재 그 자체와 신장이 175라는 마르지 않은 체형의 몸, 며칠 안 지낸 이곳에서의 기억, 그리고 ‘루나’라는 이름.

이곳에서 깨어난 첫날 봤던 하얀 달을 생각했다.

사람 하나 정도는 뛰어들어도 작은 먼지만 해질 것 같은, 아주 커다랗고 하얗게 빛나는 달.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달빛에 반사되어 주변에 보이는 진한 보라색 들꽃들과.


사방이 숲이어서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요한 들판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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