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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화 〉1부 12화 놀자고 시작했는데 저 씨앗은 뭐지? (12/66)



〈 12화 〉1부 12화 놀자고 시작했는데 저 씨앗은 뭐지?

혹시 그런 맛이 취향인 건가?

사실은 도도해 보여도, 라벨만 모으는 수집가인가?

왜 그런 거에 집착해서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목을 조르냐고.

게다가 그 잼은 진짜 조금만 먹었단 말이야.

오히려 많이 먹은 건 내가 아니라 자기 아들이구먼.

자기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사네.


이 집에서 저 아줌마랑 며칠이나 더 살 수 있을까.

식탁 의자에 앉아 샐러드를 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옆에서 정안이 손가락으로 콕콕 오른 팔을 찔렀다.


“왜?”

정안은 쭈뼛거리며 공책을 건네주었다.


“오, 뭐야?
누나가  번 볼까!”

그림에는 벽에 그림을 그리는 어린 소년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금 전부터 정안이 주방에서 의자에 앉아 열심히 끄적거리던 게 이 그림이었나 보다.

그림  벽에는 무수히 많은 하얀 구름이 그려져 있다.

어린 소년은 짙은 남색 머리를 하고 있는데, 하얀 셔츠에 검은색 멜빵바지를 입고 있다.

한 손에는 페인트 붓을, 다른 한 손에는 페인트 밀대를  채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다.

다리를 약간 벌린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은 벽에 그린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뒷모습만 보이는 그림이지만, 앞에 돌아봤을 때 눈이 반짝거리며 그림을 완성하는 것에 들떠 있을 것 같은, 밝은 표정을 한 얼굴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우와, 정안이 너 그림 진짜 잘 그린다.
재능 있어. 표현력이 장난이 아닌데?
나중에 화가 해도 되겠다.”


칭찬을 받은 정안은 씩 웃으면서 쑥스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덩달아 흐뭇해져 공책에 정안이 그린 다른 낙서를 보다가 어제 정안과 대화하면서 적었던 문장을 발견했다.

그 문장들을  번씩 읽으며 곡 씹어 봤다.

‘친구가 안 와서.’


‘꽃은,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아. 요정이 일어난 날에만 와.’

‘요정은 금색에 예쁜데, 무거워서 매일 못 와. 빨리 자고  밤 지나야 와.’

정안이 말하는 친구.

요정이 일어난 날에만 찾아오는 꽃.

무거워서 매일 못 오는 금빛을 띠는 요정이라.

그럼  요정이라는 친구는, 언제 온다는 거지?

“정안아, 네가 말하는 요정이 너의 친구니?”

정안이 대답했다.


[아니.
친구는 또 다른 사람이야.]


“그러면 정안아, 네가 어제 나보고 잼에 대해 알아보러 다니지 말라 했잖아.
그 이유가 요정이랑 친구가 안 와서라고 했고.
그럼 누나는 언제까지,  그동안 뭘 해야 할까?”


[오는 건 요정 마음대로, 그동안 나라 노라.]


“오고 싶은 날에만 온다고?
요정이 언제 올지 확실히 모르는 지금  상황에 놀기만 하자고? 그건 안 돼.
너는 여기 사니까 몰라도, 누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니면 차라리, 요정이라는 애가 올 때까지 누나랑 돌아다니면서 찾아보는  어떨까?”


[요정은 착해. 금가루도 뿌리면서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말하는 요정만 기다릴 수는 없어.
누난 빨리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계속 위험했잖아, 나는  알아!
기다리면 요정은 반드시 와.]

정안은 확실히 안다는 투로 대답했다. 뭘 다 안다는 거지?


허무맹랑한 말 같지만 여태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고민이 된다.

고작 다섯 살 여섯 살  어린아이의 말을, 과연 믿어야 하는가?

자신의 말을 의심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쳐다보는 검은 외눈은 반짝거린다.


“다 안다고?
도대체 뭘 안다고 확신하는 거야?”


[요정은 누나를 좋아해. 절대 버릴 수 없어서 찾으러 올 거야.]

“요정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  있어?”

[알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요정이 누나 몸에 금가루를 뿌려서 데려왔거든.]

금가루?

지금 고전동화를 듣고 있는 건가?

뭐, 동화에서 요정이 금가루를 묻혀 주는 대상은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자신들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는 금을 주는 이야기도 있었던  같고.


그래도 말도 안 돼.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지만 이미 이상한 것들을 많이 봐서 문득 요정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만약 진짜로 요정이 있고 그 요정이 내 몸에 금가루를 묻혀서 여기로 데려왔다고 치자.

굳이 기억까지 지워가면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고 싶었던 이유가 뭘까? 정말 단순히 내가 좋아서?

뭐, 이런 의문은 가진다 해도 의미가 없지.

어떤 의도로 그랬든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이야.

“정안이 네 말대로라면, 요정은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는 거지?”

[언제나, 매일 조금씩 돌아오고 있어.]


“그래 알았어. 네 말을 믿어볼게.”

외눈박이에 나이도 어린아이의 말을 믿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이렇게 뭔가를 아는 듯한 말부터 눈치도 빠른 걸 보면 믿어도 괜찮겠지.

[그럼 이제, 나라 노라!]

“그럼 이제 놀자고?
그래, 나랑 뭐 어떻게 놀고 싶은데?”

정안은 기다리라는 듯 손으로 막더니, 공책에 한참동안 사각사각 적고 나서 보여주었다.

“흠, 어디 보자.
어? 잠깐만.
이걸  하자고?”

[누나랑 하구 시픈 목록!]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누나랑 하고 싶은 목록!’에는 하루 이틀로는  못하는 내용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목록 끝 마지막에는 ‘매일 놀고 나면 일기 쓰기’라고 적혀 있다.


“쿡,  그대로 재미있게 놀고 자아 성찰을 하면서 반성하자는 이야기네.”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다 하자고 적고 있는 정안의 모습에 덩달아 진지해진다.

그래, 불확실한 것만 보고 돌아다니면서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눈앞에 하고 싶은 것을 바라보는 게 오히려 더 도움이  수도 있겠지.

“좋아, 이걸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부터 하나씩 해보자.
뭐부터 하고 싶어, 정안아?”


정안은 집게손가락으로 어떤 지점을 짚었다.

“첫날부터 이걸 하자고, 진심이야?”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안의 태도.

“아, 정안아?
이건 아무리 그래도 이 더운 날씨에 첫날부터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왜 여기, 실내에서 하는 것도 있잖아.
첫날부터 야외 활동을, 다른 것도 아니고 굳이 그걸 해야만 할까?”


정안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끄덕 인다.


“그래, 뭐.
네가 원하는데 누나가 막진 않는다.
힘 좀 쓰는 놀이라고 생각하지 뭐. 허허.”


그래, 오늘은  좀 내라고 힘쓰는 놀이를 하는 거다.

“그래, 이거 해보려면 삽부터 챙겨야겠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정안이 목록 중 콕 짚은 것은 ‘나무 심기’다.

그래, 그렇게 해서 오늘 하게 된 첫 번째 놀이는 ‘나무 심기’가 되었다.

“근데, 식물은 자랄려면 종자나 생육이 있어야 하는데.
정안이 너는 그게 있는 거야?”


[당연이 이찌!]

당연히 있지. 그렇다니 다행이다.


“근데, 집에 모종삽 말고 그냥 일반 삽도 있지?”


정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래,  모르겠구나.
창고에 있겠지.”


벌써부터 고단한 하루가 될 거란 생각이 들지만, 이왕 하자고 마음먹은 거 제대로 해보자.


그렇게 주방 식탁에서 바로 결정하고, 정안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챙겨 과일 가게를 지나 숲을 향해 걸어간다.


오늘 아침에도 거리엔 회색 피부를 한 낯빛 어두운 외눈박이들이 우르르 몰려 시내를 향해 뒤뚱뒤뚱 뛰어간다.


그저께 아침에 봤던 거리의 모습과 다를  없네.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 살굿빛 피부에 진한 청색 셔츠에 검은 멜빵바지를 입은 정안이  눈에 띈다.


마을을 벗어나고 숲 입구를 지나서 입구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원래 나무를 심기 위해선 뿌리가 깊고 멀리 뻗어 나가게 만들기 위해 파는 곳을 높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여기는 다른 나무들도 있기 때문에 그만큼 깊게 파기로 했다.

그렇게 삽으로 흙을 파내어 구덩이를 만드는 동안, 정안은 옆에서 흙에 미리 챙겨 온 수돗물을 조금씩 부어 살짝 촉촉한 흙을 만들었다.

한편 나무들이 몰린 자리는 내 힘으로는 파낼 수가 없어, 나무가 적고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를 골랐다.

그런데도 흙을 파내는  많이 힘들었고,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구덩이를 만드는 작업이 끝났다.


...
...
...


“휴, 악. 어우, 허리야.
겨우  파냈네.
흙이 조금 축축하니까, 나무는 조금 있다가 심으면 되겠다.”

정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머니에서 비닐에 담긴 뭔가를 꺼낸다.

세상에, 저걸 심겠다고?

아까 집에서 말한 게 저게 맞아?

비닐 안에 내용물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정안이 가져온 것은 묘목이나 평범한 생육이 아닌, 진짜 씨앗.

색깔은 호두 껍데기 같은데 생긴  귤처럼 동그랗고, 감처럼 커다랗다.

저 큰 씨앗을 어디에서 구한 건지도 의문이지만.

동그랗고 커다란 씨앗을  순간, 정안의 나이를 싹 잊어버리고 나무를 심는 걸 하고 싶다면서 공부해 본 적이 없다는 게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안의 나이는 고작 대여섯 살, 금방 이해가 갔다.


씨앗을 탁 넣으면 뿅, 하고 자란다고 생각했겠지.

큰 나무를 키우는 것을 단순히 꽃이나 묘목을 키우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저런 생각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나기가 내리는 이 여름에  큰 씨앗을 심으면 과연 새싹이 나올까.

꽃 심듯 묻어버리면, 비 한 번 세게 내린 뒤엔 씨앗이 둥둥 떠올라 떠내려가 다음날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또, 깊게 심는다 한들 씨앗에서 새싹으로 만들어 키우는 것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다.


저온에서 키워야하는 씨앗을 여름에 키우는  의미 없는 일이다.


아니 애초에 저걸 심으면 나무가 자라는 게 맞긴 한 건가?

나무가 아닌 꽃이나 본 적도 없는 다른 생명이 나오는  아닐까? 여러 의미로 퍽 난감하다.

꽃이나 채소를 심는 씨앗치고는 눈에 띄게 크긴 하지만.

보통은 저걸 심어서 생육이 될 때까지 따로 키운 다음에 옮겨 심지, 처음부터 씨앗을 넣으면 싹조차 틔울 수 없다.

저걸 심어 놓고 나중에  자란다고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그건 안 돼. 말려야 해.


“정안아. 우리 차라리 시장에 가서 묘목을  오지 않을래?
걔는 좀 더 크면 심자.
그 씨앗 친구는 너무 약해서 섣불리 심으면 죽을지도 몰라.”

정안은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죽는다는 말에 목에서 색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씨앗을 꼭 들고 있는 작은 두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고,  눈에서는 분수처럼 눈물이 터져 나온다.

아차.

아이고, 두야.


정안이가 하고 싶다고 하잔 거였는데.

그래. 씨앗이면 어떻고, 생육이면 어떻니.
괜한 말을 했다.


“정안아, 미안해.
누나가 나빴어. 잘못했어. 이거, 씨앗 심자.
정안이가 심으면 씨앗이 힘을 내서 자랄 거야!
응? 그니까 뚝 그쳐줘.”

서럽게 우는 정안을 어떻게든 그치게 만들려고  옆에서 아무 말이나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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