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부 11화 요정이 올 때까지 놀기만 하자고?
사소한 사실과 작은 의문을 모아 한꺼번에 생각하니 정말 이상하다.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이 이상한 일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꽃들이 있는 곳을 다시 찾아내고 마을의 이상한 일들을 알아내고 해결한다고 해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는지.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들이 나와 전혀 관련이 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도대체 보라색 꽃이 뭔지 알아내야겠어.
그리고, 애 엄마가 잼보다 이 비닐에 집착하는 이유도."
생각은 그 정도로 끝내고, 가만히 있던 내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던 정안을 보고 말했다.
"누나가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정안이, 네 덕이야.
내일 당장 돌아가면 널 데려다주고, 잼에 대해서 다시 알아보러 다닐래."
정안은 내 말에 미소를 거두더니.
공책을 가져가 이렇게 적었다.
[아지근 안대.]
"아직은 안 돼, 어째서?"
[칭구가 안 아서.]
"친구가 안 와서?
누구, 여기 아지트 친구야?"
정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급한 탓에 정안의 말을 무시했지만, 정안은 계속해서 안 된다고 했고 답답함에 그에게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책에 '꽃은,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아. 요정이 일어난 날에만 와.'라는 내용을 적었고, 이어 공책에 더 적은 말은 '요정은 금색에 예쁜데, 무거워서 매일 못 와. 빨리 자고 몇 밤 지나야 와.'라고 적혀있었다.
마치 내가 뭘 찾는 건지 아는 것처럼, 공책에는 확실하게 아는 듯한 말투로 적혀 있었다.
하긴, 나이가 어리지만 여기서 어느 정도 살았다면 어린아이라도 무의식으로 기억하는 게 있겠지만.
정안의 말대로 당장 움직이지 않는다면, 뭘 해야 하지?
정안이 말하는 친구가 올 때까지, 요정이 일어나 꽃이 찾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멍하니 하늘만 보며 기다릴 수는 없는데.
"그럼 누난 뭘 해야 해."
그는 당장은 어디로 가지 말고 집에 같이 있자는 내용을 적었다.
"누나 어디 안 가.
지금은 갈 곳도 없고."
언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걸까, 삐걱거리는 문틈 사이로 폭포 같은 거센 빗소리가 들린다.
"소나기가 다시 내리나 보네."
시끄러운 빗소리를 듣다 보니 점점 집중되지 않아, 오늘은 그만 생각하기로 하고 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달빛에 반사돼 빛나는 빗방울이 문 안으로 조금씩 들어와 물이 고이자, 문을 꽉 닫고 쓰레기를 모아 그 앞을 막아뒀다.
쏴-.
비가 퍼붓는 날씨에도 정안은 호롱 곁에서 일찍 잠들었지만, 새벽이 올 때까지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였다.
빗소리에 잠이 들기엔, 너무 외로운 밤이었으니까.
...
...
...
아침이 밝았다.
아이고, 뻐근함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뜨자, 정안은 안 보이고 문만 활짝 열려 있다.
꼬이는 긴 머리칼을 대충 정리해 묶고 나와 보니 정안이 빈 호롱을 들고 지붕 끝에 걸린 고리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정안아, 왜.
키가 안 닿아? 누나가 걸어줄게."
그렇게 말하고 호롱을 건네받아 갈고리에 가볍게 걸었다.
"정안아, 이제 집에 가자."
앞장서서 걸어가는 정안의 뒤로 바짝 따라 걷다 보니, 어제 잤던 낡은 건물만큼이나 익숙한 오두막이 보였다.
정안은 오두막 문을 열기 전 안아달라고 하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내 두 눈을 덮었다.
그 행동이 꽤 당황스럽긴 했지만, 처음에 이 오두막을 통해 들어갔을 땐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에 들어갔을 때와 달리 안은 매우 조용했다.
마치 깜깜한 방을 들어간 것 같아.
"우리 이렇게 걸으니까 며칠 전에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
그땐 네가 다쳐서 누나가 안고 갔는데, 기억나?"
정안이 말을 못 하는 걸 알면서도 어둡고 조용한 게 무서워 괜히 말을 꺼냈다.
무서워, 머릿속으로 그 말만 반복해서 외쳤다.
다행히 처음 오두막에서 나왔을 때처럼 금방 나왔다.
그렇게 다시 걷다 보니 온통 회색으로 칠해진 마을에 도착했고, 곧 검은색 지붕이 칠해진 단독주택에 도착했다.
정안의 엄마가 살고, 내가 며칠 동안 지냈던 정안의 집.
정안이 벨을 누르고 문이 열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까지, 심장은 쿵쾅거렸다.
그녀는 아직도 화가 났을까, 이번에는 정말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 나도 싸워야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낡은 건물 안에 있던 쓰레기 더미들 사이에서 찾은 유리 조각을 주머니 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겉 문이 열리고, 현관문이 열리며 정안의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다크서클과 볼이 들어갔던 얼굴이 해골에 가죽을 두른 것처럼,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심장은 거의 터질 듯이 쿵쿵 뛰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고, 정안과 함께 현관 복도를 지나 둘이서 2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정안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내가 쓰던 방에 들어가고 문을 닫고 나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헉, 헉.
진짜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네.
그깟 병에 붙어 있던 비닐 하나 사라졌다고, 저렇게 죽일 듯이 쳐다볼 수도 있는 거야?
숨을 고르며 등을 바닥 쪽으로 향한 채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래도 어제처럼 목을 조르려고 하진 않았으니 다행인 건가.
아냐, 정안이가 있어서 그래. 애가 있으니까 차마 그렇게는 못 하는 걸 거라고.
조금 있다가 돌려드려야겠다."
하지만 저녁이 되기 전에 정안의 엄마는 일하러 나가버렸고, 직접 전해주지 못해 결국 저녁에 그녀의 방에 있는 화장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고 나왔다.
"아 몰라, 이젠 내 손을 떠났어.
정안이한테 가서 친구 이야기나 들으면서 시간 보내야겠다."
정안은 2층에서 언제 내려온 건지, 주방에 있는 냉장고에서 낑낑거리며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정안아?"
가까이 가보니, 그는 그 보라색 잼을 꺼내고 있었다.
"정안아, 안돼!"
나는 잼을 빼앗았다.
"너 이거 엊그제 먹고 배탈 났잖아.
또 먹고 배 아프려고? 안돼."
정안은 단호한 내 태도에 포기한 듯 터벅터벅 걸어가 식탁 의자에 앉았다.
"어휴, 맛없고 배탈만 나는 거.
이런 거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알았지?"
잼은 냉장고에 넣어 두고, 그 옆에 보이는 김밥을 꺼내 저녁으로 먹었다.
전날 저녁, 정안의 어머니는 일하러 밖을 나섰고 집에 있던 난 정안과 저녁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아침이 되도록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잠든 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아주머니가 날 죽이러 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밤새 두려움에 뜬눈으로 지새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잼과 그 잼 병에 붙은 라벨 때문에 질식사당할 뻔했다는 사실이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고작 맛없는 잼과 라벨 쪼가리에 트라우마가 생긴다는 것도 웃기긴 하다.
세상엔 별에 별놈이 다 있구나.
하지만 다행히도, 아주머니가 밤에 와서 나를 죽인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괜히 밤샌 건가 싶어 후회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2층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가는 길에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하필 이럴 때!
조금만 더 늦게 나와도 됐잖아. 멍청하긴!
아줌마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깔끔한 차림을 한 채 나갈 준비를 막 마치고 현관 복도로 나와 있었다.
그저께 봤던, 그 괴물은 과연 아주머니가 맞았나?
어제 얼굴을 뚫어지듯 무섭게 째려봤던 그 폐인은 환상이었나?
아주머니는 막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차갑고 쌀쌀해 보이는 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제 화장대에 올려둔 병 라벨을 본 것일까, 전날처럼 무섭게 째려보지는 않는다.
다행이다.
라벨을 못 봤으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도 몰라.
이틀 전 무서웠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생각나서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는데, 상대가 먼저 말을 던졌다.
“목이랑 손은, 좀 어때요.”
분명 자신에 의해 다쳤을까 봐, 걱정돼서 물어본 것이라 믿고 싶지만.
이전에 기괴했던 그 모습이 아줌마의 깔끔한 모습과 흐릿하게 겹쳐 보여 간담이 서늘하다.
“괜찮아요.”
노란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짧은 대답을 하며 눈을 피하는 내 행동을 본 것일까.
빤히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어색한 대화가 오가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머리에서 울린다.
“냉장고에 김밥이 줄었던데.”
“네, 어제 정안이랑 같이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항상 맛있는 음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심정은 오줌이 찔끔 지릴 것 같다.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
왜 이렇게 뜨거운 거지. 너무 덥고 목말라.
그저께 아침의 끔찍했던 기억과 오늘의 태도가 180도로 달라진 저 여자가 너무 무섭다.
지금도 머릿속으로는 날 죽이지 못해 아쉬워하는 거 아니야?
만약 그런 거면 어떻게 하지.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다.
“냉장고에 아침 넣어뒀어요. 이따 꺼내 드세요.”
정안의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
“허, 뭐야.
저 여자. 어제랑 그저께는 날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지금은 또 괜찮다 이거야?
그깟 그 라벨지가 뭐라고.”
복도에 홀로 남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저 여자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은 더운 날 이유 없이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긴장을 해서 그런 걸까.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목은 부은 건지 따끔따끔 거린다.
만지면 자동으로 미간을 찌푸리게 될 만큼 아리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거 멍 지겠네.
그나마 오른손은 아프지 않아서 다행인가.”
왼손으로 목을 살살 만지며 한숨을 푹 쉬었다.
주방에 가니 정안은 이미 식사를 끝낸 건지, 식탁에 앉아 공책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아침으로 먹을 샐러드와 물을 꺼냈다.
반쯤 남아있던 잼은 안 보인다.
아마도 정안의 엄마가 가져간 것 같다.
“허, 그게 그렇게 좋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맛없는 잼과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저렇게 집착하는 거지.
아마 자기 방 화장대에 있던 라벨도 분명 버리지 않고 가져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