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부 10화 아지트
시끄러운 빗소리가 가득 찬 거리는 조용했고, 우중충한 날씨는 차가운 회색 도시와 잘 어울렸다.
들이마시면 느껴지는 비 냄새와 바닥에 고인 물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잡생각을 사라지게 만든다.
걷다 보니 어느새 숲 입구를 지나, 근처의 작은 기차역에 도착했다.
"처음 마을에 올 땐 정신이 없어서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네."
장난감 기차처럼 정말 조그마한 애들만 들어갈 것 같은 이 역에는 많은 외눈박이가 꾸겨져 있던 자신들의 몸을 빼내며 힘겹게 내리고 있었다.
정안은 자신이 입은 멜빵바지에 달린 주머니 안을 더듬더듬 만져보다가 이곳에서 사용하는 듯한 은 동전을 몇 개 꺼내 표를 샀다.
혹시나 아는 말이 있을까 해서 좌석 표를 받아 읽어봤지만, 역시나 알 수 없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네.
정안이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근데 정안아.
이렇게 기차 타고 가면 넌 나중에 어떻게 돌아가려고?"
정안은 내 말에 그저 해맑게 웃으며 기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정안을 따라 기차 안으로 몸을 억지로 구겨 넣었고, 곧 장난감 같은 기차는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했다.
나는 기차를 타 신이 난 정안의 맞은편에 앉아, 기차에 달린 창문을 통해 소나기가 내리는 낯선 세상의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꼭, 이 기차를 타고 가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만 같아."
...
...
...
정오가 지나서 내린 소나기는 오후 내내 그치지 않았고, 오전에 맑았던 하늘은 검게 변했다.
오후가 지나 저녁이 되어 비가 그쳤음에도 하늘은 벌써 어두컴컴했고, 오전에 뜨거웠던 대기는 비가 내리면서 차갑게 식었다.
몇 시간 동안 달린 걸까?
기차에 내리고 하늘을 보니 해는 다 저물고 밤하늘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별이 몇 십 개씩 떠오르고 있다.
"밤이다.
근데 정안아, 너 정말 괜찮아?"
정안은 우산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또 어디야?"
낮에 비를 실컷 맞은 몸은 으슬으슬한 밤공기를 맞자, 양팔과 목에는 소름이 돋고 덜덜 떨렸다.
정안은 가볍게 말이 뛰는 것처럼 뛰어가며 어딘가로 향했고, 나 역시 그를 따라갔다.
따라가다 보니 아주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는데, 정안이 지금 가는 곳이 저곳임을 확신했다.
그렇게 빛만 보며 달려 도착한 곳은 허름하고 낡은 건물이었다.
"아, 여기는?"
순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낡은 이 건물은, 들판에서 정신을 잃고 다시 일어났을 때 있었던 그 허름한 회색 건물이었다.
비에 젖은 건물은 며칠 사이에 더 허름하게 변해 있었고, 건물 지붕 끝에 전에 없던 호롱불이 켜져 있었다.
정안은 이곳에 이미 여러 번 와본 것인지, 내가 건물 앞에 도착하자 삐걱거리는 건물의 낡은 문을 벌컥 열었다.
"이제 보니까, 여기가 네 아지트였구나.“
그제야 나는 정안을 처음 만났을 때 왜 이 건물로 향하던 길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정도면 운명인가?
쿡쿡거리며 정안이 주는 비어있는 호롱을 받아 밖에 걸린 호롱불에서 불을 나눠 붙이다가 멈칫했다.
"근데 여기. 저번에는 불이 꺼져있었던 것 같은데.
정안이 친구가 다녀가기라도 했나 보다."
나는 새 호롱불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혹시 여기 전에 다른 친구가 왔었어?"
정안은 초롱초롱한 큰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맞나 보네.
나 역시 씩 웃으며 호롱불을 바닥에 두고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한참 동안 비에 맞아 으슬으슬한 채로 있었는데, 호롱불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호롱불로 손을 녹이고 있는데, 정안은 쓰레기 더미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았다.
"공책이랑 펜?"
정안은 공책과 펜을 가져와 내게 보여주었다.
공책을 열어보니, 첫 장에는 큰 글씨로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이 연달아 적혀 있었다.
나는 정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정안이 네가 사라져서 엄마가 걱정 많이 하시겠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다음 장을 열어보았다.
다음 장에는 반 정도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엄마, 아프지 마.'라는 말이 마지막에 적혀 있었다.
"엄마가 많이 아프시니?“
정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구나.
그런데도 누나가 아침에 네 엄마를 화나게 만들어서 더 힘드시겠다.
게다가 지금은. 너랑 내가 동시에 사라져 버렸으니 내가 더 미울 수도 있겠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다음 날 돌아가면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호롱불을 앞에 두고 옆에 같이 앉아 있던 정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득, 정안의 엄마 이야기를 하다 보니 궁금해졌다.
내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에 대해 기억나지도 않으면서 어머니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누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정안은 내 말에 공책을 가져가 빈 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조은엄마.]
"좋은 엄마라.
사실 누나는, 누나의 엄마가 누군지 몰라.
아빠도, 누나 자신도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나를 슬프게 만든다.
"갑자기 낯선 장소에 떨어져서, 이상한 꽃향기에 홀려 기절하고.
일어나서 도착한 곳이 마을인데 적응이 전혀 안 돼.
오늘 아침에 있던 일은 어떻고.
점점 괜찮아져야 하는데, 갈수록 무섭다는 생각만 들어."
정안은 내 팔을 잡아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로 공책을 내밀었다.
공책에는 [차으매는 다 그런거래] 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다 그런 거래.
누가, 너희 엄마가?"
정안은 끄덕끄덕했다.
"정안이 너는 무서울 때가 언제야?"
내 말에 곧 정안은 공책에 적어 대답해주었다.
[바매. 벼리 무서워.
근데 엄마는 갠차는 거래]
"별이 무섭구나.
여기 사는 사람들이 무섭다거나 그러진 않아?"
정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난 여기 사람들이 무서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안이 공책을 내밀었다.
[나 꾸매서 요저 보려구, 열시미 자려구 노려카거드.
한번 하고시픈이를 샌각해바.]
"요정 보고 싶어서 열심히 자려고 노력한다고?
우리 정안이, 기특하다 기특해."
정안은 히힉, 새는 목소리를 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눈을 반짝였다.
"하고 싶은 일, 이라."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봤다.
낯선 타지에 뚝 떨어져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뭐가 있을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기억을 되찾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는 여기서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보겠다고 움직이고 있는데 이 이상한 세상은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긴다.
머리는 크고 몸은 가는 외눈박이가 있지 않나, 특이한 함정이 발동한다거나.
하나같이 낯선 일들로 가득하다.
온통 알 수 없는 것들이라 앞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섭다.
벌벌 떨리고, 무력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누나는 있잖아.
누나의 기억을 찾아서,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울먹이는 내 얼굴을 본 것일까?
정안은 조용히 뭔가를 쓰더니 공책을 내밀었다.
[그럼, 그거만 샌가케.]
"그럼, 그것만 생각해.
고마워.
네가 응원해준다니, 누나가 힘이 난다."
그래,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해선 안 돼.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 해서 왔던 지금 이 마을에 있고, 나를 응원하는 어린아이도 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여기서 도망쳐봐야 갈 곳도 없다.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남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당장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자.
...
...
...
그렇게 다잡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해봤지만, 바로 생각이 날 리가 없지.
정안의 공책을 빌려 이것저것 적어보았다.
[
1. 추억이 담긴 일기장을 보여준다.
2. 즐거웠거나 강렬했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찾아가 본다.
3. 병원에 가서 뇌 신경을 건들어본다.
4. 경찰서에 가서 실종신고를 해서 가족을 찾는다.
5. 핸드폰을 써서 연락을 취한다.]
지금까지 쓴 것을 보면, 이 정도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공책에 쓴 글들을 다시 한번 읽었지만, 이 방법들은 전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 2는 효과가 거의 x
3, 4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5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으로는 안 되는 걸까.
"후, 어렵네."
해야 하는 일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으니 막막하다.
이 세계에 적응하면서 살아남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라.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공책에 그것을 빠르게 적었다.
[6. 뭐라도 해본다.
7. 지금 보이는 일들을 해본다.]
그래,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이라면..?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잼 이름이 적힌 라벨을 꺼내었다.
며칠 새 마을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상한 일들이 주변에 생기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공통점이 있다.
시계가 없고 핸드폰이 없고, 이런 건 기술적이거나 과학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안의 엄마가 아침에 잼 병에 붙어 있던 비닐을 내놓으라고 대뜸 내 목을 조른다든지, 꽃집에서 시지프가 차를 마신 뒤에 갑자기 피곤해하는 모습.
'밤의 친구'라 불리는 보라색 꽃에 뭔가가 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은 보라색 꽃과 잼뿐이다.
그리고 잼의 역한 맛이 시지프가 끓여준 차의 역한 향을 떠올리게 한다.
잼의 맛은 정말 별로였지만, 달콤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던 게 기억난다.
정안의 집에 있는 잼과 비닐, 시지프가 만든 케이크와 꽃차.
잼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려고 찾을 다닐 때도 타이밍이 이상했다.
마트에서는 갑자기 단체로 쓰러지지를 않나, 병원에서는 간호사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병원에서 마트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경찰차는 이미 도착해서 목격자에게 경위를 물어보고 있고, 응급차는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는 시지프의 말과 달리 이미 환자를 다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해결이 되어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좀 더 생각해보니, 이 마을에 오기 전 처음에 들판에서 눈을 떴을 때가 생각났다.
달빛에 비쳐 보이는, 진한 보라색 꽃.
흔한 들꽃이라 생각했지만 기절할 만큼 강한 향을 가지고 있었다.
꿈같지만 그 향은 아주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