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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09)화 (10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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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괜찮아, 딴생각 못 하게 할 거니까

일한은 강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강이 잘 리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방에서 도통 나오지 않았다.

“연대장님, 현재 시각 오후 7시입니다. 제가 오후 6시 반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백 번은 알려 드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거기 있는 거 다 압니다. 10초 셀 동안 반응이 없으시면 응급 상황으로 간주하여 이동하겠습니다. 10, 9, 8…….”

“씨X.”

방문 너머에서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일한의 코앞에서 요동치는 강의 파장은 엎드려 씩씩거리고 있는 커다란 짐승 같았다. 그 커다란 짐승 같은 것이 고개를 들어 일한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어휴.

일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저렇게 사납게 휘몰아치는 파장을 사흘간 제 몸속에 걸어 잠그고 있었던 최강이 참 대단하기도 했다. 가이딩에 거부감이 심한 강이 버틸 수 있는 만큼 일한이 최선을 다해 그를 가이딩했지만, 지금 이 상태가 윗분들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이번엔 날 또 어디로 끌고 갈지 알고…….”

강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5, 4, 3…….”

“내가 없어도 쟤네들끼리 알아서 할 회의 아닌가?”

“2, 1, 땡.”

일한은 고지한 대로 강의 방으로 순간 이동 했다. 이동하자마자 사납게 달려드는 강의 파장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방금 침대를 박차고 나온 듯이 시트와 이불이 헝클어져 있었고, 강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짚고 있었다. 깔끔했던 그의 방 곳곳에는 지도와 좌표 계산한 종이들, 그리고 빈 물병이 굴러다녔다. 방 안을 쓱 둘러본 일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또 어디까지 갔다 온 거야?”

“…….”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일한은 강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주위에 흩날리는 파장에 손끝이 지직거리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강이 눈을 부릅뜨며 일한의 손을 쳐 냈다.

“꺼져.”

그런다고 물러날 일한이 아니었다.

“내 가이딩 5분만 버티면 나리 중사 어딨는지 알려 줄게.”

“허…… 뭐?”

머리를 쥐어뜯던 강이 두 손을 내리고 일한을 쳐다보았다. 며칠째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강은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는 일한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었다.

“유일한.”

강은 한쪽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이죽거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그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올 때까지 처맞고 싶어?”

“빨리 결정해. 난 지금 5분 내로 널 멀쩡하게 회의장에 데려다 놔야 하고. 네가 날 못 믿겠다고 여기서 버틸 작정이면 연구원 놈들이 마취총 들고 들이닥칠 거야. 네 녀석이 억지로 끌려가 황에덴의 가이딩을 주입당하는 동안, 난 나리 중사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지.”

“…….”

짜증 나는 녀석.

강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두 손을 일한에게 내밀었다. 일한은 강의 손목을 잡고 위협적으로 휘몰아치는 파장을 천천히 이끌었다. 분노에 휩싸여 있는 강의 감정이 일한의 목을 조여 왔다.

“농담하는 거면 죽인다.”

“농담…… 아니야…….”

“어디서 확인하지도 않은 헛소리를 주워 물은 거도 예외 없어.”

“……아까, 내 옛날 연락처로 니콜이 연락했어.”

니콜?

강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그 이름을 떠올렸다. 성격이 드세 보이던 눈꼬리에 도톰한 입술, 짧게 민 머리, 종합 격투기 선수같이 보였던 그 무지막지한 미국인 가이드를 말하는 걸까?

“답장은 하지 못했지만. 니콜과 그레이슨이 나리를 만났대.”

“어디?”

곧바로 강이 되물었다.

한참 그를 진정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는데, 강은 진정하기는커녕 당장이라도 장거리 순간 이동을 할 것처럼 파장을 더 곤두세웠다.

그 순간 강의 방이 지직거리며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노이즈가 번뜩번뜩 일어났다. 일한은 신음을 흘리며 강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아니,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제 머릿속을 관통하는 강의 파장이 더 괴로웠다.

“으윽.”

“어딘데? 거기가.”

나지막이 울리는 강의 목소리와 함께 일한을 덮치는 그것은, 날뛰는 파장에 미쳐서 폭주해 버리기 직전, 에스퍼의 악에 찬 감정이었다.

날가만히내버려둬만지지마죽어버릴거야이딴거필요없으니까꺼지라고정의고뭐고날위한다는척온갖잡소리를해대는것도이젠못참아이나리까지건드리면너넨다죽여버릴거야

“강아…….”

다리에 힘이 풀린 일한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강에게 매달렸다.

“그러지 마. 강아, 참아……. 여태까지 참은 김에, 조금만 더 버텨 줘. 네가 지금 여기서 화내며 폭발해 봤자, 너에게 좋을 게 없잖아. 그러면 진짜 우리 더 이상 나리 중사 못 봐……. 황 대통령이랑 그 작자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거라고.”

“어디냐고.”

벌겋게 실핏줄이 일어난 일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태엽 시계의 시간은 5분의 반밖에 안 지나 있었다. 조금만 더, 1분이라도 버텨야 했다.

“니콜이 여기로 온다고 했어.”

“나리는?”

시간을 끌려는 일한과 다르게 강은 당장이라도 나리에게 순간 이동할 것처럼 곧바로 물었다. 일한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강의 파장을 어르고 달랬다. 그나마 강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지난번보다 가이딩이 수월한 편이었다.

“나리 중사도 오는 건지는, 나도 잘…….”

“언제 오는데?”

“지금 회의 중이야. 네가 직접 가서 윗분들이 뭐라 하는지 들어 보면 알겠지.”

일한의 말에 강의 감지 어빌리티가 확, 주위로 뻗쳐 나갔다. 그러나 회의장 안에 파장을 방해하는 가이드가 있는지, 제대로 엿들을 수가 없었다.

“말 돌리지 마라.”

강이 일한의 목을 움켜쥐었다.

곧바로 일한이 강의 팔목을 잡아 내리고 몸을 비틀어 강의 공격에서 빠져나왔다. 잠잠해지던 강의 파장이 화르륵 일어나는 것을 피하고, 강의 팔을 잡아 젖히며 암바를 걸어 그를 제압했다.

“이, 씨…….”

“으이그, 진작에 이럴 것을! 야, 너 가이딩하는 나도 죽을 맛이다. 내가 이 나이 되어서 이렇게 가이딩해야 하냐! 이 빌어먹을 가이딩포비아 자식아!”

강은 일한의 속박 속에서 버둥거리다, 일한의 다리를 콱 깨물었다.

“윽!”

일한은 눈앞이 번뜩였다. 잇새로 새어 나갈 거 같은 험한 소리를 삼키고 시간을 확인했다.

째깍째깍 돌아가는 초침이 다섯 번째 완주를 막 넘기고 있었다. 일한은 강의 파장을 완만하게 그리면서 이를 악다문 채로 말했다.

“메시지 원본을 보여 줄게! 그럼 되잖아!”

“제대로 돌아가는 통신기는 없고, 내 워치는 엊그제부터 방전된 상태인데, 연락이 와? 씨X, 어떻게?”

일한은 주머니 속에 잘 접어 넣은 쪽지를 강에게 흔들어 댔다. 일한의 한 손이 풀린 틈을 타 강이 일한의 암바를 풀고 그 쪽지를 홱 낚아챘다.

연락처가 바뀌었나. 왜 연락이 안 돼? 내 아기 고양이는 어쩌다가 저 꼴로 괌까지 내려왔어? 너희가 대체 뭘 하는 건지 몰라도, 이번 C15 작전에서 나 만나면 맞을 각오 해라.

강은 쪽지에 적힌 내용을 다시 훑어 내려다보고 중얼거렸다.

“괌?”

일한은 잽싸게 강의 두 다리를 끌어안고 강을 말렸다.

“난 약속 지켰다? 너 지금 남의 나라 해군 기지로 뿅, 순간 이동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가이드의 파장 감지에 걸려서 대책 없이 일이 커지는 거야. 일단 연대장님은 회의장부터 가자, 어? 회의장 이동!”

일한의 다급한 구호와 함께 일한과 강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잠시 머물 곳이라 많은 건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숙실을 가득 채운 킹사이즈 침대 하나에 옷장 하나, 화장실 하나. 딱 봐도 나리가 상상했던 페어 숙실이었다.

나리는 방 안을 둘러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주환은 워치를 톡 건드리고는 나리의 의문점에 대해 바로 답했다.

“방 못 바꿉니다.”

그러고는 정말 방을 바꿀 맘이 없는지 벌써 옷장을 열어 생활복을 꺼내 사이즈를 보는 게 아닌가. 나리는 팔짱을 끼고 서서 주환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면 비어 있는 숙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주환은 나리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쳤다.

“오늘 밤은 여기 있어.”

“…….”

“이대로 나리 씨가 나가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제가 최강 대령님과 연락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페어가 각방을 쓸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 그러면, 내일 이 중사가 매칭 테스트를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니게 될 거야. 나 외에 이 중사의 페어에 부합하는 가이드를 찾으려고 들겠지. 그러면 이 중사는 가이드를 따라 연합군, 아니면 해외를 돌게 될 텐데. 그걸 원하는 건가?”

주환은 나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쪽, 살짝 손등 위에 내려앉았던 입술에서 꽃향기처럼 부드럽고도 단맛이 감돌며 나리를 간지럽혔다.

“아니요…….”

“나 때문인지, 가이딩 때문인지. 왜 네 심장이 달아오르는 건지, 헷갈린다면서? 오늘 확실하게 해.”

어둡고도 감미로운 시선이 나리를 유혹했다. 손끝에서부터 하나씩 천천히 네가 애타서 참을 수 없도록.

“정말 그래도 됩니까?”

나리가 턱을 기울이면서 비스듬히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박 소령님 가이딩은 제가 모르는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10년 전 기억을 되찾지 않는 걸 바라신 거 아닙니까?”

“괜찮아. 딴생각 못 하게 할 거니까.”

“저 머리도 나쁘고 집중력도 없어서, 괴로운 기억이든 행복한 기억이든 펑펑 울지도 모르는데요?”

“울어.”

“자칫, 감정이 복받치면 ‘최강 개색히야!’ 욕하면서 박 소령님 때릴 수도 있고요.”

“하나도 안 아플 거 같은데? 정 아프면 나중에 내가 최강 면상 때리면 되는 거고.”

주환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나리는 자신의 목덜미에 와 닿는 주환의 웃음소리와 함께 스며드는 화한 가이딩에도 불안한지 온 신경을 뾰족하게 세웠다.

“……보, 본인 입으로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저한테 먹튀네 책임감 없는 페어네 뭐라 하지 마십시오.”

주환은 바짝 힘이 들어간 나리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고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흠…….”

글쎄, 그건 해 보지도 않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거 아닌가. 저리 정이 많은 이나리는 페어인 자신을 매정하게 떨치지 못할 거 같은데 말이다.

나리는 질끈 두 눈을 감고 주환의 얼굴을 잡아 입술을 맞댔다.

쿵. 쿵쿵…….

그의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울림이 나리의 심연을 흔들었다. 잠잠했던 수면이 다시 파문을 일으키면서 나리의 발목을 적셨다. 나리는 잠시 입술을 떼고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아.’

그곳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이 총을 든 강의 어깨에 기댄 채, 수면 너머 주환의 품에 갇힌 자기 자신을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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