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내 마음이 향하는 사람
“이 중사는 니콜 머빈스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아는 사람이지만, 알고 있었다는 걸 몰랐던 사람입니다.”
나리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했다. 주환이 “음?” 하고 낮게 말끝을 올리자, 나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 쪽을 돌아보았다.
바다가 참 예뻤다.
자신이 생각하던 바다는 언제나 파랬었는데, 태양을 삼키고 붉게 타는 바다를 보니 가슴께가 시큰거렸다.
“제가 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기억 못 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니콜과 그레이슨은 그때 만났던 은인들입니다.”
주환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나리를 돌아보았다.
나리와 페어 등록을 하기 전에 일한이 그에게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리 중사는 저와 최강 대령과 함께 인도네시아 리아우 균열과 C15 균열 작전에 출전해서 살아 돌아온 유일한 에스퍼입니다. 하지만 C15 작전에서 크게 다친 뒤, 군 상부의 조치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없이 프로그래밍 된 상태입니다.〉
그의 입 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이제 박 소령이 나리 중사의 가이드가 되실 테니,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함부로 나리 중사의 과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당부드립니다. 자칫하면 발작, 기억 장애가 일어나고 심하면 파장 폭주가 올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날, 일한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아픈 다리를 그러쥐며 주환에게 재차 당부했었다. 나리의 편에 있어 달라는 정중한 말과는 달리 일한의 눈빛은 소름이 돋을 만큼 사나웠다. 네놈이 나리를 이용하다 버릴 생각이면 그땐, 내가 널 죽여 버릴 거라는, 고요하지만 사나운 경고였다.
그때처럼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날뛰었다.
혹시나, 그녀가 옛 전우를 만나서 기억을 떠올린다면, 강이 나리를 건드렸을 때처럼 폭주하지 않을까.
“그, 렇습니까? 꽤 오래전이라 들었었는데 말입니다.”
“네. 에스퍼로 발현되고 10주도 안 되어서 인도네시아의 외딴 섬에 있는 균열로 파병 나간 불운아가 접니다. 첫 전투였어요. 머빈스 팀장님, 그리고 그레이슨과 최강 대령님, 유일한 소령님, 그때 모두 같은 팀이었습니다.”
“그때 머리를 크게 다친 겁니까?”
“아니요. 그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쳤습니다. C15 균열 파쇄 작전 때 말입니다.”
“…….”
나리의 말에 주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리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리는 픽 웃으면서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많은 희생자가 생겼지만 별로 자랑할 만한 소식이 아니라서 크게 보도되지 않았거든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주환의 물음에 나리가 동그랗게 뜬 눈을 좁히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박 소령님께서도 제가 10년 전 일을 기억하지 않길 바라십니까?”
“무슨 말입니까?”
주환은 덤덤하게 물었지만, 그의 심장은 쿵, 하고 떨어졌다. 그 소리가 나리의 귀에도 잡혔다.
“무슨 말이긴요…….”
나리는 주환의 심장 위에 손을 대고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내가 니콜과 그레이슨을 얘기하고 있을 때부터 그의 심장이 이렇게 불안하게 뛰고 있는걸.
“10년 전 얘기를 나누는 것도 니콜과 그레이슨을 만나는 것도 이렇게 불안해서 싫은 티가 다 들리고 다 보입니다. 유일한 소령님도 그러시던데…….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야…….”
“제가 예전에 최강 대령님과 사귀어서 그렇습니까?”
“……!”
주환이 뚝 굳어 버렸다. 온몸에 신경이 곤두서면서 나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무리 그녀를 훑어보아도 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만, 제가 언제 알았는지도 중요합니까?”
“…….”
주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그래서 지금 네 마음이 어떤지가 더 중요했다.
“박주환 소령님.”
주환의 가슴 위에 손을 대고 있던 나리의 손끝이 반듯하게 주름 하나 없는 주환의 제복을 확 움켜잡았다.
“군인의 책임감과 사명, 박주환 소령님만 중요한 거 아닙니다. 의리 하면 이나리인데…… 저더러 전 부대원의 생사가 달렸으니, 첫 전투부터 여태까지 같이 생지옥을 헤쳐 나온 상관을 배신하라고 하신 건 박 소령님이십니다.”
“저도 제 부하와 이 중사를 지키려고 내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이 중사가 최강 대령 밑에 계속 있게 되면, 윤소민 대위도 이 중사도 위험했을 겁니다.”
“그리고, 눈엣가시 같은 최강도 처리할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하셨겠죠.”
“이 중사도 최 대령이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 최강 대령이 신경 쓰여서 가이딩도 거부하고, 대체 이 중사는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 겁니까?”
“…….”
“…….”
나리와 주환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손안에 그려지는 그의 본심과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파장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기나긴 몇 초가 지나서야, 나리는 주환의 옷을 움켜쥔 손에 힘을 놓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도 제가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박주환 가이드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쿵, 하고 주환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박 소령님은 일하는 데, 제 마음이 꼭 필요하십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주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왔다. 그가 울컥 차오른 감정과 함께 한숨을 토해 냈다.
가지 마, 그러지 마.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기만 하던 주환이 자신을 밀어내지 말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나리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이나리 씨의 가이드인데…… 당신 파장에 실린 감정이 그대로 다 내게 흘러들어 오는데, 나리 씨가 나를 봐 주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적어도 가이딩할 때만큼은 가이드에게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난 이 중사와 페어가 된 후부터, 이 일을 일이라고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이 중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랬지.
주환이 손만 잡아 줘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빨개지고, 곁에서 느껴지는 그의 청량한 가이딩에 팔랑팔랑 나비 날갯짓처럼 기분이 오르내렸었는데. 그 작은 설렘과 행복이 꽁꽁 감춰진 기억을 꺼낼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아서 나리는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계속 모른 척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을 알았다고 강에게 말해 주지도 못하고 죽어 가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유 소령님과 박 소령님은 내가 기억을 잃은 채 살길 바라는 걸까. 내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아서?
나리는 주환의 손등에서부터 팔목, 팔뚝과 어깨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박주환 소령님 손이 닿을 때마다, 안겨서 키스할 때마다 속이 간지럽고 묘한 기분이 들죠. 이게 박 소령님이 좋아서 그랬던 건지, 가이딩 때문인 건지, 분간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이성을 놓고 그 좋은 기분에 휩쓸리다 보면, 내가 널 이만큼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누군가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요.”
그가 조심스럽게 나리를 붙잡은 거처럼, 나리도 살포시 그의 팔을 내려놓았다. 툭, 떨어진 주환의 손이 무겁게 흔들렸다.
“처음엔 박 소령님이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
“…….”
“그냥, 박 소령님의 마음이라고 치고 싶었죠. 그런데…….”
나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페어의 가이딩에 끌리는 게 맞을 거라며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강이 왜 내게만 이러는지, 자꾸만 신경 쓰이고 화가 나게 만들고, 그리고 내버려 둘 수 없게 되는걸…….
길게 늘어졌던 붉은 태양이 완전히 지고 검푸른 밤이 내렸다. 가로등 하나가 두 사람의 주위를 밝혔다.
주환이 나리의 턱을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안타깝고도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동자가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쌀쌀한 밤바람을 타고 주환의 뺨에 스치는 나리의 울림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어서, 주환은 나리의 눈가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만 숙실로 돌아갑시다.”
에스퍼의 목줄을 잡은 건 가이드라는 말이 불변의 진리일 리 없다. 고집쟁이에 예민한 제 에스퍼가 죽기를 각오하는데, 저 위태로운 사람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나.
〈강 때문에 나리 중사를 노리는 세력이 많습니다. 박 소령이 군 상부, 어느 분의 지령을 받고 나리 중사에게 접근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리 중사의 페어로 있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쁜 에스퍼 하나 꼬셔서 재미 보자,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페어 등록하실 거라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거든요. 앞으로 저희를 감당하실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다른 에스퍼를 알아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부디, 나리 중사를 봐서라도 한 번 더 고려하고, 양심적인 선택을 하길 부탁합니다.〉
유일한, 그 녀석은 어떻게 이나리의 파장에 동감하면서 10년을 버텼던 걸까.
역시, 그 여우가 제일 짜증 나는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