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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07)화 (10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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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감정적 교류

연구원은 한숨을 내쉬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잔뜩 긴장해 허리춤에 찬 가스총과 테이저를 꺼내 들려던 사람들도 덩달아 안도하며 손을 내렸다.

결괏값에 항의를 한 에스퍼는 본 적이 있어도, 저렇게 무섭게 화를 내는 가이드는 드물었다. 그의 페어가 공격형 어빌리티가 없다 하더라도, 주환은 위압감을 풍기는 체격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남자였다.

“다들 멍하니 뭐 해!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건지, 기기에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실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저 두 사람 문제인 건지……. 알아내야지. 일해! 일!”

책임 연구원의 큰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주환은 워치에 표시된 나리의 위치를 크게 확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구조도만 보면 별관이 아닌, 연합군의 숙사였다. 잠깐 사이에 길을 잃은 걸까. 아니면 설마 다른 가이드한테…….

“이 중사, 지금 어디 있습니까?”

주환은 거의 뛰다시피 걸으면서 물었다.

- 우연히 오래전에 같이 싸웠던 페어를 만나서 같이 있습니다.

나리의 목소리 뒤로 왁자지껄한 외국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 누구야? 나리 페어야?

- 나리 가이드, 누군지 얼굴 좀 봐야지. 우리한테도 소개해 줘.

- 그래. 이리 오라고 해!

“하아.”

불안하게 뛰던 가슴속에서부터 한숨이 길게 나왔다. 주환은 걸음을 멈추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고 그 사람이 머무는 숙사까지 따라가다니. 빨리 가서 나리를 데리고 와야 했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주환은 단추를 잠그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몇 초간 외국인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리는가 싶더니, 나리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통신을 끊었다.

- 예, 알겠습니다.

“…….”

단조로운 말 한마디에 실린 나리의 지친 감정이 그의 귓가에서 머리로 전해졌다.

다른 페어들도 이런 과정을 겪는 걸까, 아니면 나만 유독 이렇게 힘든 걸까. 에스퍼를 더 깊이 이해해 주고 감정적인 교류를 하라니, 여기서 더 어떻게 말인가.

이나리는, 처음부터 강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 ❖ ❖

“까, 깜짝이야. 에스퍼인 줄 알았네!”

주환을 마주한 그레이슨의 첫마디는 ‘처음 뵈어 반갑습니다.’가 아니었다. 에스퍼 중에서도 헤비급 체격을 자랑하고 다니는 그레이슨도 주환을 보자마자 덜컥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직접 전투에 뛰는 가이드 중에서 저런 남자가 있었나?

“중사 이나리 에스퍼의 페어 가이드, 박주환 소령입니다.”

주환이 말했다.

니콜은 그레이슨을 밀치고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 난, 니콜 머빈스다. 여긴 내 페어 중 한 명인 그레이슨 워킨 중위.”

그녀는 따로 길게 소개하지 않아도 니콜 머빈스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한 사람이었다. 미 해병대에 소속되었던 S급 가이드, 세계 곳곳의 균열을 파쇄하고 진압한 탑 랭커인 그녀가 전역한 뒤 용병이 되었다는 일로 떠들썩했었으니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머빈스 소령.”

“내가 군복 벗은 지가 언젠데, 이제 소령 아닙니다? 하하. 딱딱하게 굴지 말고 주환도 앉아! 오늘 밤은 다 같이 마십시다!”

마시다니……?

이제 막 저녁 시간 아니던가.

니콜은 주환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고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혔다. 니콜에게서 싸한 술 냄새가 올라왔다.

나리는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물 잔을 꿀꺽 비우더니, 헤실헤실 웃으며 술을 따라 주환에게 내밀었다.

“10년 만에 만난 사람들이에요. 박 소령님도 괜찮으시다면 같이 한잔하십시오.”

“이 중사, 내일 테스트 있는 건 기억하십니까? 벌써 이렇게 많이 마시면 어떡합니까.”

“저 아직 한 잔밖에 안 마셨습니다?”

나리는 오늘은 작정하고 달릴 거라는 의지를 불태우며 주환을 쏘아보더니, 마른안주를 집어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니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했다.

“테스트라니, 무슨 테스트? 나리 어디 아파?”

“내일 매칭 테스트가 있습니다.”

“매칭 테스트는 알코올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나?”

“저와 단둘이 할 얘기가 많아서 말입니다.”

주환이 니콜의 팔을 거두고 나리를 일으켜 세웠다.

“갑시다. 이 중사.”

“……아, 지금 말입니까?”

이제 좀 더 이야기해 보려고 했는데, 벌써?

나리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니콜과 그레이슨을 흘끗 돌아보았다. 주환은 아무 말 없이 가이딩을 흘리며 나리의 팔을 한 번 더 잡아당겼다.

“알겠습니다…….”

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술기운이 돈 김에 나리의 상황을 물어보려던 니콜과 그레이슨도 당황한 듯이 주환과 나리를 쳐다보았다.

말려야 하나, 니콜은 입술을 질끈 다물었다. 나서고 싶지만 다른 나라 군인이고, 남의 페어였다.

“아니,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죽은 줄 알았던 전우가 반가워서 그런 건데. 그러지 말고 주환도 같이 마십시다.”

니콜은 그레이슨의 옆구리를 콕 찌르고, 나리의 뒷주머니에 쪽지를 찔러 넣었다.

“그레이슨, 둘이 바쁘다잖아. 술은 다음에 또 시간 내서 마시면 되지.”

그러고는 나리의 등을 툭툭 치면서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렇지, 나리?”

나리는 니콜을 돌아보며 살포시 웃었다.

“네. 니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하겠습니다.”

“언제든 환영이야. 내 귀여운 아기 고양이 씨.”

니콜은 주환을 쏘아보면서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힘내, 나리. 내가 전에 했던 프러포즈는 아직도 변함없으니까 말이야.”

“……?”

순간, 주환의 무뚝뚝한 눈이 사납게 빛났다. 나리는 활활 달아오르는 주환의 가이딩에 퍼뜩 놀라며, 니콜에게 그러지 말라고 오리 입술이 되어 툴툴댔다.

“전 그레이슨 중위님이랑 엮이기 싫대도요!”

“그럼, 되도록 빨리 그레이슨을 정리할게.”

“뭐라고? 이 애송이가……!”

그레이슨의 파장이 확 퍼지면서 건물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주환은 나리를 제 품에 끌어안고 그레이슨의 파장을 막았다. 시원한 숲 향기처럼 불어온 주환의 가이딩에 덜그럭거리던 지진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저 여자, 일부러 도발한 게 분명했다.

제 페어의 파장을 진정하기는커녕 화를 돋운 니콜을 보면서 주환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이를 세웠다.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거린 뒤, 주환은 나리를 데리고 서둘러 숙실을 나갔다.

10년 동안 페어 가이드 하나 없었다면서. 나리 주변엔 왜 이렇게 대단한 가이드들이 맴도는 건가.

유일한도 그렇고, 이번엔 월드 클래스 S급 용병이라니……!

❖ ❖ ❖

“박 소령님, 숨 막힙니다.”

주환의 품에 얼굴이 묻힌 나리가 웅얼거렸다. 급히 들이켠 술로 머리가 아팠고, 가이딩 때문에 온 세상이 물 위를 걷듯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나리는 주환을 밀어내고 코밑을 쓱 쓸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누군가의 파장과 냄새가 거슬렸다.

“볼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나 지금 정확하게 또박또박 말하고 있는 게 맞겠지?

나리가 정신 멀쩡한 것처럼 굴어도,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주환의 시선에 얼굴은 붉어지고 혀는 더 느려졌다.

“네. 끝났습니다.”

“실험, 빨리 끝나셨네요. 제게 전달 사항만 말씀해 주시면 푹 쉬실 수 있으시겠습니다.”

나리는 생긋 웃으면서 주환이 어서 용건을 말하길 기다렸다. 주환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헤실대며 비틀거리는 나리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여기서 말할 사항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 숙실로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우리 숙실…….”

나리가 작게 웅얼거렸다.

그녀는 주환에게 빨리 용건만 전달받고 다시 니콜과 그레이슨에게 돌아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자신이 강과 일한에게 연락할 방법은 있는지, 혹시 인도네시아 작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던 건지, C15의 균열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강을 구할 수 있을지…… 할 이야기가 너무너무 많단 말이야.

마음이 울렁거리며 터질 듯이 요동치는데, 자신의 몸을 휘감는 주환의 가이딩은 덥고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피부 속으로 스며들 곳을 찾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리는 팔뚝을 쓸어 내고 몸을 움츠리며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숙실로 돌아가면 서로 대화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만?”

“…….”

그의 검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질투심이 그대로 나리의 눈에 읽혔다.

“저는 술을 마셨고, 소령님은 머리를 식혀야 할 거 같으니…… 잠시 걷는 건 어떻습니까?”

나리의 제안에 주환이 눈꺼풀을 반쯤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걸음, 앞서 걷는 나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가득히 쌓인 말은 많은데, 앞뒤로 흔들거리는 나리의 손만 눈에 들어올 뿐 당최 입이 열리지 않는 주환이었다.

붉게 저무는 석양을 등지고 기지 내 건물들 사이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파도 소리, 바다 내음, 얼굴에 스치는 습한 염분, 여태껏 봐 왔던 풍경도 다르고 공기도 다른데 두 사람의 입에서는 그 뻔한 날씨 얘기조차 나오지 않는다.

먼저 말을 시작한 사람은 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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