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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06)화 (10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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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정말 그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네 워치, 지금 상황을 도청하고 있나?

“…….”

아마도.

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레이슨의 발을 툭 걷어차면서 손을 휘저었다.

“그레이슨, 난 신경 쓰지 말고 말해 봐.”

“뭐? 뭘?”

“뭐든, 아무거나! 최근 새긴 타투든, 신입 가이드에게 작업 걸다가 나한테 걸려서 죽을 뻔했던 거든.”

“니콜! 내가 꼬시기는 누굴 꼬셨냐? 도, 도와준 거라니까? 신입이 헤매는데 선임이 일을 가르쳐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때 좀 손이 닿을 수도 있는 거고, 팔이 스칠 수도 있는 거고. 어?”

그레이슨이 억울함을 토로하는 동안, 니콜은 수첩 속에 그녀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강과 사귀었던 것은 기억나나?

아니요.

나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랐었는데, 지금 막…….

지금 막 뭔가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라, 혼란스러웠다.

몰랐다고? 그런데도 강이 아무 말이 없었어?

나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가만히 생각에 빠지고는 썩은 표정이 되었다.

아무 말도 없긴, ‘뇌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에서부터 ‘정신을 어디에다가 두고 나왔냐.’,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등등 갖은 구박을 다 받으며 이리저리 개처럼 굴렀다.

허?

그래서, 대령님께서 날 굴린 건가?

아무리 내가 전 여자 친구라도 그렇지, 사고로 기억 좀 잃은 거 가지고 10년 동안 주야장천 뭐라고 해?

나리는 술잔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 개색히를……. 내가 진짜…….”

니콜은 부들부들 떠는 나리를 보며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그거참 이상하네.

최강이 누구인가?

자기를 좀 쳐다보는 것도 닳는다고 으르렁대는 데다, 매사 좋고 싫고가 분명한 싸가지였다. 그런 그가 제 애인이 기억을 잃었음에도 그대로 곁에 두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나리도 내심 강과 일한이 자신에게 숨긴 것이 있다고 짐작하는 걸 보니 세 사람의 치정 싸움 때문은 아닌 거 같고.

니콜은 팔짱을 끼고 펜 끝을 입에 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리는 머리를 쥐고 끙끙거리면서 씩씩대다가, 몇 초간 멍하니 있더니, 그레이슨의 말에 딴지를 걸며 또 헤실헤실 웃었다.

“거봐요. 그레이슨 중위님. 니콜같이 눈이 높은 가이드가 옆에 있는 걸 감사해하며 평소 행실에 조심하셨어야죠!”

“하아…….”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건 가이딩 문제가 아니라, 정신계 에스퍼의 기억 조작 어빌리티, 프로그래밍이었다. 정신계 에스퍼가 포로들이 있던 고문실로 들어가 적진에 돌려보내는 포로와 위험한 작전에 말려들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일반인들, 그리고 모종의 사건 증인들의 기억을 조작하던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골치 아프게 윗선에서 이나리를 건드리다니.

니콜은 혀를 찼다.

나리가 왜 저런 워치를 차고 괌까지 떠내려 왔을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실패한 C15 균열 파쇄 작전을 재개하는 건 또 뭐고……. 일이 돌아가는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어휴, 나도 이 시간에 술을 마실 수밖에 없네! 다들, 빨리 원샷해!”

니콜이 버럭 화를 내며 술잔을 부딪치자 그레이슨이 나리와 말싸움하려다 말고 니콜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 뭐야, 뭔데……. 니콜, 나 때문에 그래?”

니콜은 그레이슨을 밀치고 다시 펜을 들었다.

나리. 그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나리는 수첩을 보고 몇 초간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네가?

나리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검지로 수첩 위에 휘적인 단어 하나를 가리켰다.

강이 죽는다는 말에 니콜과 그레이슨이 우뚝 멈췄다. 나리는 빈 술잔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하하, 정말 하늘이 도우셨지, 여기서 니콜과 그레이슨을 만날 줄은 전혀 몰랐어요. 두 분이랑 옛날 얘기 하니까, 그때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르지 뭡니까? 정말 철부지 애들 팀에서 팀장 된 니콜 보고 사람들이 보모냐고 놀리기도 했는데. 그쵸?”

“그랬지…….”

나리는 깨끗하게 비워진 니콜의 잔에 술을 따르고, 펜을 들었다.

“저는 연합군이 C15 균열을 닫는 황혼 작전에 투입된다고 들었는데, 두 분도 한국으로 출정하십니까?”

도와주세요. 저는 지금 최강 대령님, 유 소령님 두 분께 연락할 수 없어요.

그레이슨은 테이블을 쿵 하고 내리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그쪽에 너랑 최강과 유일한이 있어도 파쇄 실패한 균열이잖아? 10년 전 인도네시아 때에도 우리 덕이 컸다고! 오랫동안 묵힌 균열을 최강 페어가 단독으로 뭘 할 수 있겠어?”

“나도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대략적인 브리핑밖에 듣지 못했지만, 출정하는 건 확실해. 나리, 한국에 SS급 가이드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네.”

“와우, 베테랑 니콜과 일한을 뛰어넘는 SS급 신인 가이드라니……!”

그레이슨이 턱을 매만지며 쓰읍 입맛을 다시자, 니콜이 그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또, 또! 하여간! 이놈의 바람둥이를!”

“어어? 문어발 니콜 머빈스가 나한테 바람둥이라니! 이게 말이 돼? 네가 세컨드, 서드 걸친 적이 한두 번이야?”

“가이드는 그래도 돼. 5년 전부터 합법이잖아.”

“허, 헐……! 뭐? 나리, 들었어?”

그레이슨이 두 눈을 튀어나올 듯이 뜨고는 이거 보라며 나리에게 일렀다. 나리가 취기에 비틀거리며 하하 웃어 대는 때, 그녀의 워치가 삐삑 울렸다.

- 이 중사, 지금 어디 있습니까?

주환이었다.

❖ ❖ ❖

주환은 실험이 끝나자마자, 검진 케이블을 잡아 던지고 검사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가 넓은 보폭으로 복도를 가로지를 때마다 단추를 다 못 채운 제복 상의가 펄럭거렸다.

“박주환 소령!”

검사실로 향하던 연구원과 연합군 소속 군인들이 주환을 멈춰 세웠지만, 주환은 그들을 밀치고 그대로 테스트 통제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여긴 관계자 외 통제 구역입니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무력으로…….”

주환의 앞을 가로막은 연구원은 그의 크고 단단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위압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주환은 냉담하게 연구원을 내려다보며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갔다.

“제가 관계자가 아니면 뭡니까?”

“그…….”

연구원은 입을 벙긋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주환을 제외한 특이 발현자 대부분은 자신이 오랜 연구와 실험의 결과로 이능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 주환을 잘 달래서 보내지 않으면 후일이 더 곤란해지리라.

“오, 오늘 실험 결과는 내일 오전까지 박 소령에게 전달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협조해 주십시오.”

“전 지금 봐야겠습니다.”

주환은 연구원을 밀치고 그가 등 뒤로 가리고 있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Esp 파장 수치와 매칭률 기록을 훑는 주환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

곧고 우직하던 그의 눈동자가 한자리를 계속 맴돌며 흔들렸다. 몇 번이고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는 결과에 주환은 다른 사람들의 기록 파일까지 열려고 했다.

“바, 박주환 소령. 이러면 안 됩니다!”

연구원이 몸을 던져 주환을 막았다. 주환은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따졌다.

“넉 달 전 제 첫 매칭 테스트 결과는 89%였습니다. 그런데 매칭률 22%이라니,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전 이나리 에스퍼의 파장에 맞게 발현된 게 아니었습니까?”

지나가는 에스퍼 아무나 잡고 매칭률을 재 봐도 평균 30에서 40%는 나온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 이하값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시스템 문제인지 살펴봐야겠지만……. 그, 그게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내일 다시 재 보자고 한 겁니다.”

“제가 지금 당장 이 중사를 데려오겠습니다.”

주환이 워치를 켜고 나리에게 통신하려고 했다. 워치로 페어의 위치를 확인한 주환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자신의 숙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할 나리가 다른 건물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박주환 소령. 생체 파장 책임 연구원으로 17년이나 복무한 저도 이렇게 짧은 시일 내에 매칭률이 뚝 떨어진 건 처음 보지만……. 본래 매칭률은 매번 변합니다. 이런 변동 현상이 에스퍼와 가이드의 감정적 교류에 원인이 있다는 연구 논문도 있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주환은 미간을 찡그리며 연구원을 쏘아보았다.

“감정적 교류? 그 말씀은 지금 이 사태의 원인이 저와 이 중사 사이에 감정적 교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주환이 불쾌한 기색을 띠며 되묻자, 연구원은 미끄러진 안경을 끌어 올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에스퍼의 파장은 에스퍼의 기분에 따라 매일 조금씩 변합니다. 본래 예민한 사람들이니까,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많고……. 가이드의 가이딩은 에스퍼의 파장에 맞춰서 몸과 정신에 스트레스를 주는 오감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건데, 가이드가 에스퍼의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변하는 파장에 공감하지 못하면 당연히 매칭률 수치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제 가이딩이 문제라는 겁니까?”

“아니, 그렇다고 이게 가이드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가이딩을 피해 파장을 가둬 버리는 에스퍼들도 있습니다. 케이스마다 달라 뭐라 딱 짚어 드릴 수는 없지만, 오늘 이 상태로는 테스트를 진행해 봤자 나을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페어 간의 감정적인 이해와 교류의 시간 좀 가지십시오. 싸운 게 있다면 잘 푸시고.”

“…….”

주환의 머릿속에 나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자신의 가이드를 찾았다고 어린애처럼 신나 하던 나리가 정중하고도 조심스레 악수를 청하던 모습이, 귀가 붉어진 채로 다른 에스퍼는 다 짐승이라고 제 손을 잡아 이끌던 뒷모습도, 미안하지만 자기한테 오면 안 되겠냐며 살포시 입을 맞추던 일, 납득 가게 설명해 주며 달랬는데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키지 않아 보이던 씁쓸한 표정까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돌아가는 주환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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