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어떤 에스퍼가 감히 우리 아기 고양이를 건드렸어? 누구야!
[니콜, 자요?]
[왜? 아기 고양이.]
[저어,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상담? 연애 상담?]
[솔로인 에스퍼가 페어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랑 사귀는 건…… 좀 그렇죠?]
[뭐? 가이드도 아닌 에스퍼가 감히 우리 아기 고양이를 건드렸어? 누구야!]
[역시 아닌 거 같네요. 이번에도 매칭 테스트 결과가 안 좋고……. 에효.]
[나리, 이 세상엔 나처럼 사랑이 넘치는 가이드가 많아. 제발 에스퍼한테 혹하지 말고 좋은 가이드를 만나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미래를 그리길 바라.]
[Yes, Ma’am!]
[대답은 그렇게 잘하면서 어떻게 가이드 하나를 꼬시지 못해? 성인이 된 기념으로 화끈해질 거라면서!]
[후, 훈련이 너무 바쁘고 이런저런 사정이…….]
[흐음. 유일한은 요즘 어때? 걔도 나쁘지 않은데. 여러 에스퍼 울리게 생긴 건 둘째 치고! 최강, 그 녀석 때문에 문제인 거지? 그 야박한 최강 싸가지 녀석!]
[하하. 그렇죠.]
[그래서 우리 아기 고양이 마음을 흔드는 에스퍼는 누군데? 잘생겼어? 사진 있어?]
[^^]
[……설마, 그 에스퍼, SS급은 아니지?]
[*Nari와의 통신 연결이 종료되었습니다.*]
[이나리 이병! 최강은 절대 반대야! 안 돼! 내가 안 된다고 했다?]
“…….”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나리가 덜덜 떨리는 손을 툭 떨어트렸다.
저 메시지를 주고받은 날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같은 숙실을 쓰던 2명의 에스퍼가 뒤척거리며 코를 고는 소리, 머리 위로 뒤집어쓴 이불의 색깔과 감촉, 포근한 냄새와 더불어.
〈이나리, 안 자는 거 알아. 나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자, 순식간에 창밖으로 툭 떨어졌다.
심장도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영원히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뚝, 멈추고 나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강이 픽 웃으면서 나리의 젖은 머리를 흩트렸다.
〈샴푸 바꿨어? 저번에 쓰던 거 냄새 좋던데.〉
“나리, 나리? 괜찮아? 물 좀 줄까?”
니콜이 나리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놀랜 파장을 진정시켰다. 회상에서 깨어난 나리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레이슨은 물컵을 밀어 주며 혀를 찼다. 나리와 서로 티격태격 부딪히기만 해서 다시는 보지 말자며 헤어졌지만,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걸어가던 나리를 부대 내에서 볼 거라고 예상 못 했었다.
나리의 숨소리가 고르게 진정되자,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레이슨이 의자를 가까이 끌어왔다.
“나리,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합군까지는 무슨 일로 온 거고?”
겹겹이 쌓여 있던 나리의 단단한 파장을 토닥토닥 녹여 주던 니콜도 손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한국의 옛 비무장지대 부근 C15 균열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C15를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그 균열 때문에 나라 하나 멸망한다고, 한국 수도도 옮겼잖아?”
“몬스터가 몰려 들어와서 도시 하나 초토화되고……. 끔찍했지. 15살짜리 SS급이 막았다고 하더니, 그 유명한 SS급이랑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한 팀에서 뛸 줄 알았겠냐고. 하하하!”
그래. 나도 그 유명한 SS급 에스퍼랑 10년 넘게 같은 팀이 될 줄 몰랐었지.
강이 C9 구역을 진압했을 때, 어느 매체를 틀어도 강이 나왔었다. 연구소에서 나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장면까지 생중계될 정도였으니까.
이능력자에 대해서 별 관심도 없던 꼬꼬마 이나리는 에스퍼로 발현되고 나서야, 그 떠들썩하던 강과 일한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사관학교 생도가 되어 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밤마다 시시덕거리면서 어둠의 익명 게시판을 훑다가 강의 팬 사이트도 들어가 봤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랬는데, 사관학교는 무슨.
훈련 10주 차, 고등학생이 해외 파병 길에 오를 줄이야.
“예. S급 인도네시아 리아우 균열을 파쇄한 뒤에, 한국군도 C15 균열도 닫아 보겠다고 했었는데…….”
나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뚝, 멈춰 버렸다.
“으으.”
그러고는 이내 퀭하게 어두워진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고통을 삼키고 머리를 쥐어뜯던 나리가 그레이슨이 건넨 물 잔은 두고 술잔을 집어 들더니 럼을 가득 채워 꿀꺽꿀꺽 들이켰다.
“……!”
“……!”
나리의 고개가 젖혀지고 술잔의 반 이상이 비워져 가자, 니콜과 그레이슨의 턱이 툭 떨어졌다.
“그, 그만!”
“나리, 슬로우 다운!”
니콜이 나리의 팔을 붙잡았고 그레이슨이 나리의 술잔을 빼앗았다.
매번 욕하던 고집 센 변덕쟁이이자 최악의 상사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말도 믿기지 않았었다.
저놈의 고약한 성질머리를 받아 주려면 성자의 인류애와 하해와 같은 인내심을 가진 백의의 천사님, 아니면 정말 금사빠에 머리가 텅텅 빈 백치가 아닐까. 나야 최애캐라서 잠시 좋아했던 거지, 어휴……. 하고 속으로 안도하고 혀를 차며 대령님 여자 친구분의 명복을 빌며 구시렁거렸는데.
그 업보 많은 백의의 백치가 나였었네?
〈샴푸 바꿨어? 저번에 쓰던 거 냄새 좋던데.〉
하고 세상 다정하게 웃는 강이라니…….
이건 정말 소설 속, 아니면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날 밤 울리던 잔잔한 벌레 울음소리와 선선한 숲 내음, 살결에 닿는 따뜻한 온기, 부드러운 촉감, 가슴 가득히 차오르던 설렘과 두둥실 올라가던 입매까지.
나리는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이내 머릿속을 콕콕 찌르던 두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강의 얼굴을 일그러트릴 정도로 심하게 죄어 왔다.
“으으!”
나리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짚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던 검은 수면은 어느새 발을 적시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물밀듯이 나리에게 몰려들었다. 너무 간지러워 자꾸 웃음이 새 나가던 감정, 숨길 수 없었던 행복, 이대로 마냥 괜찮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우리는 어떤 시련이 닥쳐도 다 이길 수만 있을 거 같았다.
그랬었다. 그랬었는데…….
나리는 그 행복이 깨지던 순간까지 들여다보기가 두려워졌다.
자신의 눈앞에 놓인 얼음물과 미지근한 술잔.
과연 이 현실을 확 자각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술에 취해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까.
나리는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채우고 맛도 느낄 새 없이 꿀꺽 들이켰다.
미지근한 술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달달한 술이 식도를 홧홧하게 긁으며 불을 일으켰다.
“콜록콜록! 와! 이 술 세다. 콜록!”
“윽! 그걸 갑자기 원샷하면 어떡하냐! 이 대책 없는 애송이 같으니. 입 가려, 술 냄새 나잖아!”
그레이슨이 콧잔등을 잡고 손부채를 흔들어 댔다. 니콜은 기침해 대는 나리의 등을 쓸어 주면서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그때 한국 C15 균열 파쇄 작전을 들었어. 3차까지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그 이후로 너에게 연락이 없어서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니까.”
“3차요? 3차는 무슨…….”
나리는 제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당황해 토끼 눈을 끔벅였다.
왜 목이 울컥 메어 오는지 모르겠다.
“죽다 살아나긴 했죠. 그때 머리를 크게 다쳐서 기억을 잃었거든요.”
두통이 가셨는지 나리는 취한 듯이 헤헤 웃으며 니콜에게 말했다.
“그때 니콜과 그레이슨 하사님은 바쁘셨죠? 아니지, 이제 중위님이시지. 루테넌 그레이슨…….”
니콜은 헤실헤실 얼굴이 붉어지는 나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나리에게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긴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가이딩? 이게 정말 가이딩 때문일까?
니콜이 나리의 머리에 손을 뻗으려는 때에, 그레이슨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신의 계급장, 그리고 팔뚝과 어깨에 남은 영광스러운 흉터와 타투를 자랑스럽게 들이밀었다.
“너만 죽다 살아났나? 땅만 디디면 되는 육군으로 간 너희보다 우리 해병대는 육지, 바다, 해공. 매 순간이 지옥이라고! 봐! 이건 바하마 위험 구역에서, 이건 하와이. 그리고 이거 보여? 팔이 반 이상 잘려서 덜렁거렸었다고!”
나리는 우락부락 키운 그레이슨의 팔뚝 위에 그려진 타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세상에 아주 깔끔하게 치료가 되는데, 뭐 하러 흉터 타투를 남기십니까? 루테넌 그레이슨은 허세 찬 꼰대다, 하고 자랑하시는 겁니까? 전장에서 안 죽을 뻔한 에스퍼가 어딨다고…….”
“뭐엇! 이 애송이가!”
티격태격하는 두 에스퍼를 두고 가만히 생각하던 니콜이 술을 넘기고 탁탁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 시끄럽다!”
나리와 그레이슨은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쏘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낀 니콜의 가이딩이 찌릿찌릿하게 다가와 얼굴과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나리.”
“예! 중사, 이나리.”
“C15 균열 파쇄 작전, 그때가 아득한 10년 전이야. 너도 치료받으면 충분히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왜 안 받은 거야? 전투 중에 워치가 파손됐거나 잃어버렸다고 해도 새 워치에 내 연락처가 그대로 다운로드될 텐데 연락해 볼 생각은 안 했어? 이상하네.”
“아, 그게……. 최근까지 전 제가 세기말 멸망물 소설 속에 빙의된 줄로만 알고…….”
“……?”
“소설? 빙의? 니콜, 빙의가 뭐야?”
니콜은 한숨을 푹 내리쉬며 그레이슨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러고는 나리의 손목을 잡고 워치를 톡 건드렸다.
누가 봐도 흠집 하나 없는 새 워치였다.
수신은 되지만 송신은 한 곳으로 제한된 기기. 이음새가 단단하게 맞물려 있는 탓에 틈이 없어 풀 수가 없는 족쇄처럼 보였다.
“…….”
니콜은 으드득 이를 갈더니, 벌떡 일어나 서랍을 뒤적거렸다. 서랍 안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지며 어질러지자 그레이슨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물었다.
“니콜, 뭘 찾는 거야?”
“…….”
니콜은 꼬깃꼬깃한 수첩과 펜을 가지고 와서 휘적휘적 적기 시작했다.
네 워치, 지금 상황을 도청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