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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04)화 (10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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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우린 네가 죽은 줄 알았었다고!

메어 오는 목구멍으로 쓰디쓴 침을 삼키며 바닥만 보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의 발이 나리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오른쪽으로 비켜서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면 그도 왼쪽으로 움직였다.

“뭡니까?”

나리가 눈에 날을 세우고 자꾸 자신의 길을 막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이야, 와……. 이거 정말 이나리가 맞잖아? 오래간만이야, 애송이 에스퍼.”

“……?”

나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낯선 남자를 쏘아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높은 코, 수염을 기른 남자가 자신의 귀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 기억 안 나? 10년 전에 인도네시아 균열에서 만났었잖아. 너랑 맨날 개와 고양이처럼 싸웠었는데?”

“아.”

나리는 크게 눈을 뜨고 어렴풋하게 떠올랐던 기억을 되짚었다. 당시, 게거품을 물고 진흙탕에 뛰어들어 자신과 싸웠던 그 에스퍼였다.

“그때 그 SS급도 잘 사나? 간간이 소식은 들었는데, 이번에 또 균열 하나 처리할 거라면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원수가 이렇게도 반가울 줄이야!

나리는 그의 계급과 이름을 확인하고는 반갑게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루테넌 그레이슨! 살아 있었습니까!”

❖ ❖ ❖

그레이슨은 큼직한 까만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뺨을 긁적였다. 아무리 오래간만에 만난 전우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말이다.

“저기, 애송이 중사님.”

“예. 그레이슨 중위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아가씨께서 대낮에 다른 나라 군인 숙실까지 졸래졸래 쫓아오는 건 좀 실례 아닌가?”

“숙실에 감춰 둔 기가 막힌 럼 있다고 자랑하신 건 중위님이십니다. 오래간만에 회포를 푸는 데 술이 빠지면 안 된다면서요?”

“어, 어……. 흠! 그, 그렇긴 한데…….”

그레이슨은 당황해하면서 자신의 숙실 문고리를 잡고 머뭇거렸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언제 시간 나면 한잔하자는 말에 지금 당장 마시자며 숙실까지 따라오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리는 외모도, 맹랑하고 엉뚱한 성격까지 그대로였다. 그래서 알아보긴 한 건데, 페어도 있는 애가 제 가이드의 눈에 띄면 좀…… 아니, 많이 곤란하지 않을까.

“그때 그 인도네시아 섬 균열 이후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레이슨 중위님, 이번에 한국 C지역 균열에도 가시는 겁니까?”

그래, 뭐.

에스퍼가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다. 서로 못 본 기간만큼 풀어야 할 회포가 산더미였다. 술과 가이드가 문제랴, 시간이 문제지!

“그건 천천히 밤새워 얘기해 보자고!”

그레이슨은 자신의 방문을 열고 목을 가다듬었다.

“니콜! 나 왔어. 누구랑 같이 왔는지 보면 깜짝 놀랄걸.”

그레이슨이 동그란 이불 뭉치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가이드가 이불 밖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신경질을 부렸다.

“안 궁금하니까, 잠 좀 자게 나가 줘.”

“그러지 말고 인사라도 좀 하라니까. 10년 만에 보는 전우라고.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얼굴이 궁금하지도 않아?”

저쪽에서 페어가 시끄럽게 구는 동안 나리는 그레이슨의 숙실을 둘러보았다.

현상까지 해서 자랑스럽게 벽에 걸어 둔 부대원들의 사진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최근 것부터 오래되어 보이는 것까지.

그리고 그중에서 한 사진이 나리의 눈에 들어왔다. ‘태평양 이능력자 연합군, 인도네시아 리아우 균열 진압 및 격파 기념.’이라고 적힌 문구. 깨알처럼 보이는 얼굴 중에 해맑게 웃고 있는 일한과 까칠하게 눈을 흘기는 강,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뚱하게 정면을 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나리는 그 사진을 들고 한 사람, 한 사람 훑어 나갔다.

“니콜, 그레이슨, 에밀리, 가일, 루이 트란, 히로, 그리고 최강, 일한 생도님…….”

낯설어 보이는 얼굴들의 이름이 나리의 입 밖으로 술술 흘러나왔다.

“뭐! 나리? 그럼 최강이랑 일한은?”

우당탕거리는 큰 소리가 울리면서, 산발한 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가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세, 세상에! 진짜, 나리잖아!”

니콜은 떡 벌어진 입을 가리고 한동안 나리를 이리저리 쳐다보더니, 나리의 뺨을 콕콕 찌르고 쭉 늘어트렸다.

“어떻게 나리는 하나도 안 변할 수가 있는 거지? 진짜 그대로라서 소름 돋아. 죽은 줄 알았던 애가 부활한 거 같잖아. 귀신 아니지?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연락이 끊겼던 거야? 나리,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니콜은 나리를 와락 껴안고 쿵쿵 뛰어다녔다.

“그, 그게 말…….”

안 그래도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리는 와중에, 나리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 크고 단단한 체격인 니콜의 가슴에 묻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그보다 이 언니의 날뛰는 가이딩은 롤러코스터 같아서 멀미 나 죽을 것 같았다.

“니콜, 그러다 애 죽겠어.”

그레이슨이 쩔쩔매며 니콜을 말렸다. 흥분해 얼굴이 발개진 니콜이 나리를 확 떼어 내고 양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어쩜 피부도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고와? 아직도 애기 같잖아. 너 어디서 사무직 뛰었니? 응?”

“아, 아뇨. 여태껏 최전방…….”

“페어는 누구야? 설마, 일한은 아니지? 그 여우 같은 자식이랑 페어 되면 언니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리겠다고 했잖아?”

“에?”

니콜의 손에 양 뺨이 찌그러져 붕어 입술이 된 나리가 동그란 두 눈을 끔벅였다. 다짜고짜 달려든 가이드 때문에 현 상황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내가 그런 약속까지 했었단 말인가.

“다시 만날 때까지 페어 없으면 내 세컨드 하겠다면서. 그래서 현재 페어는?”

니콜의 뒤에 서 있던 그레이슨이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O자를 만들었다.

페어가 있든 없든 무조건 있다고 말하라는 뜻이었다.

“다, 당연히 페어 있습니…….”

“나리 페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미 해병대 출신 섹시 글래머 S급 가이드 니콜 머빈스보다는 별로일 거야. 그렇지?”

이 언니, 너무 막무가내잖아.

“나 보고 싶었어? 안 보고 싶었어? 왜 내 연락에 답장 하나 없었어? 응?”

안해란 중위님은 같은 에스퍼라서 몸으로 장난쳐도 괜찮았지만, 니콜은 가이드였다. 나리는 시속 150km로 들이미는 가이드의 힘에 해롱거리며 붕어 입술을 뻐끔거렸다.

“사,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아…….”

“이나리, 이 발칙한 새끼 고양이. 내가 언제 용서를 빌라 그랬니? 네 페어 누구냐고 물어봤잖아?”

니콜은 나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나리를 쏘아보더니,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누구야? 내 고양이의 페어가 누구길래, 여태까지 안 자고 살려만 둔 건데? 짜증 나네.”

섬뜩하게 날이 선 가이딩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니콜을 쳐다보았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분명히…….”

수면제를 맞기 전 일한과 주환에게 부탁했던 바였다. 자신은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가이딩해 달라고. 그런데 둘 다 자신을 건드리지도 않고 그대로 뒀던 걸까.

“분명히 뭐?”

“아닙니다.”

니콜의 가이딩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던 그레이슨이 선반 아래에 숨겨 놓은 술병을 탁자 위에 툭 놓고 손뼉을 쳤다.

“자자, 할 얘기가 많잖아? 다들 앉아서 한잔부터 하자고.”

그레이슨이 간단한 주전부리를 펴 놓고 술을 따랐다. 하얗게 질린 나리가 쭈뼛거리며 손에 쥐고 있던 액자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니콜의 가이딩 때문일까, 나리는 아직도 속이 울렁거렸다.

“이때가 그립지 않아? 진짜 젊은 피 철부지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던지! 이 많던 대원들 중에 이제 살아남은 사람이 10명도 안 돼. 히로는 3년 전에 폭주가 와서 전사했고. 그나마 트란은 일찍 전역해, 가족 품에서 죽었지. 아내가 일반인이었나, 그랬을 거야.”

니콜이 사진 속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이랑 일한은 워낙 유명하니까 종종 뉴스에서 들어서 알았지만, 나리는 어떻게 되었던 거야? 부대 이동하고 얼마간 잘 지낸다 싶더니, 왜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

“강이랑 일한이 너희 특수부대 장교로 임관됐다고 망명하겠다며 난리 피웠었잖아? 게네가 우리 새끼 고양이 힘들게 했어?”

나리는 사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니콜에게 물었다.

“니콜, 그레이슨. 이 사진 말고 다른 거도 있습니까? 그때 저랑 연락했던 이메일이나 편지는요?”

“찾아보면 있겠지. 왜?”

“저…… 그때의 기억이 없어요.”

“기억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

그레이슨이 놀라서 술잔을 내려놓고 되물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망설이던 나리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거 같은데, 어떤 사고였었는지 자세하게 몰라요. 최강 대령님도 유일한 소령님도 여태까지 제게 별다른 말이 없으셨던 걸 보면…….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 숨기신 것 같습니다.”

나리의 말에 니콜과 그레이슨이 서로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뭐?”

“사고? 최강, 그 싸가지 놈을 확, 그냥! 내가 그 녀석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

니콜은 서둘러 워치를 켜고 자신의 이메일에 나리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리고 곧 10년 전에 파병 간 부대 내에서 찍은 사진, 주고받던 메시지와 메일을 나리에게 보여 주었다.

“…….”

나리는 니콜과 연락했던 메시지를 보면서 벙하니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니콜 중위님, 강 생도님이 임관받자마자 대위 된 거 알아요? 그것도 우리 부대로 발령 났대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

[뭐? 최강이 대위!? 나는 3개월간 치열한 전장을 거쳐 균열까지 닫았건만, 아직까지 진급 심사 중인데. 뭣이라!? 한국은 원래 그래?]

[모르겠습니다. SS급이라 그런가 봐요.]

[나리가 많이 곤란하겠네. 너 귀국하기 전에 강에게 고백하고 차였잖아.]

[그러니까요! 저 전역할까요? 군인 혜택 받으려면 최소 3년 근속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요.]

[이민 와. 언니 아직 싱글이야. 나랑 결혼하면 비자 금방 나올 거야.]

[전 그레이슨 하사님과 엮이기 싫어요.]

자신이 강에게 먼저 고백했다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열흘 후의 메시지는 더욱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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