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03)화 (103/148)

16642776888276.jpg

104. 일적인 관계

주환은 처음 겪는 상황에 눈을 깜박거리며 손을 내렸다. 나리의 안색이 벽처럼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이 중사?”

나리는 주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주위를 흘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에스퍼의 과민 상태는 종종 스스로를 공황에 빠트린다.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낯선 상황에 직면하면 더더욱.

매칭 테스트를 많이 진행해 봤다던 나리가 공황에 빠질 줄은 몰랐던 주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나리, 이나리 중사!”

멍하니 있던 나리가 그제야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중사…… 이나리…….”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나리는 웅얼대면서 주환을 바라보았다.

“이 매칭 테스트를 꼭, 받아야 하는 겁니까?”라는 말이 나리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부의 눈에 거슬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주환이 걱정스레 나리를 쳐다보았다.

“괜찮습니까?”

“아. 네. 괜찮…… 습니다.”

황급히 뭐라고 대답했지만, 나리는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알 수가 없이 숨이 찼다.

예민해진 에스퍼의 오감과 육감이 이 매칭 테스트를 하지 말라 외치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에스퍼가 된 이후로 매칭 테스트를 받고 나서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매칭된 가이드인데, 재검사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안 받아도 되지 않을까…….

주환이 말했다.

“천천히 숨 쉬십시오. 급할 건 없으니까.”

동시에 ‘가이드 새끼들을 믿지 마.’ 하고 강의 목소리가 나리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휘저었다.

“테스트 결과가 어떻든, 저희에게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겁니다. 이 중사의 몸 상태와 매칭률만 재확인하면 됩니다. 그리고 숙실에 가서 쉽시다.”

주환이 나리를 부드럽게 어르면서 손을 내밀었다.

“정말입니까?”

색색거리는 나리의 숨소리 사이로 힘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정말 손만 잡고 매칭률만 보는 겁니까? 금방 끝나요?”

“제 가이딩에 따라 변하는 Esp 파장 수치를 보려는 실험도 있어서 지시에 따라 키스할 수도 있습니다만, 전처럼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실험, 이요?”

“우린 이미 페어이지 않습니까? 키스는 며칠 전에도 이 중사가 사람들 다 보는 데에서도 했었고.”

“…….”

“이 중사?”

“하아, 하, 네, 자, 잠깐만, 하아…….”

주환이 나리의 등을 쓸어 주며 나리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가이딩을 실은 손길에 호흡이 진정되고 옭아맨 파장도 흘러나와야 하건만, 나리는 가이딩 전보다 과민한 상태가 되었다.

- 이 상태에서 테스트를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대기 중인 다른 에스퍼와 먼저 진행해 볼까요?

주환의 인이어로 흘러나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나리의 귀에도 들렸다.

“다른, 에스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리가 주환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아차, 당황한 주환이 나리를 안아 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이 중사가 진정할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주환은 나리가 신경 쓰던 인이어를 빼고 성큼성큼 걸어가 나리를 검사실 중앙에 놓인 소파 위에 눕혔다. 하얗게 질린 나리는 손발이 너무나도 찼다. 그가 나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주물렀다.

“나리 씨.”

주환이 나리를 부르며 그녀의 손을 녹였다.

나리는 쌕쌕 가쁜 숨을 터트리며 바닥에 떨어진 작은 인이어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 안에 있는 작은 스피커를, 그 스피커를 진동시키는 전파를, 그 전파 너머에 있을 수신자를 파헤쳐 버릴 것처럼.

“박 소령님, 다른 에스퍼와 매칭 테스트가 있으셨습니까?”

주환은 나리의 얼굴을 잡고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아닙니다. 이 중사. 매칭 테스트가 아니라, 연합군 공동 연구를 잠깐 도와주는 실험일 뿐입니다.”

웃음기 없는 멍한 얼굴이 주환을 마주했지만, 틀어진 시선은 계속 조그마한 인이어 속 스피커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봐. 이나리. 내가 가이드 놈들한테 정 주지 말랬지.〉

지금이라도 강을 부르면 그가 훌쩍 튀어나와서 제게 틱틱거리며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콧방귀 뀌며 무시했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떠오르며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 공동 연구…….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내가 다른 가이드랑 테스트받는 게 아니라, 박주환 소령님께서 다른 에스퍼와 테스트받는 거였구나……. 그럼, 빨리 끝내고 제가 자리를 비켜 드려야지요…….”

나리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당기며 애써 괜찮은 척 몸을 일으켰다. 나리가 꽁꽁 매었던 파장을 흘렸다.

주환은 검사실 가득 무겁고도 두꺼운 벽을 두르는 나리의 파장에 놀라 나리를 붙잡고 말했다.

“이 중사, 저 사람 말은 무시해.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일단 진정하라고.”

“아, 맞다. 키스…… 해 드려야죠.”

나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주환의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차갑고도 마른 입술이 주환의 입술을 살짝 짓눌렀다가 떨어졌다.

“됐습니까? 제 파장에 변화가 있었나요?”

나리가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심장 부근이 지끈거려서 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끈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몇 초간을 기다려도 인이어에서 대답이 없었다.

“아, 너무 짧았나……? 다시 해 볼까요?”

나리는 주환의 목에 두 팔을 걸었다. 잇새로 살짝 비치는 붉은 혀가 주환의 입가를 훑었다.

“…….”

나리를 진정시키던 주환의 가이딩이 사르르 먼지가 되어 부서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황홀하리만큼 다디달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주환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나리의 키스를 받아 내기만 했다.

나리의 파장을 억지로라도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주환은 오히려 가이딩 한 올도 흘리지 못했다.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리가 울면서 제게 키스하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고 거부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서 억지로 참고 버텨 내다가 울음이 터져 버린 듯했다.

“됐습니다. 이 중사.”

밖에 있는 연구원보다 주환이 나리를 먼저 저지했다.

주환에게서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싫으면 됐으니까 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조차 나리를 슬프게 했다.

눈물범벅이 된 나리가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참는 걸 보는 주환도 가슴이 미어지긴 마찬가지였다.

- 수치가 불안정하여, 내일 다시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이나리 에스퍼는 숙실로 이동해 안정부터 취하십시오.

“…….”

“…….”

검사실을 울리는 지시에도 주환과 나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새하얀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더 단단한 벽을 쌓아 올렸다. 주환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나리를 설득할 수 있을지 머릿속이 복잡했고, 나리는 그저 이 상황을 돌파할 출구가 보이지 않아 막막했다.

나리는 흐릿한 눈을 깜박거리며 제 손목을 붙잡고 놓지를 않는 주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매칭 테스트가 도중에 중단되고 엎어지는 건 나리에게 매번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저 손길이 자신을 제일 밑바닥으로 추락시켰다.

일적인 관계.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는데도 뭐가 이리도 충격적인 건가. 그와 아무리 입을 맞추고 몸을 맞대어도, 같이 훈련하고 같은 임무에 뛰어들어도, 처음부터 박주환의 소속과 일은 자신과 달랐다. 그가 한 번 양보해서 자신의 곁에 조금 더 머물러 준 것뿐.

주환은 힘을 다해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아니다. 의지할 곳이 저 남자뿐이더라도 그는 나리와 같은 편이 아니었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고 눈물이 뚝 말랐다. 나리는 한숨으로 얼굴을 닦아 내었다.

페어라는 이름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던 것이 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만 채우려고 했었던 건데.

“놓아주십시오. 전 숙실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중사. 오해하지 말고…….”

“오해하긴요. 다 일이지 않습니까? 다른 에스퍼가 대기하고 있다고 하니, 전 그만 가서 쉬겠습니다.”

하아.

주환이 나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한숨을 터트렸다. 그녀는 이미 해제하기 힘든 단단한 쉴드를 두르고 있었다.

어렵다. 내 마음을 꺼내서 너한테 보여 주면 날 이해해 줄까. 단단히 토라진 에스퍼에게 말주변 없는 자신이 섭섭하다, 답답하다는 말을 섣불리 꺼낼 수도 없고.

“제가 특이 발현자라서 그렇습니다.”

주환은 자신을 탓하기로 했다.

“제가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다가 가이드로 발현된 거 알게 되었다고 했던 말 기억합니까. 저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이능력자가 있는 가족 중에 발현이 되지 않은 특정인들을 상대로 실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정 에스퍼의 파장을 노출시켜서 그 파장에 유사한 어빌리티를 발현시키거나, 가이딩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전 이 중사의 파장에 맞춰 가이드로 발현한 겁니다. 이번 테스트와 실험이 성공적이라면 가이드 부족 현상도 해결될 거고. 이건 그 경과를 보기 위한 테스트이지, 페어를 바꾼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리가 주환의 손을 놓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간단한 테스트도 망친 페어라서 가이드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남은 볼일 마저 보십시오.”

나리는 몸에 붙인 케이블과 장치들을 떼어 냈다. 몇 번이고 헛손질하며 못 떼어 내던 케이블과 시트를 쥐고 너털너털 검사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군인들에게 넘겼다.

떨림은 가셨지만, 주환에게 잡혔던 손목이 아직도 얼얼했다. 안내를 맡은 연합군 군인의 뒤를 따라가던 나리가 주위를 쓱 훑었다.

“…….”

모두 A급 에스퍼였다.

이 섬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긴 한 걸까.

최강 대령님.

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입 모양으로 그를 불렀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당신을 지킬 수가 있는 거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