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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02)화 (10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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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극한 직업이 따로 없지.

새벽 1시 반, 캄캄한 밤이었다.

드문드문 희미하게 불이 켜진 곳이 있을 뿐, 왁자지껄 붐벼야 할 노점상마다 손님은커녕 주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닫는 휴일을 정한 거라면 몰라도, 노점 가판대마다 낮에 벌여 놓은 물건과 음식들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잠에서 깨지 않는 나리를 업은 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동시에 증발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여기 맞아?〉

강이 앞서가는 주환에게 손전등을 비추며 물었다. 주환은 뒤를 돌아 강을 흘긋 쳐다보더니,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따라오라고?

〈…….〉

강은 영 찝찝했다.

왜 하필이면 J구역이란 말인가. 에스퍼로 발현하기 전 자신의 어린 시절이 뇌리에 스쳤다. 어째서인지 그때보다도 건물과 거리가 더 낙후되어 보였다.

강은 발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죽어 있는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고양이뿐만이 아니었다. 쥐약을 먹은 듯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들개와 쥐. 새까지.

아무리 비가 내렸다 해도 이렇게 조용할 곳이던가, 여기가?

〈최 대령님, 시간이 없습니다.〉

주환이 강을 재촉했다.

그래, 이게 설사 덫이더라도 뭐가 잘못되면 바로 부대로 순간 이동하면 되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교환 장소에 도착했을 때, 소민은 없었다.

지독한 한기가 감도는 지하실을 둘러보던 강이 이를 갈고 주환에게 따지며 순간 이동 하려던 순간, 주환이 끌고 가고 있던 정신계 에스퍼 요원이 갑자기 뒤돌아 강을 덮쳤다.

파앗 하고 강이 함정을 벗어났을 때, 제 품에 있어야 할 나리가 없었다. 부대로 이동할 틈만 노렸지, 그 지하실의 좌표까지 정확히 숙지할 겨를이 없었다.

강과 일한이 다시 J구역으로 이동했을 때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사이 나리와 주환은 빠져나가 버렸는지, 흔적을 추적할 수가 없었다.

잘못 생각했다. 너무 자만했다.

세상은 변수로 가득했다. 강이 아무리 뛰어난 이능력을 가지고 어빌리티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해도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제 사람 하나 지키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이었다.

수백 번을 되짚고 되짚었던 때를 돌아보던 강이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다시 한번, 이동한다.”

일한이 강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어딜 가자고? 또 J구역? 공태형 대령 파장밖에 없었잖아. 비까지 내려서 감지 어빌리티에 걸리는 냄새와 소리도 없었는데, 또 가겠다는 거야?”

일한은 강이 보고 있던 지도 옆에 다른 지도를 꺼내 폈다. 국내 지도가 아닌 오래된 해외 지도였다.

군부대 지하, 자료 보관소에 있던 80년 전의 유물답게 차원의 균열과 전쟁으로 없어진 나라도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고 섬과 산, 해안선도 현재와 정확히 일치하진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이렇게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데 나리 중사와 박주환의 흔적이 없는 걸 보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어.”

강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J구역 어디에서도 나리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면, 주환이 나리를 데리고 갈 만한 곳에 쳐들어가야 했다.

“황현균 대통령이 데리고 있거나 아니면, 해외야.”

현재 일한의 가이딩과 강의 파장이 닿을 수 없는 곳은 최고 권력자의 파장 범위 아니면 해외밖에 없었다.

해외면 양호한가?

남의 나라에 보내기도 아까운 이능력자이니 해저나, 우주에 숨겼을지도 모른다.

“하아, 여기서 제일 가까운 연합군 베이스가 어디지?”

강의 물음에 일한이 지도 위의 섬을 가리켰다.

“해상 기지 쪽이면 필리핀 북해, 그리고 괌. 이 두 군데가 가장 가깝지.”

“…….”

여기서 해외까지 감지 어빌리티를 펼 수는 없었다. 넓은 곳을 감지하는 것만큼 그 정보의 양도 방대했다. 강과 일한이 함께 나선다 한들 그중 나리의 흔적만 선별하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았다.

군의 상부, 혹은 연합군 베이스로 순간 이동 하면 분명 가이드의 감지망에 걸릴 것이다. 붙잡히기 전까지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일한은 손가락 끝을 튕기며 머리를 굴렸다. 어떤 경우의 수를 떠올려 봐도 지금 나리를 찾아 꺼내 오면 감당해야 할 일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사이 강은 브레이크를 걸고 있던 자신의 파장을 열었다.

“강아!”

“윽!”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강이 밀려드는 두통에 크게 휘청거렸다. 일한이 강을 부축하면서 다그쳤다.

“거봐. 내가 뭐라도 먹으라고 했지? 이 상태로 어떻게 싸우려고 그래?”

일한이 강을 붙잡고 가이딩했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강은 화들짝 놀라 일한을 뿌리치고는 허리를 숙여 속을 게워 낼 듯이 기침해 댔다.

“으아……. 미치겠다.”

일한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여태껏 그가 강을 본 중에 가장 최악의 상태였다.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까지 과민하게 반응하니, 뭘 제대로 삼킬 수도 없었다. 일부러 저렇게 파장을 꼭꼭 잠그고 숨겨 가며 상부를 속이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저 상태로 어떻게 나리를 되찾고 C15 균열까지 간단 말인가.

“강아, 뭘 못 먹겠으면 가이딩이라도 받자.”

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한을 쏘아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여차하면 때리겠다는 경고에도 일한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네 상태로 할 수 있는 게 뭐야?”

“…….”

강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일한과 싸워 이길 수도 없다는 걸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강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이마를 짚었다. 악다문 잇새로 들끓는 숨이 새어 나왔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아무리 혼잣말이라도 SS급 에스퍼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나라 하나 폭파하겠다는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위험천만한 발언을 했으니, 아마도 카메라 너머 AI가 벌써 클립을 따서 전 세계 뉴스에 보도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나리가 잘못되면, 너넨 다 죽은 목숨이야.”

긴 손가락 사이로 강의 형형한 눈빛이 번뜩였다.

“그래, 그래……. 나리 중사는 박주환이랑 어딘가에 아주 잘 있을 테니, 너부터 좀 추스르고 나서 박주환을 죽이러 가자고.”

일한은 강의 파장을 천천히 감싸며 조심스럽게 그의 뒤에 섰다. 콰득, 손에 쥔 의자 손잡이가 부서져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일한은 마른침을 삼키고 강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힘 빼고.”

헉, 하고 숨을 참던 강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매칭률이고 뭐고 남들은 다 좋다고 일한에게 덤벼든다는 부드러운 가이딩이었다.

하지만 강은 끔찍하기만 했다. 머릿속으로 일한의 가이딩이 스며들 때마다, 제 몸을 더듬던 끔찍한 손과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성질 같아서는 제 살갗을 다 뜯어내고 죄다 부서트리며 나리를 내놓으라고 악을 쓰고 싶었다.

그 애만이 제 유일한 빛이었다. 지키고 싶은 것도 없었고, 가지고 싶은 것도 없이 증오만 남았던 강의 세상 속에 먼저 손을 내밀어 강을 꺼내 안아 준 사람이었다.

내 빛을 또 앗아 가다니.

“다 죽여 버릴 거야……. 전부 다…….”

일한이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 강의 입을 막았다. 일한의 가이딩이 숨을 따라 폐부까지 들어가자, 강이 일한의 손을 깨물고 팔을 잡아 냅다 메쳤다.

“야야! 가만히! 좀!”

가이딩만 하면 발작하던 강이 이번에도 곱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어휴으. 정말 극한 직업이 따로 없지!”

나리가 강에게 가이딩받으라고 했던 때, 얌전하게 5분을 버틴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일한은 가이딩을 두르고 날뛰는 강에게 달려들었다.

❖ ❖ ❖

하얀색 천장, 하얀색 벽, 그리고 하얀색 바닥.

키가 큰 몬스테라 화분 옆의 작은 탁자와 은은하게 검사실을 밝히는 스탠드 조명, 안락해 보이는 커다란 소파 하나. 아무리 까칠한 에스퍼라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며서, 군부대 안에 있는 검사실 같지 않고 낮잠 자기 좋은 휴식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리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환은 별거 아니다, 괜찮을 거라고만 하고 왜 여기까지 와서 다시 매칭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설마 연합군의 다른 가이드와 매칭되는지도 보려는 걸까. 아니면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면…….

나리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주환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다독여 주어도 마음은 편치 않고 별별 것들이 다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과연 저 하얀 벽 너머로 보고 있을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있을까? 전처럼 주환의 손을 잡으면 컨트롤 리밋이 되는 건 아닐까? 그 전보다 매칭률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온 것도 아닌데 어쩌지?

생각이 많아지면서 나리의 발이 굳어 버렸다.

주환은 벌써 검사 기기를 다 붙이고 검사실 중앙으로 가고 있었다.

“…….”

나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감지 케이블을 묵묵하게 쳐다보았다.

‘또 테스트받고 싶지 않아.’

그녀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연합군 소속의 연구원이 나리의 팔목을 잡고 혈압계와 케이블을 붙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리의 바이탈과 파장 수치가 검사실 화면에 잡히기 시작했다.

나리에게 케이블을 다 붙여 준 연구원이 검사실을 나가자, 주환과 나리 둘만 남게 되었다.

“이 중사, 준비 다 끝났으면 오십시오.”

소파에 걸터앉은 주환이 제 옆자리를 두드리며 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한 가이딩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쭈뼛거리며 한 발을 내딛던 나리가 우뚝 멈췄다. 발이 땅에 박힌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주환을 바라본 채로 굳어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키지 않고 괜찮지 않더라도 해야만 한다.

저 손을 잡는 방법밖에 없다. 강도 없고 일한도 없는 곳에서 의지할 사람은 오로지 저 가이드뿐이라고 속으로 다짐하고 마음을 다스려 보아도 심장은 불안하게 뛰었다.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바닥을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이 중사?”

시간이 지나도 나리가 다가오지 않자, 주환이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환이 차고 있는 인이어에서 연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박주환 소령, 에스퍼의 파장이 안 잡힙니다. 심박수와 산소 포화도, 파장에 브레이크 건 걸 보니, 패닉 상태가 올 거 같은데……. 에스퍼를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 보겠습니까?

패닉?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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