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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01)화 (10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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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후회

극심한 멀미를 일으키는 전투 후, 나리는 괌에 있는 연합군 해군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식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

나리는 눈앞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멀뚱히 보기만 했다. 감자수프와 미트볼 스파게티, 모닝빵, 샐러드에 귀한 과일까지, 나무랄 곳이 없는 제대로 된 한 끼 식사였다.

“이 중사,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지 꽤 되었습니다.”

그랬었나.

하긴, 파장이 오락가락 널을 뛰는 바람에 속이 계속 메슥거려서 뭘 먹어도 다 토했던 거 같다. 나리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환이 기다리다 못해 나리의 손에 포크와 수저를 쥐여 주었다.

전투 후에 먹는 식사가 세상에서 제일 꿀맛이었는데. 심지어 주환이 곁에 있어서 파장에도 문제가 없건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상황이 나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고, 머릿속은 복잡해서 도통 입맛이 없었다.

나리는 힘없이 수저로 그릇 안을 휘적거리다가 간신히 한 술 떴다. 주환이 계속 보고 있으니 맛이라도 보는 시늉을 하고 맛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따뜻한 크림수프와 감자가 입 안에 부드럽게 으깨져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정말, 딱 한 입만 먹으려고 했는데, 속이 따뜻해지니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미적지근하고 짭조름한 크림수프가 헐어 버린 입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정말, 딱 맛만 보려고 했는데, 입 안에 난 상처를 감싸는 맛은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나리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곧바로 납작하게 붙어 버린 배가 꼬르륵거렸다.

그래, 뭐라도 먹어야 뭐라도 하겠지.

나리가 따뜻한 빵을 집어 들어 반으로 뜯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자, 마음이 불편했던 주환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매칭 테스트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식사 후에 가죠.”

육지에 발을 디딘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매칭 테스트를 받으라는 걸까. 아직도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데…….

대체 왜 또 매칭 테스트가 필요한 거지?

나리는 허겁지겁 빈속을 채우다 말고 주환을 지그시 쏘아보았다.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서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저번과 비슷할 겁니다.”

“저어, 그러면 다른 가이드님과도 테스트받는 겁니까?”

“예?”

주환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리를 쳐다보았다. 나리는 포크로 식판 위의 스파게티를 휘적거리며 말했다.

“왜 여기까지 와서 매칭 테스트를 다시 받아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페어가 또 바뀌는 건가, 그게 아니면 연합군 소속 가이드와도 매칭 테스트를 받는 걸지도 모르고…….”

“…….”

“일대일 매칭 시스템이라고 하지만, 외국에서는 희귀 어빌리티 상급 에스퍼는 가이드 두세 명도 둔다고도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 아니었군요?”

나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픽 헛웃음을 흘렸다. 파장은 뾰족하고 입술을 삐죽거리는 게, 불만이 가득했다.

주환은 삐죽빼죽해진 나리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중사, 지금 상황이 갑작스럽고 내키지 않는다는 건 이해하지만, 페어로서 최선을 다해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릴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리가 수저와 포크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주환에게 물었다.

“제가 거부할 시엔 다 죽인다면서요? 제가 직접 파장을 쓰는 것도 믿지 못해서 박 소령님이 제 파장을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중사, 그건…….”

“전 지금 후회 중입니다.”

왜 그때 주환과 매칭된 걸 좋아했을까, 역시나 제게는 페어에 대한 운이 너무 없었다. 그냥 건강상 이유로 빨리 전역할 것을…….

최 대령님이 가이드에게 정을 주지 말라고 했을 때, 왜 바락바락 대들었을까? 그냥 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일인데…….

아니면, 일한이 마지막까지 주환 말고 자신을 택하라고 했었을 때, 못 이긴 척 넘어갔더라면 좀 더 괜찮았었을까.

나리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이렇게 후회할 시간이 없는데, 일한이나 강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바다 건너 먼 곳까지 강의 목소리가 들릴 리도 없었다.

“저랑 페어가 된 걸, 그렇게 후회합니까?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정도로?”

“…….”

나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주환을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속인 것은 맞지만, 자신이 강을 거역할 수 없는 것처럼 그도 그의 상관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걸 어떻게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신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마냥 그의 탓만 할 수가 없었다.

한때는 저 남자 때문에 꺼져 가는 심장이 살아나는 것만 같더니, 이젠 마음이 죽어 가는 것만 같았다.

“제가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상태가 아니잖아요. 나 하나 빠진다고 해결될 상황도 아니고.”

나리는 한숨을 내쉬고 힘없이 대답했다.

“우리 부대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안해란 중위님은 아직 애도 어리고……. 다음 달에 결혼하겠다고 했던 곽 중사도 그렇고, 저랑 같은 숙실 썼던 홍 하사는 돌봐야 할 중증 장애 동생이 있어요.”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최 대령님, 죽게 내버려 두라고요?”

“안 죽습니다. 재판대에 세울 뿐입니다. 그간의 공과 업적이 있는 사람이니 적당한 선에서 참작될 겁니다.”

“그건 윗분들이 아닌, 박 소령님의 생각이죠. 균열을 닫았는데, 뭐 하러 위험한 에스퍼를 살려 둡니까?”

“SS급 가이드가 있지 않습니까.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 분명히 최 대령을 살려 둘 겁니다.”

물론, 강이 에덴을 선택한다면 말이다.

주환은 나리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렸다.

“군 상부뿐 아니라 모두가 이 평화를 유지하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 대령의 전력은 국가에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

나리는 입술을 깨물며 주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따듯한 체온과 함께 그녀의 피까지 간지럽히는 가이딩이 스며들었다.

“절 믿으십시오. 이 중사.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노력할 테니까.”

“…….”

주환을 믿어야 하는데.

단단하게 굳어 버린 마음은 부드러운 가이딩과 달콤한 약속에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금으로서 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 페어의 가이딩을 통해 기억을 되찾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속을 뒤집어 놓을 뿐이다.

나리는 수저를 놓고 고개를 숙였다. 욱여넣은 음식을 토할 것만 같았다.

“예…….”

나리는 이를 악다물고 울컥 치솟는 쓴물을 삼켰다.

❖ ❖ ❖

그 시간, 일한도 자신의 페어 때문에 몸에 사리를 쌓고 있었다.

“강아.”

“…….”

“최강? 이렇게 고집 피우면 사골 국물에 밥을 곱게 갈아서 콧구멍으로 먹이는 수가 있다?”

다른 때 같으면 파장을 퍼트릴 듯이 위험하게 살기를 세우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릴 놈이 파장도 브레이크를 걸고 물도 한 모금도 안 마시며 단식 시위 중이었다.

그 무거운 입은 물론이요, 파장까지 꽁꽁 닫아 놓았으니, 일한도 함부로 강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네가 이래 봤자, 나리 중사는 안 와.”

“닥쳐.”

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서 쪼가리와 오래된 옛 지도를 신경질적으로 밀치고 이를 세웠다.

가스 발전기 몇 대로 불빛과 냉난방만 겨우 돌릴 뿐, EMP 공격으로 망가진 컴퓨터와 통신 기기들을 대신할 기기는 나흘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좌표 계산도 다 부스러지는 종이 지도로 해야 했다.

일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박주환을 안일하게 보고 서두른 건 나지만, 놓친 건 너잖아. 우리 둘 다 잘못한 건데, 누굴 원망하는 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힘을 합쳐야 나리 중사 찾을 수 있지 않겠어?”

강은 미간을 짚고 이를 갈다가,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대체 그 약은 왜 썼어?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나리가 좌표를 불렀을 텐데…….”

“…….”

“하아, 젠장.”

빌어먹을.

일한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나리의 부탁이었더라도 그건 들어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박주환은 이나리를 데리고 어디로 간 걸까.

강은 J구역의 지도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꺼졌기에, 어떻게 아직까지 나리의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거지? 강이 자신의 한계까지 감지 어빌리티를 펴고 파장을 운용해도 나리와 주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실종 나흘째를 넘어가니, 항상 나리를 가지고 협박하던 상부에서 이번에는 정말로 두 사람을 처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나리가 죽었을 수도 있다.

그 한 가지 가정만으로도 강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황현균 대통령이 황에덴을 제 눈앞에 들이미는 것도, C15의 균열이고 뭐고,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환의 요청을 듣는 게 아니었다.

윗선의 명령으로 공태형의 전 가이드가 J구역에 납치 감금되어 있으니, 공태형이 사고를 치기 전에 그 가이드를 찾아 꺼내 주면 강과 일한의 일에 협력하겠다고 주환이 말했다.

처음엔 일한의 단독 작전이었는데, 주환이 제가 직접 가서 정신계 에스퍼와 소민을 맞교환해야 한다기에 강이 잠에 빠진 나리까지 데리고 부대 밖으로 나오게 된 게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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