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왕자님인 줄
머리를 터트릴 것처럼 붉은 불빛이 깜박거리고 경보음이 사납게 울렸다. 나리는 주환의 손을 잡아당기고 다시 통제실 쪽으로 향했다.
전방의 커다란 화면에는 나리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숫자와 곡선이 가득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빨리요. 저 녀석 약점이 뭡니까?”
나리가 말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작전 지시를 내리는 함장과 장교들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주환은 나리가 어떻게 하려는 생각인 건지 알 수 없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 중사, 여긴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주환이 아무리 힘써 잡아당겨도 나리는 한 발짝도 꼼작하지 않았다.
“좀 전에 제 쉴드 거리가 얼마나 갔습니까? 반경 300m? 아니면 100m?”
“이 중사.”
주환은 완강하게 버티는 나리의 허리를 감싸 들었다. 그는 반듯한 미간을 찌푸리고 나지막이 경고했다.
“제 명령에 따라 주시죠. 제발.”
“…….”
나리는 주환에게서 눈을 돌리고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잠수함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점은 이제 하나가 아니었다.
셋, 아니 다섯, 뒤늦게 가이딩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 나리가 빠르게 말했다.
“쉴드 어빌리티 말고, 부유 어빌리티로 몬스터의 움직임을 막는 게 나을 거예요. 그게 먹히지 않는다면 구체가 아닌 타원이나 사각, 여러 형태로 쉴드를 변환한 다음 몬스터가 물기를 기다렸다가 입에 물고 형태를 크게 키우면 몬스터의 입을 벌릴 수 있어요.”
“……선실로 가. 이 중사.”
“하지만, 박 소령님!”
“네가 작전 외의 파장을 쓰면 바로 윗선에 보고가 올라가. 그러니 순순히 명령에 따라 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지?
나리는 멍하니 주환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제가, 제 파장을 쓰면 안 되는 겁니까?”
“…….”
주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는 혼란스러운 듯 멍하니 주환을 쳐다보았다.
나리는 이미 도주를 시도했었다. 그것이 명령 불복종 등의 죄목으로 일이 더 커질 뻔한 것을 주환이 페어인 나리를 책임지겠다고 나서서 겨우 무마되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매칭 테스트를 다시 받기 전까지만이라도 나리는 가만히 있어야 했다. 지금 파장을 써서 그녀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주환이 상황을 설명해 주기도 전에, 나리는 고개를 숙이고 주환의 손을 놓았다.
“……알겠습니다.”
가이드에게 가만히 제 파장만 내어 줘야 한다니.
속이 쓰리고 내키지 않았지만, 본래 군대가 이런 곳이었다. 그것도 C구역이 아닌 바닷속까지 끌려온 마당에 모난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거니까.
“…….”
주환은 뒤돌아서서 멀어지는 나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주환은 나리가 남긴 벌건 손자국을 내려다보고 흔들어 털었다.
철벽처럼 단단하게 굳어 가는 그녀의 파장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몬스터에게서 빠져나가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 ❖ ❖
텅, 터엉, 텅…….
계단을 내려가던 나리의 발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주환이 선실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선실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음과 바쁘게 움직이는 수병 때문에 좁은 복도에서 마냥 헤맬 수도 없고…….
나리는 구석진 곳에 털썩 주저앉아 두 귀를 막았다.
듣고 싶지 않아도 온갖 소리가 들렸다.
시끄럽게 맴도는 경보음과 기계 소리. 화약과 약품 냄새,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텁텁한 공기의 입자까지 거슬리기 시작했다.
속에서 맴돌던 파장은 자연스럽게 주환의 가이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것이 너무 싫었다. 이대로 심장을 멈추고 가만히 파장을 숨기고 싶었다.
‘A급 몬스터 다시 400m까지 접근. B급 심해종, C급 몬스터까지 무리를 부르는 거 같습니다.’
‘박주환 소령은 아까처럼 방어막을 치고…….’
“으윽!”
나리는 인상을 쓰며 지끈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서서히 주환의 가이딩을 따라 빠져나가던 파장이 뜨거워지며 넓게 퍼졌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진정시키고 있던 나리는 다음에 몰려온 충격에 대비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난간을 움켜잡았다.
3, 2, 1……!
“악!”
다시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여태까지 나리가 치렀던 전투 중에서 가장 편한 전투였다. 끔찍한 몬스터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겪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그런데 뭐가 이렇게 억울한 건가.
자꾸만 속이 쓰렸다.
나리는 주환의 가이딩이 가시지 않은 손끝을 쥐고 두 눈을 감았다.
좀 전에 엿보았었던 과거가 캄캄한 시야 속에 일렁였다.
❖ ❖ ❖
기대도 하지 않았던 딸이 하루아침에 A급 에스퍼로 발현하자, 가족들은 로또를 맞은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
<그래! 잘됐다! 어정쩡한 대학에 진학해서 이 구역에서 아등바등 사느니, 군인이 되는 게 낫지! 암!>
<누나가 A급 에스퍼면, 나도 이능력자로 발현할 수 있겠다! 그치? 그래서, 누난 무슨 능력자인데?>
들뜬 아버지와 남동생과 달리 나리와 함께 이능력자 연구소에 다녀왔던 나리의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당신은 지금 그게 부모가 돼서 할 소리야! 이은석, 너도 이능력자 된다면서 공부 안 할 생각 하지 말고 얼른 영어 단어나 외워!>
나리는 애써 웃으며 엄마를 말렸다.
<에이, 왜 그래. 엄마. 좋은 게 좋은 거지.>
<좋기는! 센터 가이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에스퍼잖아? 몬스터랑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고, 전역하고 나서도 몸 성하게 사는 에스퍼 얼마 없어.>
<에이, 그걸 왜 지금 걱정하셔? 작년에 우리 반이었던 효정이도 여름방학에 훈련받고 특수고 갔잖아. 학비 지원받으면서 성인 될 때까지는 훈련이랑 학업이랑 병행한다는데, 얼마나 좋아? 아빠! 빨리 치킨 시켜 줘! 나 배고파!>
몬스터고 뭐고, 나리는 이능력자로 발현한 친구들처럼 자신도 으레 훈련이랑 학업을 병행하는 줄로만 알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평소 촉이 좋으신 엄마가 잠을 못 잘 정도로 걱정하면 꼭 불행한 일이 일어나곤 했는데…….
3개월 후, 나리는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수송기에 타고 있었다.
쉴드 어빌리티 능력자는 국내에 몇 명 되지 않았고, 그것도 A급 이상의 능력자는 한 손에 꼽았기 때문에 나리는 능력이 발현된 지 고작 3개월 만에 중요한 작전에 투입되었다.
나리는 긴장한 얼굴로 수송기에 같이 탄 군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최전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들의 눈빛은 단단했고, 살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제 또래의 이능력자도 이번 작전에 투입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수송기 안에는 없었다.
무서웠다.
아무리 후방에서 쉴드만 쓰면 된다고 했지만, 첫 전투가 균열이라니…….
나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첫 가이드 매칭 테스트에 실패하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차출되는 일까지. 에스퍼가 되고 좋았던 것은 저녁으로 치킨 먹은 날 단 하루뿐이었다.
그나마 나리를 안심시키는 소식도 있었다. 그 유명한 순간 이동 어빌리티의 S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 페어도 같은 부대를 지원한다고 했다. 기사에 뜬 사진으로만 보던 군 홍보용 연예인 아니던가.
SS급 에스퍼를 직접 만날 수 있다니, 그건 좀 설렜다.
<한국군에서 17살짜리를 보냈다고?>
SS급 에스퍼와 그의 페어를 고대한 것은 나리뿐만이 아니었다. 베이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최강과 일한이 아닌, 나리를 보고 수군거리며 혀를 찼다.
SS급 페어는 어디로 가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저 삐쩍 마른 애송이가 살아남을 수 있겠냐면서.
하지만 나리는 그런 냉대 속에서도 베이스 한가운데에서 눈치만 보며 쭈뼛거릴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겪는 무더위와 습기, 날벌레들, 불편하고 불쾌한 환경 속에서 나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균열 주변에서 소모전만 벌이며 2주가 지났을 때쯤이었다.
<아니! 한국에서는 SS 급 에스퍼랑 S급 가이드를 보내 준다면서 대체 언제 오는 건데! 애송이 방패막이만 보내면 다야? 퉷!>
전투에서 돌아온 어느 에스퍼가 토악질하다 말고 소리쳤다.
그날따라 힘든 전투였기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나리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죽을 뻔한 걸 기껏 살려 줬더니 뭐? 애송이 방패막이?>
아직 정식 입대한 군인이 아닌데도 남의 나라 오지 산간까지 끌려와 이병 딱지 달고 있는 것도 억울해 죽겠구만, 뭐?
나리가 버럭 소리치며 수통을 집어 던졌다. 신체 강화 어빌리티에 종잇장처럼 구겨진 수통이 통나무로 쌓아 놓은 방책에 푹 박혔다.
<애송이 방패막이도 개싸움은 할 줄 알거든! 붙어! 이 XX 새끼야!>
주위가 조용해졌다. 지난 2주간 휴식 시간마다 이능력자 국가 대항전을 부추기던 군인들도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동글동글 귀여운 한국군 강아지가 광견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다들 눈 돌아간 나리를 말릴 생각도 못 하고 황당해하고 있었다.
나리가 제게 시비 걸던 에스퍼를 잡아, 진흙탕에 메쳤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을 다해 구른 진흙탕 싸움이었다.
A급 쉴드 어빌리티에 신체 강화 어빌리티까지 있는 개나리를 당해 낼 수 없었던 에스퍼는 두 손을 들고 외쳤다.
<항복! 하, 항복!>
어느새 주변에 몰려들어 낄낄대며 나리를 응원하던 군인들이 나리의 승리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나리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그 에스퍼의 귓바퀴를 와작 깨물어 뜯었다.
<아아악! 내, 내 귀!>
피 맛, 흙냄새,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늘어지는 군복,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늪. 모든 게 다 싫었다.
중력이 가해진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던 나리의 파장이 크게 일어났다. 주변에 몰려든 군인들이 말릴 틈도 없이 중심을 잃고 두둥실 떠올랐다.
지켜보고 있던 가이드들이 서둘러 나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제자리 헤엄이었다.
<최강 생도님, 내가 네 부하입니까? 교양 교수님과 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걸 기억해 봐요. 남들 앞에서는 소중한 가이드에게 예쁘게 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강이 일한을 사납게 째려보았다. 일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강에게 생긋 웃었다.
<자, 다시 예쁜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강은 훌쩍 순간 이동 해 버렸다. 질척대는 땅바닥에 발도 딛기 싫은지, 둥실둥실 떠 있는 사람 등을 밟으며 이동하던 그가 순식간에 나리 앞에 나타났다.
<야.>
막 씻고 나온 듯한 신선한 비누 향이 바람을 타고 나리의 얼굴로 불어왔다. 나리는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깨끗하고 반듯하게 다린 사관생도 제복을 입은 강을 올려다보았다.
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왕자님인가…….
<파장 꺼라.>
<에?>
<코드 레드 울리는 거 안 들려? 나한테 뒈지기 전에 파장 쑤셔 넣으라고.>
왕자님은 무슨,
파병 오기 전에 읽었던 ‘멸, 집, 세’ 속 주인공처럼 재수 없는 싸가지 대마왕이 나리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