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납치
“그래서 그쪽은? 날 살려 둘 거야? 아니면 죽일 거야?”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한다면 사지 멀쩡하게 살려서 여기서 빼내어 주지.”
오호. 그걸 믿으라고?
“아저씨, 내 대답을 듣고 싶으면 더 가, 까, 이, 와야 하지 않을까?”
민희는 철창에 채워진 수갑을 철컹철컹 흔들어 댔다.
“들어와서 이거부터 풀어 줘. 그러면 질문에 대답할 믿음이 생길 것 같아.”
남자는 금이 간 곳을 따라 흐르는 파장을 보면서 픽, 조소했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정신계 에스퍼를 어떻게 믿고.”
“미안. 파장이 보이는 이능력자인지 몰랐지 뭐야?”
“…….”
“아저씨, 에스퍼야? 아니면 가이드? 뭐, 둘 중 뭐가 되었든 아저씨도 파장, 가이딩 둘 다 거둬.”
“이미 걷었어.”
“좋아.”
A202호 주변에 촘촘하게 흐르고 있던 민희의 파장이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철컥, 끼이이.
보안 시스템이 꺼진 격리실 문이 손쉽게 열렸다. 아마 오늘 밤 몬스터들이 쳐들어온다면 제일 쉽게 먹을 만한 식사가 되었으리라.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훤칠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딱 벌어진 어깨와 크고 잘 균형 잡힌 근육, 체격. 어딜 봐도 실전 전투에 뛸 만한 공격형 에스퍼처럼 보였다.
민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묶인 두 손을 흔들었다.
“빨리.”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민희 쪽으로 튕겼다. 작은 열쇠가 민희의 발치에 떨어졌다.
“허……!”
민희가 눈으로 온갖 욕을 하며 남자를 째려보았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더니 민희와 시선을 마주하며 가렸던 얼굴을 드러냈다.
맑은 검은 눈동자 위로 열쇠를 집어 수갑을 풀려는 민희의 모습이 비쳤다.
“윤소민 대위가 구금된 곳, 어디야?”
“참 나, 별 볼 일도 없는 C급 가이드가 뭐라고.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다 찾고 난리야?”
“위치.”
“기다려! 이 열쇠가 맞는지 아닌지 풀고 나서……!”
“…….”
민희는 허둥대며 가까스로 잡은 열쇠를 입에 물었다. 열쇠 구멍에 맞추려고 고개를 숙이고 끙끙대자 남자가 성큼 다가와 그녀의 입에 물린 열쇠를 빼앗아 수갑을 풀었다.
“……비보호 거주 구역 J, 12번 길에 있는 파란색 판잣집 지하에 있어.”
민희가 벌겋게 부은 손목을 매만지며 툴툴거렸다.
남자는 허리 뒤에서 권총을 꺼내 민희에게 겨누었다.
“허. 허얼? 이 아저씨, 왜 그래? 내, 내가 주소 가르쳐 줬잖아!”
민희가 두 손을 들고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워치를 톡톡 건드렸다.
“위치, 비보호 거주 구역 J-12번길. 파란색 판잣집 지하. 10분 내로 확인해.”
고저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소름 돋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민희는 남자의 큰 덩치 때문에 위축된 몸이 더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건 사흘 전이었어. 그새에 다른 장소로 옮겨졌을 수도 있고……. 아저씨, 내가 다른 은신처도 알긴 알거든?”
“…….”
“신서울 사람들은 J구역 잘 모르나 본데, 거긴 군부보다 깡패들이 더 무섭게 설치는 데야. 그러니까 내 말은, 함부로 들쑤시면 그 군인 언니가 위험해지거든. 내가 당신이랑 같이 가서 그 언니를 무사히 데리고 나오면 되는 거잖아? 응?”
남자는 민희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밀고 인이어에서 들리는 말에 집중했다.
“……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함장님.”
함장?
민희는 귀를 쫑긋거렸다.
여긴 육군 아니었나? 왜 갑자기 함장님…… 아!
“듣고 보니 덫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이 중사가 깨는 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민희는 덜덜 떨면서 자신과 마주했었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함장이라고 불렀던 그 냉각 어빌리티 에스퍼. 지금 그가 타깃을 찾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예. 이 에스퍼는 인질 교환 협상이 가능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뭐, 뭐어?”
민희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뭐야! 지금 여기서 내보내 준다고 했잖아! 인질? 인질 교환이라고?”
“그게 네가 안전하게 살아서 나가는 방법이다.”
“말이 다르잖아! 여기서 언제 최강이랑 몬스터한테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게 어디 있어?”
“내 말만 따른다면 걱정할 거 없어. 중요한 인질의 안전을 위해 내가 호송, 협상 담당이 될 테니까.”
남자는 모자를 눌러쓰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수갑을 다시 흔들었다.
“지금 도망가기에는 늦었지.”
그가 완연하게 드리워진 남청색 밤하늘을 턱짓하며 말했다.
“제길.”
“아, 이 연구소 지하에 몬스터 연구 표본들이 갇혀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전력이 돌아오지 않아서 오늘 밤에도 잠금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
민희는 이를 갈며 양손을 내밀었다.
철컥.
기껏 풀었던 수갑이 채워졌다. 남자는 열쇠를 빙그르르 돌리면서 민희에게 말했다.
“두 번째 질문.”
“……씨X.”
“네가 캐낸 아주 중요하다는 자료. 그게 대체 뭐고, 무엇에 쓰려고 하는 거지?”
민희는 눈앞에 놓인 열쇠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험체 #1099923, 박주환과 타깃 제로의 컨트롤 리밋 영상과 실제 매칭률 수치 결과.”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인류의 20퍼센트만 복불복으로 이능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더 많이, 그리고 더 유용한 쪽으로 발현되면 좋잖아? 나같이 숨어 살아야 하는 재수 없는 에스퍼 말고, 너처럼 말이야, 박주환 소령님.”
“…….”
민희는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주환의 두 눈을 보며 이죽거렸다.
“세 번째 질문.”
“또? 아, 정말!”
주환은 총구를 민희의 턱 아래에 들이밀고 말했다.
“김 실장, 그 사람은 뭐지?”
❖ ❖ ❖
꿈을 꾼 거 같기도 하고, 안 꾼 거 같기도 했다.
복권을 살 것도 아닌데 그저 개꿈이겠지, 하고 나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갈증 때문에 혀와 목구멍에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가뿐했다. 나리는 바로 워치를 톡톡 켜면서 팔을 높이 들었다.
“어……?”
워치의 날짜가 왜 이렇게 훌쩍 뛰어 넘어간 건가. 팔에 꽂힌 수액 바늘은 또 뭐고?
많이 자 봤자 휴가 때 10시간 잔 것이 최장 기록이었는데, 워치 속 시간은 나리가 잠들고 나서 사흘이나 지나 있었다.
“……3일이나 지났다고?”
나리가 깨어났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은은한 간접 조명만 켜져 있던 병실이 밝아졌다.
천장과 주위를 둘러보니 전력이 복구된 모양이었다. 병실에 있던 기기들도 예전과 달랐다.
나리는 붕대가 풀어진 어깨와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희미하게 총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스트랩을 쓴 흔적은 없었지만 누군가 환자복으로 갈아입힌 거 같았다.
사흘.
무슨 일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리는 워치를 눌러 유리창을 투영 모드로 전환하고 흰 벽면에 뉴스를 띄웠다.
“뭐, 뭐야…….”
뉴스 화면에는 C11과 C12에 줄지어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용차들이 비치고 있었고, 그 화면을 보면서 기뻐하는 시민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C11의 벙커 앞에 세워진 단상 위에서 작전 성공을 축하하는 황현균 대통령의 모습이 비쳤다.
[……이번 C11과 C12 위험 구역 수복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우리나라 군인 장병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축하, 격려를 전합니다. 또한, 이 작전을 훌륭히 지휘한 이능력 특수 부대 사령부와 알파 81부대 SS급 에스퍼 최강 대령과 SS급 가이드 황에덴 생도에게 박수를 보내며…… 저는 제 임기가 다하는 그날까지, 현재 정화 복구 과정을 거치고 있는 C5와 C8, C9 구역을 민간인에게 개방하겠다는 공약을 지킬 것입니다!]
나리는 고개를 돌려 창밖에 비친 처참한 부대의 모습을 보고 멍하니 턱을 툭, 떨어트렸다.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똑똑,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나리는 퍼뜩 놀라 파장을 세우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나리 중사님, 깨셨습니까? 들어가겠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군의관과 트레이를 끄는 간호병이 차례로 병실로 들어왔다.
나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팔을 올리고 웅크린 채로 군의관과 간호병을 경계하며 쉴드를 둘렀다. 불을 쏘아 대지 않는 게 어딘가. 4층에 입실한 에스퍼들에게 흔히 있는 반응이었다.
간호병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태블릿을 휙휙 넘기며 딱딱하게 말했다.
“혈압, 심박 수, 심전도, 뇌파와 Esp 파장 수치, 모두 정상입니다.”
“좋군. 어깨랑 손은 잘 아물었는지 좀 살피겠습니다.”
군의관이 나리 옆으로 다가가자 나리가 슬금슬금 뒤로 피했다.
“……누구, 십니까?”
“……?”
군의관은 의아한 표정으로 가운에 달린 명찰을 가리켰다.
“외과 전문의 허의준 대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가이드, 이성진 하사입니다.”
나리는 군의관과 간호병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다시 물었다.
“어느 소속이십니까, 언제, 어디서, 알파 81부대 병동으로 오셨습니까?”
미묘한 위화감이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낯선 광경, 낯선 소식들, 낯선 사람,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너무 가뿐한 몸 상태…….
나리는 쉴드를 더 두껍게 펴며 다시 병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워치를 톡 건드렸다.
“……유일한 소령님께 통화.”
[등록되지 않은 연락처입니다.]
“……? 최강 대령님께 통화.”
[등록되지 않은 연락처입니다.]
“……!”
나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내가 깊이 잠들면 가이딩 기록만 지워 달라고 했었지, 언제 연락처까지 다 포맷하라고 했었나.
“박주환 소령님께 통화.”
그제야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이나리 중사, 지금 혼란스럽겠지만 몸 상태를 먼저 확인합시다. 그러고 나서 차차 상황을 설명해 주겠습니다.”
군의관이 두 손바닥을 보이며 다가가 침착하게 말했다. 나리는 벽에 등을 바싹 붙인 채로 간호병과 군의관을 차례로 쏘아보면서 손목에 꽂힌 주삿바늘을 뽑아냈다.
“이나리 중사!”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서 화한 박하 향이 났다.
- 여보세요.
귓가에 울리는 주환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깼습니까? 이 중사, 몸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