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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95)화 (9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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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 날 좋아한다고 말해 봐

“있긴 뭐가 있어. 병동 일이 엄청 바빠서 그랬지. 나리 중사는 쉬지도 않고 계속 나와서 도와주려고 하길래 수면제 좀 놔서 푹 재웠어.”

“재웠다고?”

“나리 중사가 깨면 같이 오려고 했는데 깊이 자는 거 같길래…….”

실은, 한참이나 곤히 잠에 빠진 나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리가 선택한 답안지에 화가 났다가 또 자신을 자책하면서 한숨을 쉬고, 그냥 확 덮쳐 버릴까 하다가 자괴감이 복받쳐 울고.

“그럼 박주환이랑 나리랑 둘이 있다는 거야?”

“……몰라.”

일한이 힘없이 답했다.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막막하고 답답하고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강은 일한을 쏘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래, 이 녀석.

꼭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

강은 제 옆에 있던 부관에게 잠깐 자리 좀 지키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뭔가 이상했다.

“강아?”

일한이 뒤늦게 강을 불렀지만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추고 없어진 뒤였다.

“이나리!”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병동은 몬스터 바리케이드를 친다고 쌓아 놓은 기물들로 휑했다.

1층 수술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2층 병실에는 소리 죽여 끙끙대는 부상자들과 보초 서는 병사들의 기운이 감지되었고, 3층도 마찬가지.

“4층?”

4층은 에스퍼 전용 중환자실이었던가?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은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4층 병실 쪽으로 순간 이동 했다.

끼이이익, 굳게 닫힌 철문을 힘겹게 밀어내고 나서야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고르게 오르내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위화감 속에서 파장의 잔여물이 먼지처럼 떠돌고 있었다. 밀도가 높고 둥근, 그리고 부드럽고도 단단한 파장의 느낌은 분명 나리였다.

강은 나리의 파장을 톡 건드렸다.

“이나리?”

반경 이내로 오면 벌떡벌떡 일어나던 녀석이 이젠 상관이 와도 대놓고 자는 건가?

끼이…….

작은 인기척이 정적 속에 크게 울렸다.

그럼 그렇지. 개나리 이 자식, 또 뻔뻔하게 자는 척이지.

강은 헛웃음을 차면서 인기척이 들린 병실 문을 열었다.

은은한 달빛이 사물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큰 병실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 위에 볼록 솟아오른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

정말 자나?

이 정도로 가까이 오면 움찔거리면서 자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강은 나리의 바로 옆까지 다가가 섰다.

트레이 위에 놓인 수면제와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주사기를 집어 든 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의무실에서 가이딩할 때 사용하는 수면제가 아니었다. 라벨도 없는 주사약에 코를 대고 킁킁대던 강은 자신의 코를 틀어막고 주사약을 집어 던졌다.

챙그랑!

지척에서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날카로운데도 나리는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유일한, 이 개자식이!”

모를 수가 없었다. 연구원들이 자신에게 주입하던 그 마취제였다. 살을 찔러도 모르고 심해와 우주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센 약이었다.

강은 나리를 반쯤 일으켜 흔들었다.

“정신 차려! 이나리, 이나리?”

뺨을 때리고 이름을 불러 봐도 나리는 축 늘어진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덜컥,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강은 나리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기도 하고 혈맥을 짚었다.

다행히 정상이다. 씨X……! 다행이 아니지!

이대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이고 열흘이고 잠만 잘 수도 있었다. 강은 지끈지끈 두통이 이는 머리를 흔들고 나리의 팔을 잡아 올렸다.

나리의 워치를 켜고 바이탈과 가이딩 기록을 살폈다.

이나리

에스퍼 등록 번호: 4201A001

상태 이상: 없음. -정상—

Esp 파장 수치: 67002 -안정—

모든 수치는 정상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였다.

“……없어?”

그런데 가이딩을 받은 시간과 가이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워치를 빼놓아도 입력된 개인 정보와 파장을 인지해 기록하는 기능이 있는데도 오늘 아침 최고 위험권까지 치솟던 파장 수치는 가이딩 기록도 없이 안정권 안으로 뚝 떨어져 있었다.

말이 안 된다.

“유일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이 그 녀석 말고 또 누가 있을까.

강은 이를 갈며 나리를 흔들었다. 힘없이 꺾인 머리가 달랑달랑 종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이나리, 너 왜 나 안 불렀어?”

“…….”

“유일한이 너한테 뭔 짓을 할 줄 알고 왜 저딴 거를 맞아?”

“…….”

“너 바보야? 머리 좀 다쳤다고 멍청한 짓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가이드 녀석들 믿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디 끌려갔으면 어쩔 뻔했어!”

악에 받친 말이 마구마구 쏘아졌다. 푹 꺾인 머리가 강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일한 생도님……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웅얼웅얼 뭉개진 말이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흐지부지 녹아내렸다.

“……!”

강의 두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덜컥 결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지 마. ……생도님 때문에 맨날…… 혼나고…… 고생만 하잖아…….”

“하, 하아. 하…… 으흑!”

강은 으스러질 것만 같은 가슴에 빼곡하게 나리를 끌어안고 일그러진 얼굴을 나리의 어깨에 묻었다. 뭉텅뭉텅 토해 내는 숨과 함께 강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으어…… 숨 막혀어…….”

머릿속에 벌레가 사는 것처럼 뇌를 윙윙 헤집어 놓는 목소리, 망막 위에 희끗희끗 맴도는 어둑어둑한 빛무리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하나하나.

그리고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습한 숨결과 가슴이 터지도록 꽉 죄는 이상한 떨림까지.

꿈이 이토록 생생한 건 약이 세서 그런가 보다.

두 번은 못 할 짓이네…….

너무 꽉 끌어안아서 손가락 하나도 꼼지락거릴 틈이 없었다.

“균열까진…… 얼마 안 ……는데, 내가…… 가야 하는데…….”

왜 꿈속에서까지 일을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게 다 근 10년간 바보처럼 허튼짓하며 구른 똥강아지라서 그래. 하하, 하하하…….

피식피식 올라가던 나리의 입꼬리가 다시 힘없이 흐려졌다.

“왜 울어…….”

“흐읍, 으, 흐윽…….”

네가 자꾸 내 목덜미를 적셔서, 나도 울고 싶어지잖아…….

네가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게 싫어서, 내 약한 마음이 다치지 않으려고 깨어나면 모조리 다 증발해 버릴 꿈을 꾸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염치도 없이 쉽게 깨지 않을 약을 놔 달라고 했는데 꿈이 이렇게 아프면 어떻게 해.

“이나리.”

으응.

“이나리…….”

응…….

“좋아한다고, 말해 봐.”

잘게 떨리는 강의 목소리가 나리의 귓가에 울리자마자 움찔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머리 아파아…….”

강은 나리의 하얀 목에 입을 맞췄다. 팔 안에 안긴 나리의 머리를 기울여서 한 번 더.

“……마, 간지러…….”

강은 살짝 벌어진 나리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개고 또 한 번 더 덧그렸다. 딱딱한 치열을 가르고 입 안을 훑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나리가 앓는 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욱신욱신 쑤시고 죄어들었다. 나리는 제 입술을 지분거리는 부드러운 감촉을 혀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강 생도님…… 아…….”

강은 나리를 침대 위로 쓰러트리고 더 깊게 키스했다.

아무 맛 없는 연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입 안에 자꾸만 감돌고 혀 위에 녹아드는 것만 같아서 달다고 느껴졌다. 타액이 섞이고 목으로 넘어가도 야들야들한 입술이 감미로워 더 목이 탔다.

나만 기억하는 키스일까 봐.

넌 녀석들의 가이딩만 기억할까 봐.

강은 입술을 떼고 나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좋아한다고 말해 봐.”

“아, 안…… 돼…….”

“끝까지 내 옆에 있겠다고 그랬잖아. 가이드 따위 필요 없다고…….”

“그만…… 더는 안 돼애……. 안 돼…….”

나리가 꿈을 꾸듯이 웅얼거렸다. 찌푸려진 눈썹과 동그랗게 말린 나리의 입술은 강의 애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그대로였다.

차라리 네 꿈속에 들어가 널 꺼내 올 수만 있다면 좋겠어.

강은 곤히 잠든 얼굴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로만 잠꼬대하는 얄미운 뺨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매번 나만 억울하지.

이번에도 나만 좋아한다고 말하고 끝나 버리는 걸까. 강이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나리…….”

떠지지 않을 나리의 눈두덩이 위에 입을 맞추고 떨어지려는데 나리의 팔이 강의 목을 감싸 안았다.

“울……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남청색 짙은 밤하늘에 밝은 불빛이 번쩍거렸다. 창밖에서 폭발음이 터지고 총성이 빗발치는데도 고요한 불꽃놀이처럼 병실 안에는 터질 것만 같은 심장 박동 소리만 울렸다.

❖ ❖ ❖

어두운 연구소 안으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길게 기울었다. 밤이 가까워지자 낮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깨작깨작 고막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에잇, 씨……. 신체 강화 어빌리티라도 있었으면 이런 거쯤은 별거 아닌데. 씨X…….”

창살에 매인 수갑을 풀어 보려고 바르작거리던 여자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누군가 불 꺼진 연구소 안으로 들어왔다.

신체 강화 어빌리티는 없어도 에스퍼답게 감 좋고 오감은 예민했다. 누가 오는지 아닌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민희는 터진 입 안을 혀끝으로 훑으며 귀를 기울였다.

터벅, 터벅…….

무거운 발소리가 아까 밥을 넣어 준 감시병과는 달랐다. 민희는 몸을 움츠리고 문을 쳐다보았다.

계단에서 열일곱 발짝 정도 떨어진 격리실. 자신의 파장이 닿을 수 있는 범위는 열 발짝 안이다.

하나, 둘, ……다섯, 여섯.

그래, 한 발짝만 더 가까이…….

탁.

거짓말처럼 한 걸음을 남기고 멈췄다. 민희는 그림자와 바닥에 난 금 사이사이로 거미줄 친 파장을 유지한 채로 숨을 죽였다.

“여긴 뭐 하러 왔지?”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민희는 코웃음을 흥, 찼다.

“아저씨, 내가 그걸 쉽게 말해 줄 거 같아서 묻는 거야?”

“…….”

“지금쯤이면 억류하고 있는 기자들 족쳐서 내 어빌리티와 임무를 알고 있을 테고. 내가 입고 있는 거, 워치, 가방에 있는 천까지 다 뜯어봤을 거잖아?”

주홍색 석양이 드리워진 얼굴이 어둑어둑한 복도를 응시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벽과 바닥에 난 균열을 훑고 ‘격리실 A202호’라고 적힌 문에 다다랐다.

“23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안전 구역에 이송하려면 최소 버스 1대에 안전 구역까지 호송을 담당할 호위 차량이 앞뒤로 최소 2대. 그러면 최소 소대 하나는 필요할 텐데 이쪽은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고……. 소동 중에 침투시킨 정신계 에스퍼 1명이 몬스터가 날뛰는 와중에 23명을 한꺼번에 이동시킬 수도 없어.”

“…….”

“장대신 소령을 처리한 것처럼 네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죽이라는 명령이었겠지. 그 죄를 알파 부대가 다 뒤집어쓰게 하려고.”

민희는 문을 노려보며 입술을 씹었다.

“그래서, 자료는 구했나?”

저 자식은 누굴까.

유일한의 목소리는 아니다. 파장도 가이딩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다른 회사에서 온 요원이거나 연구소 직원일 수도 있었다.

“아아, 구했지. 아주, 아주, 중요한 자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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