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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94)화 (9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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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제가 모르게 해 주세요

갑자기 덮친 가이딩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나리는 가까스로 입을 떼고 주환을 불렀다.

“박, 박 소령님. 할, 말이…… 으읏.”

주환이 말은 나중에 하라는 듯이 나리의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밀치는 나리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나리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세워 올렸다.

으으.

나리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환이 바로 다른 손으로 나리의 턱을 잡아 정면에 고정했다. 벌어진 잇새를 벌려 발갛게 젖은 혀를 엄지 끝으로 누르고 고른 치열을 쓱 훑었다.

“무슨 말이 필요한데?”

나리의 입술이 주환의 손끝 위에 닿았다가 떨어지며 웅얼댔다.

“가이딩 고지도 없이…… 이, 이러시면…….”

주환이 피식 웃으며 나리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홧홧한 가이딩이 엉망진창으로 날뛰는 파장과 얽히고 혈관 위에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가쁘게 달아올랐다.

주환은 나리의 앞섶을 풀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 한 문장, 그저 형식상 지나가는 말이니까.

“제가 지금부터 이 중사를 가이딩해도 됩니까?”

나리는 목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던 주환의 손을 붙잡아 멈췄다.

“아니요.”

“……?”

나리의 가슴 위에 입을 맞추려던 주환이 멈칫 멈추고 나리를 올려다보았다.

“가이딩하기 전에 하나만 동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동의…… 무엇을 말입니까?”

나리가 산통을 깨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는지 주환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직도 입 안에 감도는 오묘한 느낌, 주환과 맞닿은 곳마다 홧홧하게 번져 나가는 시원시원하면서도 저릿한 감각이 나리의 주의를 끌어당겼다. 갖고 싶고, 삼키고 싶고,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가이딩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내 파장을 제일 빠르게, 가장 안온하게 보듬어 주는 내 페어, 내 가이드의 가이딩이건만 전과 달리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왜 그럴까, 예전과 같은 가이딩인데.

왜 내 심장은 전처럼 설레지 않는 걸까.

“페어, 그 이상의 선은 넘지 말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그게 무슨…….”

“페어, 말 그대로 박주환 가이드님께 제 파장, 제 어빌리티, 제 등, 그리고 몸을…… 딱 거기까지만 허락한다는 말입니다.”

나리의 말에 주환은 허, 하고 낮게 혀를 찼다.

“동의하지 않으시면 지금 페어 해지하고 해군으로 돌아가셔도…… 전 괜찮습니다.”

“…….”

“여기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박 소령님도 피해 보실지 모르는데, 저는 소령님께서 제게 기대하시는 것만큼 소령님을 좋아하지 못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죄송합…….”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주환은 나리를 무섭게 쏘아보며 물었다. 열에 들뜬 채로 한달음에 왔건만 이게 뭔 상황인 건지 믿기 힘든 표정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가이딩 받아 본 적도 없으면서 단정 짓지 마시죠.”

나리가 무슨 말을 잇기도 전에 주환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닿기만 해도 전율이 이는 손이 나리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에 감기는 말캉한 살을 입 안에 베어 물고 혀를 굴렸다.

“으응, 아……. 소령님, 잠깐만요…….”

나리는 주환과 벽 사이에 끼어 바르작거리며 주환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살갗 위를 유영하는 가이딩에 힘이 풀리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리는 눈을 돌려 일한이 앉아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말 좀 하게 주환을 좀 말려 달라고.

“…….”

그러나 일한은 그때까지 턱을 괸 채로 가만히 나리와 주환을 쳐다보며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일한에게는 주환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분명히 자신도 똑같은 말로 나리를 설득했을 테니까.

드르륵,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한은 병실 구석에 옮겨 놓은 파장 측정기와 모니터, 그리고 주사와 주사약이 든 트레이 쪽으로 다가갔다.

이 측정기가 제 역할을 했으면 좋으련만, 현재 나리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지표는 저 두 사람의 워치, 그리고 가이드의 감밖에 없었다.

일한은 트레이 위에 놓인 주사를 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게 이런 부탁을 한 나리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다른 에스퍼처럼 가이드 여럿 두고 잤더라면 언젠가 자신에게 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었을 텐데.

일한은 한숨을 내쉬며 주사기를 들어 밀봉된 포장을 뜯었다. 그대로 주삿바늘을 약에 꽂아 주입한 뒤 톡톡 기포를 뺐다.

“박, 주, 환, 소령님?”

“…….”

뭐야, 유일한.

“제가 있는 거 아셨으면 눈치껏 좀 멈춰 주시죠? 그 이상 진행하면 수면제는 박 소령님이 맞게 될 겁니다.”

주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일한을 노려보았다.

“수면제?”

“가이딩 실습 들으셨잖습니까. 가이드 최소 인원 2명, 에스퍼의 동의하에 수면 마취를 진행한다, 가이드의 안전 확보 필요시에는 가이딩 전에 에스퍼를 스트랩으로 고정할 것. 그리고 계측기를 살피며 파장 수치를 10%에서 25%까지, 최대 30% 낮추는 것으로…….”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그건 페어가 없는 에스퍼의 가이딩 시에 따라야 할 수칙이고…….”

“나리 중사가 제게 부탁했습니다. 자신은 예전처럼 의무실에서 가이딩받던 게 더 맘이 편하다고요.”

“……!”

주환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리를 쳐다보았다.

나리는 풀어 헤쳐진 앞섶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두 분께 이런 불편한 부탁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 바보 같은 결정으로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일한과 주환 사이에서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고, 이쪽저쪽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믿고 있었던 책 빙의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잘 모르는데, 이 목숨은 벌써 끝자락에 있었다.

고된 훈련을 악으로 버티고, 강에게 구박받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아남았던 이유가 뭔데.

나라에서 주는 두둑한 퇴직금과 연금을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살다 죽으려고?

과연…… 얼마나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을까?

한 달?

일주일?

아니면, 대략 하루 정도?

몸이 성하다고 해도 최강이 가이딩을 거부하는 한 이 세계의 멸망은 언제든 가능하다.

“제가 균열에 가서 싸울 수 있게만 해 주세요.”

C15 구역에 있는 차원의 균열.

이 모든 전쟁과 비극의 시작이자 끝.

그저 최강이 균열을 파쇄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단단한 차단 쉴드를 펼 수 있게끔. 그거 하나면 된다.

몬스터가 기어 나올 구멍이 사라지면 최강이 파장을 쓸 일이 없을 테고, 그 후에 녀석이 가이딩을 받든지 말든지 뭔 상관이란 말인가.

“두 분이 가이드이시니 가이딩 방법과 시간 모두 두 분께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상세한 사항은 알고 싶지 않아서 수면제를 놓아 달라고 했으니 제가 깨어나서도 모르도록 모든 기록을 지워 주세요.”

주환은 나리의 어깨를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물어 가는 상처를 헤집고 흔들어 대는 통에 나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신음을 삼켰다.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

“계, 계속 이런 식으로 가이딩받겠다고? 그냥 차라리!”

“으윽.”

살갗을 따갑게 파고드는 가이딩 때문에 나리의 몸이 잘게 떨렸다.

나리는 덜덜 떨리는 잇새를 꽉 다물었다. 주환의 격한 감정을 따라 흘러드는 가이딩에 온몸이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겨우 벽을 잡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쥐어짰다.

“제가…… 마지막으로 균열에 가서 싸울 수 있게만 부탁드립니다……. 박 소령님.”

“…….”

일한이 주환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

“싫으면 여기서 나가요. 박주환 소령.”

일한 역시 나리의 요청을 억지로 받아들인 건지 주환을 쏘아보는 두 눈가가 벌겋게 일그러져 있었다. 일한은 나리의 팔을 잡아 주사기를 꽂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방해하지 말고.”

“후우으…….”

주환은 파르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더니 퍽, 벽을 내리쳤다.

X같은 상황이었지만 인제 와서 페어를 파기하고 태형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치미는 화와 짜증을 삭이고 일한을 돌아보았다.

일한은 가이딩과 약 기운에 다리가 풀린 나리를 부축해 침대 위에 눕혔다. 그러고는 하얗게 질려 덜덜 떠는 나리의 이마 위에 손을 올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한숨 자요. 나리 중사.”

“흐으, 으, 으으…….”

“잠에서 깨고 나면 다 괜찮아져 있을 겁니다.”

그러길 기도하듯 나리는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았다.

일한은 나리의 눈을 감겨 주고 나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굳어 버린 나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서서히 긴장을 이완시키는 가이딩을 운용했다.

“젠장……!”

주환은 젖은 머리를 흩트리더니 성큼성큼 일한과 나리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바로 일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네 녀석이 어떻게 가이딩하려는 건지 몰라도 난 반대야. 매칭률 높은 내가 주도권 잡고…….”

“매칭률로만 가이딩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닌 거 딱 보면 알 텐데? 박 소령이 수시로 워치의 수치를 확인하면서 내가 서서히 단계별로…….”

아아, 알고 싶지 않대도.

나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높이며 열을 올리는 주환과 두 눈을 추켜올리고 사납게 반박하는 일한이 낯설기만 했다. 나리는 무겁게 가라앉는 의식을 놓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로.

괜찮아야 할 텐데…….

❖ ❖ ❖

“어디 있다가 이제 오는 거야?”

강은 팔짱을 낀 채로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나타난 일한을 쏘아보았다.

하루 내내 부르고 찾아도 어디에서 뭘 했던 건지 대답이 없더니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좀, 일이 있었어. 미안.”

“…….”

병사들이 있는 앞에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강은 한숨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일한을 빤히 째려보다가 물었다.

“박주환이랑 같이 있었어?”

“어?”

“그 녀석도 오후 내내 보이지 않아. 할 일은 많고 바쁜데 다들 작전 끝났다고 퍼진 거야, 뭐야?”

“…….”

일한은 입을 다물고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리를 가이딩한 건 기록에도 없는 일이다. 모르는 일이라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잘게 떨리는 손을 꽉 쥐고 뒷짐을 지었다.

생각하지 말자. 지금 눈앞에 닥칠 일만 봐야 한다.

일한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정면을 주시했다.

강이 득달같이 재촉한 끝에 철책 대부분이 복구되었고 아직 다 못 이은 전선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이나리도 연락이 안 되고. 너희 셋 뭐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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