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나리가 괜찮다고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누가 봐도 절대 괜찮을 리가 없는데 괜찮다고 하니까.
팔꿈치가 빠져도 괜찮다고 하고, 다리가 으스러졌을 때도 괜찮다고 했다.
10년 내내 매칭 테스트 결과가 안 좋아도 괜찮다고 하고. 그러다 코드 레드가 떠서 죽다 살아나도 괜찮다고 했다.
나리가 안 괜찮다고 말하는 건 최강이 속을 썩였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나리가 괜찮겠느냐고 묻는 지금, 일한은 괜찮을 리가 없었다.
발을 딛고 있던 바닥이 무너져 내린 것만 같은데 나리가 울고 있다는 게 더 속상했다.
“예. 괜찮아요.”
네가 수백 번이나 괜찮다고 말할 때도 이랬을까.
“…….”
나리는 발갛게 뜬 눈을 찌푸리며 자신이 짓이겨 놓은 일한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심장 소리를 재면서 일한을 쏘아보았다.
거짓말인 거 다 안다는 듯이.
일한은 픽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질 겁니다. 나리 중사도, 나도.”
❖ ❖ ❖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박주환.]
[유일한이 소민 씨를 잡아간 에스퍼를 붙잡았다고 들었어.]
[이 씨X 새끼야. 내가 왜 유일한에게 보고를 들어야 해? 대체 너는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주환은 태형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쉰 주환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잠시 할 말을 정리했다. 긴 말은 아니었기에 숨을 고르고 바로 통화를 눌렀다.
“함장님, 박주환입니다.”
- ……누구?
뻔히 알면서 되묻는 어투에서 주환을 향한 짙은 분노와 원망이 거침없이 느껴졌다. 주환은 사과부터 했다.
“윤 대위 일은, 정말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C11/C12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그 에스퍼부터 찾아 윤 대위 일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태형의 앓는 신음과 허탈한 한숨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태형이 이를 갈며 주환에게 쏘아 댔다.
- 똑바로 잘 들어. 이 새끼야.
“…….”
- 괜한 일 만들지 말고, 최강이랑 유일한이 무슨 짓을 꾸미기 전에 지금 당장 그 에스퍼한테 소민 씨가 있는 곳 알아내.
“……알겠습니다. 함장님.”
- 그리고 그 에스퍼와 이나리 중사, 둘 다 이쪽으로 옮겨.
“둘 다 말입니까?”
- 상부는 C11/C12 작전 결과 발표를 준비하는 중이야. C15 작전 시나리오까지 언급할 거 같은데, 그 전에 옮기지 않으면 소민이 위험해.
“…….”
주환은 입술을 꾹 말았다.
그가 생각했던 기한보다도 더 촉박했다.
- 저녁에 다시 연락하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태형이 일방적으로 통화 연결을 종료했다.
주환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곳에 온 순간부터 복잡했던 속을 쓸어내렸다.
나리 때문이기도 했고, 일한에게 들은 군 상부의 일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종합해 보자면, 일한이 자신을 속이거나 과장해 말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윤소민이 무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공태형을 협박하기 충분할 만큼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주환은 거기까지 생각하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페어 시스템.
그것은 에스퍼들의 파장을 안정시키고 수명을 늘리는 것보다도, 그들의 힘을 통제하기 위한 달콤한 족쇄였다.
가이드에게 중독시키고.
사랑이란 감정에 매달리게 하고.
기꺼이 목숨을 쥐고 처절하게 이용하도록 만드는.
“하아.”
주환은 눈을 찌푸리며 벽에 주먹을 내질렀다.
최강이 일으키는 이 시스템의 균열 속에서 군부가 제일 먼저 노릴 타깃은 강이 아닌 나리였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전역도 할 수 없었고, 다른 곳으로 보직 이동도 할 수 없이 위태로운 채로 10년을 버틴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 가는 나리에게 매칭된 자신은 미래를 기약하는 답일까, 아니면 독일까.
일한의 짐작대로 연구소에서 만든 기술로 자신이 이나리의 가이드로 발현한 거라면, 그가 해야 하는 일은 SS급 가이드 황에덴만큼이나 중한 임무였다.
최강이 황에덴의 가이딩까지 거부한 마당에 시한폭탄 같은 최강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는 이제 주환이었다.
자신밖에 없다.
최강에게 매인 나리를 붙잡을 사람이.
그 높은 매칭률을 보이는 가이딩이 나리에게 다디단 독이 될 것을 알아도 주환은 그 잔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내심 태형이 소민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나리도 자신만 바라봐 주길 원했다. 태형의 말대로 억지로라도 나리를 안으면 이 갈증도, 위태로운 상황도, 전쟁과 평화도 나아지는 건가.
주환은 다시 피가 배어나는 입가를 쓱 훔쳤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도 주환은 제게 주어진 임무를 해야 했다.
띵.
[박 소령님, 어디 계십니까? 잠깐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때마침 온 나리의 메시지에 주환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페어 아니랄까 봐, 자신의 생각이 나리에게 들킨 것만 같았다.
주환은 저 멀리 복구 작업이 한창인 현장을 쓱 보다가 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예. 잠시 시간이 됩니다.]
[그럼 병동 401호실로 와 주시겠습니까?]
오전에 나리가 있었던 병실이 아니었다.
주환은 의아해하며 병동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무슨 일 있습니까?”
주환이 통화를 걸어 제법 진지하게 쏘아 묻자 나리는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 아, 그게 말입니다. 가이딩…… 때문에 할 말이 있습니다.
주환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낮게 웃었다.
“가이딩 때문에 할 말이 있다? 할 말은 통화로 해도 되지 않습니까?”
- 다, 당연히 가이딩도 받을 거고……요.
“알겠습니다.”
나리가 자신을 피하고 계속 강을 신경 쓰더라도 결국에 찾을 사람은 제 가이드가 아니겠나.
- 박 소령님은 괜찮으십니까?
“흐음. 괜찮지 않습니다. 방금 함장님과 통화했거든.”
- 아…….
“이 중사는 어떻게 내가 안 괜찮을 줄 알았습니까? 좀, 소름 돋는데?”
자조적인 웃음이 묻어나는 주환의 목소리가 나리의 귓가를 스쳤다.
나리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창밖을 쳐다보며 속으로 대답했다.
그야 나도 마음속 어딘가가 괜찮지 않으니까요.
저 멀리에서 군인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무너진 철책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한시도 쉬지 않은 그들 가운데에 강도 있었다.
초점이 한번 그에게 맞춰지고 나니 어느새 바로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확대되어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걸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4층 병동은 외부 소음과 차단되어 저 먼 곳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리는 손끝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이 중사?
나리는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내렸다.
병동 문 앞에서 주환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리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병동에 너무 건강한 티를 내면서 오시는 거 아닙니까? 상의는 어디에 두셨습니까?”
어찌나 열심히 몸을 썼는지 한껏 성이 난 근육 위로 핏대가 돋아 있었다. 주환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제 몸을 쓱 내려다보더니 강에게 맞아 터진 입술을 가리켰다.
- 더워서. 그리고 보다시피 나도 부상자 맞습니다.
“풋. 보기보다 꾀병이 심하십니다.”
- 401호. 맞죠? 금방 올라가겠습니다.
주환이 긴 다리로 단숨에 다 타 버린 화단을 넘어 성큼성큼 병동 안으로 들어오면서 통화가 끊겼다.
“하아…….”
나리는 한숨을 쉬면서 창문에 등을 기댔다.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은 왜 하지 않았습니까?”
병상 옆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리던 일한이 나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리는 그저 웃었다.
일한은 칫, 입을 삐죽거리며 턱을 괬다.
“나리 중사가 나에게 한 말, 박 소령한테도 똑같이 말하나 안 하나 그것만 듣고 훌쩍 가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박 소령은 또 나랑 달리 싫다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박 소령님만 손해 아닌가요.”
“……나리 중사, 남자 함부로 믿는 거 아닙니다. 나도 믿지 말아요. 눈 돌아가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유일한 소령님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아아. 전혀 아니래도.”
나리는 토라진 일한의 옆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누구 눈치 보느라 이 잘생긴 얼굴을 자세히 감상해 본 적이 없었다.
선하게 휘어진 눈꼬리와 따듯한 갈색 눈동자, 곧게 뻗은 콧대를 지나 티 하나 없어 보이는 뺨이 점점 붉어졌다.
“왜 그렇게 봅니까? 뭐 묻었습니까?”
“아뇨. 유 소령님께서 저 보는 것처럼 저도 유 소령님의 잘생김을 면밀하게 관찰 중입니다.”
일한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사래를 쳤다.
“인제 와서 꼬리 친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알고? 나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나리가 배시시 웃으며 활짝 입꼬리를 당겼다.
“유 소령님, 나중에 다른 여자 좋다고 하면 저 진짜 배 아플 거 같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날 잡아요. 그럼 용서해 줄게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얄궂다 못해 사악하게 나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리도 일한이 마음을 놓지 못하게 빤히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똑똑.
때마침 주환이 도착했는지 노크 소리가 일한과 나리 사이를 갈랐다.
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일한이 나리를 말리고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박주환 소…….”
주환은 문을 박차듯이 열어젖히고 들어와 나리에게 입을 맞췄다.
쿵, 하고 나리를 벽에 밀치고 허리를 안아 올려 나리의 다리를 제 하체에 붙였다.
아니, 저기요?
아주, 중요한, 말부터 해야 하는데.
당황한 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끄고 주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주환은 그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고개를 돌려 더 깊이 혀를 찌르고 옭아맸다.
“음, 으움!”
혀가 얼얼할 정도로 속으로 쏟아지는 가이딩에 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주 중요한 말부터 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