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저한테 왜 말 안 하셨어요?
나리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자신이 들은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몇 초 후, 얼굴을 붉히며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소령님, 저어, 그, 그건 제가 더 감당하기 힘들 거 같습니다…….”
“왜, 박주환 소령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거라면 내가 잘 말해 줄게요.”
“…….”
차라리 그럴까.
다른 에스퍼들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맘에 드는 가이드와 입술을 맞대고 몸을 섞으며 가이딩이라고 가볍게 넘겨 버릴까.
정말 그게 최선의 선택인 걸까.
나리는 일한의 손을 보며 입술을 깨물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이 일한을 힘껏 당겼다.
“나리 중사?”
나리는 대답도 없이 그대로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일한은 어리둥절해하며 끌려가면서도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하아, 미치겠네.
나리가 가이드를 붙잡고 아무 빈 병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그런 저돌적인 에스퍼는 아닌데. 와…… 갑자기 이러면 나…….
일한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러나 나리가 병실을 모두 지나쳐 병동 밖으로 나오자 팔랑거리던 기대감이 스멀스멀 엇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겁니까?”
일한이 숙사와 정반대 방향으로 걷는 나리에게 물었다.
“물어보러 갑니다.”
물어본다고……?
누구한테 무엇을?
“후환이 두려워지기 전에 확실하게 해 두려고요.”
“예?”
이번엔 일한의 눈이 커졌다. 나리는 입술을 문 채 철책을 다시 세우느라 바쁜 작업 현장으로 향했다.
“일단 연대장님부터요.”
“응? 강이한테요? 뭘요?”
나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일한을 돌아보았다.
“최 대령님, 소령님한테 가이딩 안 받으시는 거, 여자 친구…… 아니, 애인이 있어서라면서요? 최 대령님은 애인 있으시니까 유 소령님이 저 가이딩하는 거에 예민하게 간섭하지 말라고 해야죠!”
“예에? 자, 잠깐만. 강이가 나리 중사한테 그렇게 말했습니까?”
일한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예! 자기 완전 여자 좋아한다고 그러시던데요? 쌓일 대로 쌓이신 걸 보면 애인이 가이드는 아니고 일반인이신 거 같은데.”
아아.
일한은 작게 안도했다. 강이 프로그램이 비껴 나가도록 말한 것을 나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것이 나리의 억측 때문인지, 아니면 머릿속에 심어진 프로그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기만 한 일한의 반응에 나리가 이를 바득 물었다.
“유 소령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일한은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예.”
뭐, 이런, 와아…….
나리는 멍하니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그런데 왜 저랑 술 마셨을 때는 그런 말을 한 번도 안 하셨습니까?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게 아주 오래전 일이라서요. 전 강이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었어요. 나도 좋아하는 사람 있는걸요.”
일한은 말할 수 없었다.
강과 나리가 좋지 못하게 끝난 것이 일한에게는 기회였다. 강이 기억을 잃은 나리를 붙잡고 아득바득거렸을 때, 일한은 나리가 기억하지 못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꼰대같이 굴고 싶지 않아서, 나리의 기억이 돌아올까 봐, 그래서 나리가 또 힘들어질까 봐 일한은 일부러 생도 시절부터 임관 첫해까지 이야기하는 걸 삼갔다.
“…….”
나리에게는 강의 고백보다도 일한이 알고서도 제게 숨겼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나리는 황망하게 일한을 올려다보았다.
“어, 얼마나 오래전 일입니까?”
나리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10년은 됐을걸요.”
“10년……요?”
10년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나리가 알고 있던 원작 소설이랑 어긋나도 너무나 어긋난 시간,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나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턱 막히는 숨을 바르르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달랐다.
나리가 충격에 휩싸여 넋을 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일한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제가 짝사랑을 좀 오래 하긴 했죠?”
“…….”
일한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 그러지?
일한은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키고 허리를 숙여 나리의 안색을 살폈다.
“……나리 중사?”
“예…….”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네요.”
일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리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은 없고 파장도 급작스럽게 나빠진 것은 없는데.
“좀 충격적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나리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저는 10년 동안 유 소령님과 최 대령님 두 분을 가까이에서 모셔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어떻게 눈치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10년이나 있을 수 있었죠? 정말이지…….”
운이라도 좀 띄워 주지. 네가 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고 티라도 좀 내 주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지!
왜 인제 와서…….
뭘 해도 늘 눈치 없다고, 이나리 너 정신 좀 차리라고 타박한 강의 말대로 자신은 정말 바보 멍청이였다.
“미안해요. 나리 중사.”
일한은 잘게 떨리는 나리의 어깨를 조심스레 안아 주었다.
미안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난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네가 강을 영영 잊고 살기를 바라기에, 더는 네가 다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길 바라기에,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거라서 나리에게 미안했다.
뭐라고 달래 줘야 할까.
어떻게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해야 할까.
“강이 그 애인이랑 10년 동안 사귄 건 아니에요. 에이, 그 녀석 성격에 누구랑 오래 못 사귀죠. 짧게 사귀었고 헤어진 지도 오래돼서 저도 잊어버리고 말을 안 한 겁니다.”
일한이 가볍게 둘러대며 넘기려고 했지만 나리는 이미 너무나도 큰 모순을 깨달은 뒤였다.
여긴 책 속이 아니다.
‘멸, 집, 세’를 본 기억은 분명히 있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짙은 남색 교복을 입고 버스를 기다리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머리를 크게 다쳐서 링거가 흔들리는 침대에 누워 입원실로 실려 가던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났고.
눈을 뜨니, 에스퍼였다.
17살의 고등학생에서 19살, 이등병 이나리로.
나리는 그때 사고로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흔하디흔한 책 빙의, 죽기 전에 봤었던 이야기 속에 빙의한 거라고.
“소령님.”
나리가 물었다.
“최 대령님께 가서 따지기 전에 말입니다. 제가 더 놀라야 할 것이 있나요?”
“놀라야 할 것, 요?”
“예. 아시다시피 제가 사고로 이병 때 기억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개처럼 굴려지면서 모쏠로 사는 동안 저 성격 파탄자도 애인이 있었다는 거 말고 또 놀라야 할 게 더 있나 해서 말입니다.”
“…….”
가쁘게 솟아오르던 일한의 설렘과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일한은 입 안을 깨물고 울컥 치솟는 서운함을 삼켰다.
내가 10년 동안 널 바라봤다는 것보다 강에게 10년 전에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한테 더 충격적이었구나. 그 성격 파탄자의 애인이 너였다는 걸 어떻게 말해.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없습니다.”
“10년이나 되었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습니다만.”
예감이 좋지 않다.
일한은 나리가 여기서 그만 멈춰 주길 바랐다.
“제가 사고 당하기 전에는 대령님한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도, 소령님이 절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글쎄요…….”
일한은 생각에 잠긴 듯이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그러면 사고 당하기 전 이병 시절의 저는 어땠습니까?”
하아.
일한은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나리가 일한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이 왜 지금 나오는 걸까.
“지금이랑 똑같았어요. 다른 훈병들과 달리 시원하고 화끈하고, 억울한 건 못 참고, 할 말은 꼭 해야 해서 선배들이 많이 곤란해했었고. 무엇보다도…….”
일한은 입 안을 깨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넌 맞는 가이드가 없다는 것에 좌절했다가도 금방 괜찮다고 털털하게 굴었다.
가이딩 따윈 안 받아도 괜찮다고, 사람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라며, 기왕이면 화끈하고 멋지게 죽을 거라면서 너무나도 해맑게 웃었다.
“예뻤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나리 중사 때문에 많이 웃었고, 나리 중사가 웃으면 정말 모든 게 괜찮았어요.”
나리는 일한의 첫마디에 놀라 다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똑같았다니.
17살의 평범한 고등학생과 19살, 이등병 이나리가 똑같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여기가 책 속이 아니고, 난 누군가에게 빙의한 것도 아닌 거야? 빙의한 게 아니라면 대체 뭐야.
나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잇새로 한 단어를 흘렸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일한이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가 어딘가 쓰디썼다.
“나리 중사, 예뻐요.”
“…….”
일한은 나리의 뺨을 쓸다가 두 손으로 감쌌다. 뻣뻣하게 굳어 버린 나리의 표정을 녹이려는 듯이 일한은 따듯하고 부드러운 가이딩을 흘리며 이마를 툭 맞댔다.
“나 좀 봐 봐요.”
일한은 질끈 눈을 감은 나리를 바라보면서 애원했다.
“강한테 가지 마요. 그 녀석이 뭐라고 할지 뻔하잖아요.”
“…….”
나리는 입술을 질끈 물고 서서히 눈꺼풀을 들었다. 혼란으로 뒤덮인 나리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리는 일한의 눈에 비쳤다.
나리는 일한의 커다란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유일한 소령님도 되게 잘생기셨어요.”
그러나 설레어야 할 칭찬은 너무나도 무미건조했다. 나리는 일한의 손을 잡아 내렸다.
“저도 일찌감치 다른 에스퍼들처럼 그냥 잘생긴 가이드나 붙잡고 몸을 섞고, 미친 척 취한 척 유 소령님 한번 유혹해 볼 걸 그랬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일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떠는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나 좋다는 가이드가 많았다는 걸 알았는데…….”
애써 웃는 나리의 얼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좀 많이 늦었나 봐요. 유일한 소령님 가이딩 한 번 받으면 마구마구 설레서 열이 났는데, 지금은 왜 심장이 굳어 버린 건지 모르겠어요. 검진 날짜 아직 남았는데, 더 일찍 당겨야 할까요?”
나리가 눈물을 훔치며 울먹거렸다.
“이러다 정말 하루아침에 죽나요? 지금이라도 나 아무나 잡고 자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나아지나요?”
“나리 중사…….”
“제가 유일한 소령님과 박주환 소령님, 두 분의 마음에 누를 끼치고 이용만 해도 소령님은 괜찮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