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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91)화 (9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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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박주환이 불편하면 나랑 자는 건 어때요?

……불편해 죽겠다.

나리는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멘 것도 아니고 공주님처럼 안겨 있는 묘한 자세가, 그것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몬스터를 썰고 있는 강의 품 안이라는 게 불편했다.

공주님처럼 안고 있는데 어떻게 몬스터들을 썰고 있냐고?

나리는 초연하게 감았던 눈을 뜨고 개사기 능력을 가진, 순간 이동, 공간 제어 에스퍼를 올려다보았다.

1번. 제한된 공간을 일그러트리기. 그 제한된 공간이 몬스터의 머리라면? 그다지 관전하고 싶지 않은 싸움 TOP5에 들 거다.

2번. 공간의 경계선 너머로 달려드는 몬스터를 절반만 이동시키기. 이 역시 어떻게 타이밍을 맞출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전투 장면 TOP3 안에 든다.

3번. 몬스터를 아무렇게나 이동시켜 떨어트리기. 갑자기 땅바닥이나 나뭇가지에 푹 꽂히는 몬스터들을 보면 좌표를 반드시 정확하게 알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든다. 0.001이라도 틀리면 내가 저 꼴 날지도?

4번. 이해 불가. 눈으로 보고도 대체 무슨 상황이 일어난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는 경우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강이 컴컴하고 일그러진 곳을 닫으며 이동해 있었고, 몬스터들은 온데간데없이 피 냄새만 짙게 났다.

SS급 최강이 두 손을 쓰지 않고 몬스터들을 써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나리는 굳게 닫힌 강의 입술을 보며 언제 쉴드를 쓰라는 건지 기다렸다.

참아야 한다. 이나리.

저 인간이 내 최애였던 적은 어언 10년 전의 풋풋했을 적이고, 나는 탈덕한 지 오래되었다.

살벌한 정적이 입을 근질거리게 해도 절대로 먼저 말을 걸지 말아야 하고. 탄탄한 강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 소리가 가쁘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하고. 강의 손가락이 겨드랑이와 가슴 사이에, 허벅지와 무릎에 걸쳐 있어도 가만히 있어야 하고.

“하아…….”

강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내 얼굴 위에 뜨거운 숨을 내쉬어도, 모, 모른 척…….

“씨X.”

흐, 흐아악!

나리는 움찔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강이 무심코 내뱉은 욕 한마디에 나리의 귀가 벌게졌다.

쿵쿵 과속하는 혈류가 간지러운 전율과 함께 온몸을 훑었다. 나리는 하마터면 강의 얼굴을 밀칠 뻔했다.

“……? 뭐야, 이나리.”

강이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리는 시선을 피하며 작게 “네.” 대답했다.

벌게진 얼굴을 가려 본다고 고개도 푹 숙였는데 소용이 없는 거 같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 같은 목소리보다 고장 난 심장이 쿵쾅쿵쾅 펌핑하는 소리가 더 컸다.

으으, 제바알…….

모른 척해 줘…….

“하!”

강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차라리 ‘너 왜 얼굴이 뜨겁냐,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심박 수를 올리냐.’ 따져 물으면 오해 말라고 잡아떼겠는데 말이다.

미치겠네.

나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들끓는 말과 욕을 꾹 참았다. 그리고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지금 상관에게 공주님처럼 안겨서 손가락 까딱 안 하는 연약하고 민폐 쩔고 하극상에 무용지물인 부하다. 정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무겁고 못생긴 짐짝녀가 되…….

강은 온몸에 힘을 주고 웅크린 나리를 고쳐 안았다. 그 순간, 참다못한 나리가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튀어 올랐다.

“하으윽! 씨!”

까, 깜짝야.

갑자기 버둥거리는 나리 때문에 강이 휘청거렸다.

“어, 어딜 만져요!”

“뭘?”

“간지러워 죽겠지 말입니다! 그 손가락으로 내 겨드랑이를! 아니, 그리고 왜 남의 얼굴에 숨을 쉽니까!”

“…….”

“그리고 저한테 이나리, 이나리…… 하지 마십쇼! 아무리 그래도 부사관 직급 붙여서 존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강 대령님!”

“아아.”

강이 낮게 웃었다.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이나리, 중사님이 일부러 쉴드를 겹겹이 둘렀는데도 네가 예민해서 흥분한 게 내 탓이다?”

“윽.”

“잘나서 미안하군.”

“…….”

……나 그냥, 내려 줘.

차라리 예전처럼 구석에 머리 박으라고 해 줘.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터져 죽을 거 같아.

“가이드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오해 마십시오.”

뼈 맞고 변명해 봤자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었다.

강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고, 나리는 그 이상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며 땅땅땅 못을 박으면 어쩐단 말인가.

그저 웬수 같은 입술을 꾹 말고 시간이 해결해 주길 빌었다.

❖ ❖ ❖

“허억, 허, 헉……!”

철컥철컥.

총알이 없다. 본관 옥상에서 총을 쏘던 가이드는 남은 탄창이 있나 살폈지만 양옆 주머니, 뒷주머니 할 것 없이 비어 있었다.

하아, 젠장.

밤이 이렇게 길었던가.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점멸하는 붉은빛 너머로 이렇게 많은 몬스터에 둘러싸여 있었는지. 어떻게 죽이고 죽여도 계속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허억…….”

파장을 계속 내뿜는 에스퍼도 점차 지쳐 갔다.

도마뱀 종의 몬스터가 벽을 타고 올라 긴 혀로 제 눈을 훑으며 지친 가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이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총으로 몬스터의 주둥이를 찍고 발로 걷어찼다. 신체 강화 어빌리티를 몸에 두르고 있어도 몬스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쩌억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징그러운 혓바닥이 날름 나와 가이드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대로 한입에 머리가 삼켜지기 직전, 긴 쇠붙이가 훅 몬스터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허어, 헉, 세상에, 헉…….”

가이드는 제 눈앞에 멈춘 칼날을 보며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아니, 다리 사이가 축축한 것이 이미 지렸을지도 모른다.

칼날은 그대로 옆으로 비껴 나가며 몬스터의 입을 찢어 버렸다.

피가 솟구치고 몬스터가 쓰러지면서 검을 쥔 남자가 보였다.

“여, 연대장님!”

아, 살았다……!

알파 팀이 복귀했으니 이제 밀물처럼 쏟아지는 몬스터와의 소모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는 무슨.

강이 부대에 복귀하고 파장을 푼 순간부터 팽팽했던 전세가 빠르게 정리된 것은 다행이었으나, 해가 뜨고 나니 처참한 현실이 그들을 맞았다.

몬스터 사체로 엉망이 된 건물 외관과 내관, 훈련장, 홀딱 타 버리고 무너진 철책 등등…….

일이 산더미였다.

강은 팔짱을 끼고 일렬로 늘어선 부대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빨리빨리 움직여! 안 그러면 오늘 밤도 잠 못 자고 몬스터와 싸우는 수가 있어.”

몬스터가 들이닥쳐도 인간의 살길을 열어 준 기계 과학이 발전한 세기말 세계관 속. 고액 연봉과 사대 보험, 의료 혜택을 누리는 고급 인력―에스퍼와 가이드를 비롯한 군의관, 간호병, 연구원까지―들이 직접 삽을 들고 삽질을 할 줄이야.

전력과 기계가 먹통이니 인력밖에 답이 없었다.

“후우으…….”

나리는 이 가혹한 현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와 손의 총상이 벌어지는 바람에 삽질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누워서 쉴 수는 없었다.

“나리 중사는 좀 쉬세요.”

일한이 나리를 붙잡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비상시에 쉬라고 하셔도 제 맘이 불편해서 편히 못 쉬겠습니다. 두 다리, 한 팔 멀쩡한데 뭐라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리는 의료 물자를 정리하고 차트 위에 기록했다. 간호병들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 이런 간단한 사무를 돌볼 사람조차 없었다.

수술실 로봇들이 먹통이니 부상자들의 수술은 아침으로 미뤄졌다.

게다가 맨손으로 직접 수술할 수 있는 군의관의 수는 겨우 두세 명. 너무나도 완벽한 기계에만 의존한 탓에 경험이 없는 군의관들은 간호병보다 못했다.

신음하는 군인들이 병실 안팎으로 즐비한데 가만히 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력은 오늘내일 중으로 복구될 겁니다.”

“……그래야죠.”

나리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선거를 앞두고 노이즈를 만들지 못하게 EMP를 터트려 C1 방어선을 무너트린 게 누군데. C11과 C12가 수복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새벽 동이 트자마자 타 부대에서 보낸 수송 헬기와 전투기가 도착했다.

부상을 입은 황에덴은 바로 안전 구역으로 이송되었다. 수리를 맡은 기술자와 함께 임시 발전기도 도착했지만 부상자들보다 무너진 철책을 먼저 복구하라는 명령에 병동은 아직도 싸늘했다.

“…….”

나리는 씁쓸한 입 안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나리 중사.”

일한이 가까이 다가와 나리의 손목을 잡았다. 왼손으로 펜을 잡고 삐뚤삐뚤 써 내려가던 펜이 툭 미끄러졌다.

“가서 가이딩부터 받아요.”

“……받았습니다.”

나리는 애써 웃으면서도 일한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 얕은 가이딩 말고.”

힘든 전투였다.

안 힘들었던 전투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나리의 몸은 예전과 달리 쉽게 지쳤고 파장은 빠르게 고갈되었다.

정말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또 상기했으면서도 나리는 망설였다.

차라리 주환이 자신에게 마음이 없단 걸 알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편하게 가이딩을 받았었을까.

“…….”

모르겠다.

그저 머리가 멍했다.

일한은 초조하게 나리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 박 소령이랑, 강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라…….

‘나 완전 여자 좋아해.’, ‘인사 아니야. 나 이거보다도 더한 짓도 했었어.’라고 뽀뽀하면서 자랑스럽게 자기는 애인 있다고 밝힌 미친놈이랑.

‘왜, 에스퍼들은 다 가이드만 보면 시커먼 욕망과 정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무서운 존재라면서? 나리 씨가 날 만지는 게 낫다면 난 맞춰 줄 수 있습니다.’라면서 나리더러 리드하라며 상의를 열어젖힌 주환이나…….

제멋대로 입력된 회상을 멈춘 나리는 하하하 웃으며 일한에게 대답했다.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 말은 곧, 나리 중사만 맘고생 하고 안 좋은 일만 있었다는 말이네.”

일한의 다정한 한마디에 나리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일한은 나리의 얼굴을 감싸며 나리의 갈라진 입술을 훑었다.

“내가 해 줄까요?”

“예?”

뭐, 뭘요?

나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일한은 비스듬히 기대어 싱긋 웃었다.

“뭐가 맘에 걸려서 나리 중사가 아직도 망설이고 거부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박 소령이 불편하면 나랑 자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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