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아! 이런 사기 캐릭터 같으니!
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한의 가이딩은 범위가 넓고 희미한 파장이라도 세밀하게 다룰 수 있었다. 아무리 그런 뛰어난 S급 가이드라도 신체적인 접촉도 없이 체내의 파장을 휘젓는 것은 불가능한데, 에덴은 그 먼 곳에서 한 사람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 놓을 수 있었다.
유일한이라면 어떤 작전을 내놓았을까.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도 그와 통신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맘에 걸렸다. 군용 워치는 정전이나 공습으로 작동 불능이 될 기기가 아니었다. 풀어 놓더라도 신호는 잡힐 터였다.
강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알파 1팀의 가이드와 솔개 팀의 가이드로 조를 편성, 내 지휘하에 황에덴 생도의 예상 위치로 가서 생포한다. 나머지 인원은 독수리 팀의 지휘하에 주변의 몬스터를 소탕하는 쪽으로…….”
강의 말에 나리가 눈을 크게 뜨고 주환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이나리 자신이 빠지는 건가 싶어서 만세를 부를…… 뻔했다.
“혹시 모를 물리적인 공격에서 가이드를 지켜야 하니까 공격형 어빌리티 없고, 방어와 차단 어빌리티 있는 이나리 중사는 따라온다.”
그럼 그렇지.
집착광공이 제 똥강아지―발닦개―를 떼어 놓고 갈 리가 없었다.
나리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A조에 있던 알파 1팀의 에스퍼들이 나리를 째려보며 오도독오도독 손을 풀었다.
내 페어, 살짝이라도 다치기만 해 봐라. 그때엔 쉴드 에스퍼인 네 입에서 사흘 전에 먹은 치킨 냄새가 날 때까지 확, 마……!
괜스레 두 어깨가 오십견이 온 듯이 딴딴해지며 눈앞에 고생이 훤히 보였다.
강이 세부 지시 사항을 남기고 김상희 이병의 상태를 살펴보는 동안, 나리는 자신의 몸통에 단단하게 고정한 오른팔을 가리키며 주환에게 부탁했다.
“박 소령님, 제 부목 좀 풀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 낫지 않았을 겁니다. 좀 더 고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불편해서 말입니다.”
나리가 간지러운 곳을 못 긁는 사람처럼 꿈틀대자 주환이 픽 웃으며 나리의 부목을 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리는 양팔을 쭉 뻗어 올렸다.
아야야……. 뻐근하고 쿡쿡 쑤시듯이 아파서 절로 눈살이 구겨졌다. 손바닥에 단단하게 감아 놓은 붕대 때문에 총 잡는 자세도 영 이상했지만 권총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괜찮습니까? 아프면 지금 진통제를 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됐습니다. 팔 하나 없어진다고 쉴드 어빌리티 못 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중사. 그런, 말…… 하지 마시죠.”
“에이, 농담입니다. 얼굴 푸십시오.”
나리는 심각하게 굳은 주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주환은 그 장난스러운 손을 그러쥐고 제 쪽으로 당겼다.
지그시 눈을 맞추며 허리를 숙인 주환이 나리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화한 가이딩이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단단하게 뭉친 긴장감과 부담감이 짜릿하게 쓸려 내려갔다.
“…….”
나리는 멍하니 손가락을 오므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박 소령님께서 안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
저도 모르게 흘린 나리의 혼잣말에 주환이 흠칫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나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풋.
주환이 입꼬리를 씩 당기며 나리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아아, 작전 끝내고 숙실로 돌아가면 맘껏 안아 드리겠습니다. 잠 못 잤다고 불평하지 마십쇼.”
“에?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아까, 최 대령님이 멋대로 절 안고 뛰시는 바람에 배랑 옆구리가 너무 아파서 그, 그걸 얘기한 겁니다!”
나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주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리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나리가 열을 내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새까지 이미, 그의 눈에는 나리의 말이 자신이 좋아서 내뱉은 것으로 들렸으니까.
그렇게 말실수하면 안 되지.
강을 따라 뛰느라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나리를 안고 충분히 잘 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엔 제가 안아 드리면 됩니까?”
주환이 짓궂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아니요! 제 발로 뛸 겁니다!”
나리는 김상희 이병이 들고 온 소총을 어깨에 둘렀다. 헌병대에서 쓰는 총이라 익숙지 않은 기종이었지만 권총보다는 나았다.
나리가 코끝을 씰룩거리며 남은 총알을 확인했다.
좋아.
10년 경력의 선배님답게 어깨를 펴고 비장하게 뒤를 돌았다.
“이 중사.”
무시무시하게 눈꼬리를 추켜올린 강이 팔짱을 낀 채로 혀를 찼다.
“너…… 뒤처지기만 해 봐.”
질투로 화력을 올린 대마왕이 전력으로 뛸 태세로 몸을 풀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나리는 해탈한 듯이 허허 웃으며 야무지게 발목과 무릎을 돌렸다.
이를 어쩌나.
자신의 파장에 남의 가이딩, 특히나 황에덴의 가이딩이 닿는 게 싫어서 어빌리티 하나 안 쓰고 계신 분께 죄송하지만, 나는 신체 강화 어빌리티 쓸 거지롱.
사악하게 웃는 나리의 표정을 본 주환은 큼, 헛기침하며 올라가는 입가를 가렸다.
제가 가만히 있어도 최강은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거 같아서 말이다.
❖ ❖ ❖
“하악, 하아. 하읍, 씨, 아오, 아악!”
사기 캐릭터.
이런 XX 사기캐!
나리는 강의 보폭과 속도에 맞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차단과 쉴드, 신체 강화 어빌리티에 젖 먹던 힘까지.
게다가 아빠 세포가 3억 마리의 라이벌과 치열한 레이스를 했던 힘까지 싹싹 긁어모았지만 나리는 사기캐 최강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주환의 가이딩이 없었더라면 쓰러졌을 것이다.
“대, 대령님! 좀, 천천히, 가십쇼! 뒤에, 가이드들…….”
뒤에 가이드들이 싸우기도 전에 죽어 나가고 있잖아요!
“젠장.”
강은 훌쩍 나무 기둥을 밟고 뛰어오르더니 맨 뒤쪽으로 뒤처진 가이드에게 덤벼드는 몬스터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렇게 달렸는데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몬스터의 미간을 박살 내는 사격 실력, 실화인가?
나리는 눈을 뽀득뽀득 비볐다.
“…….”
으음……. 일이나 하자.
나리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관과 저 캐릭터의 능력치 밸런스, 그 외의 개연성을 따지면 따질수록 머리만 아프니까.
“총 쏘면서 달리는 거 못 해? 지금 쉴드 쳤다고 괴물 새끼들이 뒤따라오는데 죽기 살기로 안 뛰지!”
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기캐의 기준에서 일반인보다 월등한 체력을 가진 가이드들의 능력치는 성에 안 차나 보다. 옆에서 나리가 한 소리를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바로 총을 어깨에 견착하고 강의 등을 노리는 몬스터들을 쏘았다. 반동으로 어깨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신음 하나 새지 않았다.
1마리, 2마리, ……6마리.
“탄창 교체.”
나리가 총구를 내리며 말하자 강이 바로 총구를 뒤로 돌렸다.
“총알 아껴.”
강이 나리에게 말했다. 김 이병의 마지막 남은 탄창이었다.
“네.”
스크래치가 난 총신이 손끝에 쓸렸다. 몬스터가 날뛰는 밤에,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병이 무슨 일을 겪었을지 총만 잡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덴의 가이딩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신을 놓을 만했다.
멀리 있던 가이드들이 강과 나리의 엄호 사격에 속도를 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빼곡하게 앉아 있던 떼까마귀 1마리가 퍼드덕 날아올랐다.
찌르르 울리는 기이한 지저귐이 효시가 되었다. 하늘이 새카맣게 까마귀 떼로 뒤덮이며 캄캄해졌다.
‘벌써 왔어?’
황에덴의 목소리가 강의 귀에도 들렸다.
‘저녁쯤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강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 애송이가 벌이는 짓이야 제 손바닥 안이다.
“뻔하지.”
강은 이 싸움을 해 질 때까지 끌 생각이 없었다.
“안 중위, 김 상사 상황은?”
- 가고 있습니다!
- 6분 내로 도착합니다.
강은 나리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작전 개시였다.
나리가 총을 들고 일어나 파장을 일으켰다. 나리의 주변으로 묵직한 무게감이 화악 퍼져 나갔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걸음이 느려지고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천천히 공중으로 부유했다.
“차단 및 부유 A급 쉴드 파장을 벙커 주변 400m로 둘렀습니다. 지속 시간은 대략 7분입니다.”
7분이면 충분하지.
강이 뒤에 선 가이드들에게 턱짓했다.
“타이머 맞췄지?”
“예.”
주환이 주먹을 들어 양옆에 선 가이드들에게 벙커로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나리의 차단 어빌리티를 뒤집어쓴 주환이 맨 앞에 서서 뛰었고, 나리가 그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강은 그들의 뒤를 보면서 하늘을 가득 채운 떼까마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태풍의 눈처럼 보이는 형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나리와 주환을 덮치려던 거대한 검은 파도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이내 또다시 괴기한 울음소리를 내며 한데 뭉쳤다.
탕!
빈 탄피가 산개하는 화약 분자와 함께 강의 회갈색 눈동자를 천천히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윽!’
짧은 비명 뒤, 피 냄새가 사냥꾼의 후각에 닿는다.
쓰흐읍, 하아.
강은 폐부 가득히 채운 숨을 멈추고 다시 가늠쇠에 눈을 맞췄다. 까마귀 떼에 가려진 검은 점이 총 맞은 허벅지를 잡고 끙끙 신음하는 에덴으로 확대되었다.
“아쉽게도 빗나갔네.”
강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이번 건 안 빗나갈 거 같아. 김 실장. 어떻게 할까? 3초 준다.”
강이 숫자를 세기도 전에 남자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강. 원하는 게 뭐야.’
그럼 그렇지.
“지금 당장 내 부대에서 병력 빼. 아니면 저 새끼를 죽인다고 전해. 안타까운 전사자 하나 더 느는 것쯤이야.”
‘흐음.’
에덴이 총에 맞은 것을 봤을 텐데도 남자의 목소리가 그다지 다급해 보이지 않는다.
“싫으면 말고.”
탕!
강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떼까마귀들이 진로를 바꿔서 강에게 다가오려고 하다가 다시 멈춰서 벙커 안으로 들어가는 가이드들을 향해 날아갔다.
‘시끄러워! 간섭하지 마! 꼰대! 내가! 내가 한다고 그랬잖아!’
에덴이 김 실장에게 소리쳤다. 김 실장은 한숨과 함께 타이르듯이, 조금 피곤한 듯이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것 같다.’
강은 저 하늘에서 발악하며 몸부림치는 에덴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내게 협상이나 협박은 안 통한다고 했는데.’
김 실장의 걸걸한 목소리에 강은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