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손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었다
“아씨……. 어디에다가 소릴 질러?”
귀청 떨어질 뻔한 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리를 째려보았다. 여태껏 죄송하다, 잘못했다, 내려 달라 빌던 나리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저었다.
못 해요, 못 해요, 못 해요. 그것만은 정말 못 하겠슴다…….
눈으로 온갖 불만을 토로하며, 나 말고 구 상병이나 박 소령을 시키라면서.
“후으으…….”
강은 질끈 문 잇새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며 반대쪽 손을 높이 들었다.
“……!”
으악, 마, 맞겠다!
“하, 하겠습니다!”
나리는 생존 본능에 점철된 방어 기제를 발동하며 강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감지 어빌리티를 넓게 펼쳤다.
쿵쿵 가쁘게 울리는 심장 소리에서부터 풀잎을 건드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몬스터들이 킁킁대며 우는 소리를 지나, ‘쓰으윽, 쓰으윽…….’ 발뒤꿈치를 바닥에 질질 끄는 소리와 함께 느릿느릿한 콧노래가 들렸다.
‘음음, 으으음, 으음…….’
‘꺼어어끄어어어…… 어…….’
가사가 불분명한 노래. 하지만 누구든 따라 부를 수 있는 익숙한 노래였다. 누군가 높은음으로 밝게 선창하면 꺽꺽거리는 노랫소리가 뒤따랐다.
듣기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악문 아래턱이 잘게 떨렸다. 나리는 강의 옷깃을 그러쥐고 품속에 파고들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나리는 들리는 대로 작게 따라 불렀다. 은은하게 공명하는 소리가 이 부근 들판은 아닌 것 같았다.
‘나 어디 숨었게……?’
“나 어디 숨었게……?”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나리는 한쪽 눈을 살짝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누군가 나리의 감지 어빌리티를 느끼고 저한테 말하는 것 같았다.
“…….”
갑자기 제 목을 꽉 끌어안고 제 목덜미에 속닥거리는 나리 때문에 강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로 가까이 닿았는데 혹시나 프로그램이 나리를 폭주시킬까, 나리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연대장님…….”
나리가 덜덜 떨면서 강을 불렀다.
“……왜.”
강은 바짝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참았던 숨을 가느다랗게 내쉬며 대답했다.
“귀, 귀신이…… 아니, 누군가 제 파장을 감지한 거 같습니다.”
“어딘데?”
“남쪽, 192도 방향. 소리가 울리는 걸 보니 꽤 규모가 큰 건물의 지하실인데, 떼까마귀 소리랑 사람 발소리도…… 들립니다. 3명 이상 같습니다.”
나리가 못 볼 것을 본 듯이 눈을 감고 인상을 구겼다. 소름 돋는 무서운 소리를 감지한 것도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꺽꺽거리는 괴이한 소리와 빗발치는 총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쿵, 쿵쿵쿵…….
강은 자신의 피를 간지럽히는 나리의 심장 소리를 못 들은 척, C11 지도를 켜서 나리가 말한 건물이 있는지 찾기 위해 나리를 내려 주려고 했다.
“큭!”
그런데 나리가 강의 목을 죄며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난데없이 숨통이 막히자 당황한 강이 나리의 등을 두드렸다.
“야, 안 놔……?”
나리는 손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거 어디서 본 파장 같은데……. 누구더라?’
지하실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리는 게 아닌가.
“힉!”
내 눈으로 귀신의 위치까지 확인해야 하다니.
내가 누구 때문에 귀신한테 찍혔는데. 재빨리 도망갈 수 있는 생명줄을 놓으면 안 된다. 절대로.
나리는 강을 꽉 붙잡고 실눈을 떴다.
오, 오 마이 갓…….
남쪽 방향, 하늘에 동동 떠 있는 점으로 에스퍼들의 파장이 빨려들고 있었다.
“달리십시오! A조가 위험합니다.”
나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급한 통신 음과 비상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 알파01 C-60, 구조! 지원 바랍니다! 코드 레드! 에스퍼 3명 파장 교란으로 폭주 직전입니다!
젠장.
강은 넘어야 할 산등성이 위를 올려다보다가 걸어 잠갔던 파장을 일으켰다. 주위가 새하얗게 변하며 그의 뒤로 밀려났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오른 강은 나리를 고쳐 안고 A조가 있는 반대쪽 계곡을 보았다.
중앙선이 희끗희끗한 옛 국도와 듬성듬성 놓인 전봇대와 농가들, 계단식으로 이어지는 조그마한 밭이 있었던 한적했던 산골 마을에 총성과 비명이 울렸다.
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가늠했다.
자동차만 한 중대형급 몬스터들이 A조를 포위했다. 가이드들이 애를 쓰며 몬스터를 막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에스퍼들은 자신의 파장을 다루지 못하는 전투 불능 상태였다.
“솔개 A-09, 쉴드 지원합니다. 대열 이탈하지 마시고 한곳으로 모이십시오!”
나리는 A조에게 쉴드를 둘렀다. 반투명한 방패가 몬스터들의 진로를 막아 냈다.
나리가 파장을 펴며 적극적으로 A조를 돕는 반면에 강은 나무에서 뛰어 내려와 나리의 머리를 제 쪽으로 더 가까이 감싸 안았다.
심상치 않았다. 파장 교란이라면 한 가이드가 가이딩 컨트롤을 잘못해서 다른 에스퍼와 파장이 뒤엉키고 각자의 어빌리티가 제대로 발현되지 않을 때를 일컬었다.
그런데 강의 눈에는 A조 에스퍼들의 파장은 뒤엉킨 것이 아니라 한데로 합쳐져 있었다.
이런 가이딩을 할 수 있는 건 황에덴뿐이다.
강은 주위를 날카롭게 살폈다. 파장도 아니고 무색무취의 가이딩을 눈으로 좇는 건 어려웠다.
“이 중사, 차단 어빌리티를 크게 둘러서 저 파장을 끊어 내.”
“그러면 쉴드 밖으로 공격도 못 합니다.”
“막아. 내 파장 막듯이.”
“……알겠습니다.”
나리는 더 두껍고 단단한 돔형의 쉴드를 펼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그러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들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에스퍼들을 안정시키기 바빴던 가이드도 놀란 눈으로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쉴드 안으로 뛰어 들어온 몬스터가 공격을 멈추더니 서로 하악거리며 쉴드 밖으로 나가려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내 빗발치는 총성에 반항 한번 못 하고 쓰러졌다.
됐다.
나리의 쉴드가 강의 파장을 막아 내듯이 황에덴의 가이딩도 어느 정도 막아 냈다. 강은 뒤돌아 자신 쪽으로 달려오는 주환과 다른 페어에게 명령했다.
“박 소령은 이 중사 가이딩에 집중하고, 구 상병은 김상희 이병 있는 폐허에 차단을 둘러.”
“예.”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를 틈이 없었다. 주환이 강과 나리 근처까지 다가오자마자 강은 나리를 데리고 훌쩍 나무 아래로 내려와 달리기 시작했다.
“허억. 헉. 미친…….”
나리가 왜 전역하겠다고 했는지 주환은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도 결국은 강을 두둔하며 그의 곁에 남겠다는 나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환은 총을 들고 다시 전력을 다해 뛰었다.
지금은 강보다도 자신의 가이딩을 흩트리며 파장을 갉아먹는 이상한 기운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한이 얘기했던 에덴의 가이딩일 거라고 생각했다. 집중력과 매칭률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나리도 코드 레드다.
타다다당.
강은 길도 아닌 곳으로 뛰어내렸다. 절벽 같은 험준한 경사 위를 미끄러지듯이 내려가고 훌쩍 뛰어 나무 기둥을 잡아 방향을 틀었다.
“연대장님. 귀신, 아니, 그 노래를 부르는, 그, 사람 말입니다. 저를 알아봤습니다. 제 파장을…….”
“귀신이 있다고 믿어?”
“네.”
“…….”
너무나 빠른 대답에 강은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쉴드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몬스터에게 총알 구멍을 내는 데에 열중할 뿐.
“아까 지하실에 있던 귀신이 갑자기 공중 400M 위로 솟구치는 걸 직접 들었는데, 이게 귀신이 아니면 뭡니까?”
나리가 침을 튀기며 열변했다.
강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리를 쳐다보았다.
“황에덴이겠지.”
“헐, 황에덴 생도가 벌써 죽었다고요?”
“안 죽었어.”
“그러면 어떻게 가이드가 하늘로 솟구칩니까?”
“누군가의 어빌리티겠지.”
강은 팔뚝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켕기는 것이 하나 있었다.
황에덴이 몬스터를 다루는 능력.
연구소에 불려 온 상위 등급 에스퍼들을 담당했던 남자, 김 실장의 능력과 비슷했다.
〈최강, 네가 아무리 SS급이라고 여기서 발악해도 말이다. 결국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텐데, 언제까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거냐.〉
정신계 에스퍼였다. 무슨 어빌리티인지 몰라도, 그가 약물을 든 연구원들과 패닉룸에 들어올 때면 강은 줄을 찬 인형처럼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나리가 들은 최소 3명의 발소리.
1명이 황에덴, 다른 1명이 김 실장, 그리고 다른 1명이 비행 능력을 갖춘 에스퍼라면, 현재까지의 에덴이 벌인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외의 복병도 있을 수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이제 놔라. 나 탄창 좀 갈게.”
어느새 산을 다 내려온 강이 무릎을 꿇고 앉아 나리의 두 다리를 땅 위에 놓고 말했다.
“예예.”
나리는 쭈뼛거리며 일어나 권총을 꺼내 들었다.
철컥, 강이 빠르게 탄창을 바꿨다.
인이어에서 들리는 보고는 그의 예상대로 차단 어빌리티가 황에덴의 가이딩을 차단하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북쪽을 수색하고 있던 C조에도 차단 어빌리티를 가진 에스퍼에게 지시를 내린 뒤, 강이 몸을 일으켰다.
“이 중사.”
“네.”
“황에덴이 있는 쪽이 어디라고?”
나리는 C11 지역 지도를 켜고 예상되는 곳을 짚었다.
“둘 중에 하나, 인 것 같습니다.”
지하 주차장이 있는 모텔, 혹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몸을 피하고 있었던 벙커였다.
“지금은 400M 위 공중이라고 했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나리의 파장을 감지한 에덴이 자신을 찾기 위해서 다시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 분명했다.
폐허가 된 모텔이든, 아까 수색을 마쳤던 벙커든 꺼림칙했다. 덫을 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김상희 이병 상태부터 확인하지.”
모두 강을 뒤따라 나리가 꽁꽁 채워 둔 쉴드 주변의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병력이 적었는데도 차단 어빌리티에 통제력이 풀린 몬스터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A조과 합류한 강은 김상희 이병이 있었던 폐건물로 향했다.
차단 어빌리티가 둘렸는데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느릿느릿 자리를 맴도는 김상희 이병의 모습을 본 대원들은 모두 가까이 가는 것을 꺼렸다.
하는 수 없이 주환과 A조의 팀장, 그리고 에스퍼 둘이 조심스럽게 폐가 안으로 플래시 라이트를 비췄다.
“김상희 이병.”
끄어어…….
“김상희 이병! 정신 차리고 대답해.”
어어으어어어…….
차단 어빌리티에 황에덴의 가이딩이 끊겼지만 그녀는 폭주한 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