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81)화 (8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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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 이 빌어먹을 하드코어 세기말 세계관 같으니

“으, 으으!”

나리는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A조가 발견한 것은 귀신 들린 사람이 틀림없었다.

비, 빌어먹을 하드코어 세기말 세계관.

이젠 하다 하다 귀신까지 나오는 건가. 안 그래도 위험 지역은 죄다 을씨년스러운 폐허뿐이라 귀신이 튀어나올 만했다.

겁쟁이 에스퍼에게 귀신 얘기를 언급하다니.

나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옆에서 엎드려 총을 겨누고 있던 주환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 중사, 괜찮습니까?”

“그, 그그그럼요……. 이런 곳에서 10년간 몬스터를 잡았는데, 귀, 귀신쯤이야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나리는 염소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하며 귀신도 잡는다는 개소리를 해 댔다.

“아, 예…….”

딱 봐도 여기서 제일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주환은 모른 척 나리의 자존심을 지켜 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귀신 따윈 겁내지 말라며 안심을 시켜 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흐잉. 유일한 소령니이임…….’

나리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제 손을 잡아 주던 일한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일한이 웃어 주면 무서운 생각이 싹 사라졌었는데 말이다.

나리는 주환을 흘긋거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잠깐 가이딩해 달라고 할까?

아까 너무 진하게 키스를 나눈 바람에 손을 잡아 달라는 타당한 명분이 없긴 하지만…….

“이나리.”

섬뜩한 목소리가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히익!

“네엑! 주, 중사 이나리!”

나리는 비명을 꽥 지르며 뻣뻣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

뭐야? 저 과잉 반응은.

강이 팔짱을 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나리를 쏘아보았다. 나리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번쩍 올린 가드를 내리고 강을 흘끔흘끔했다.

“이 중사 쉴드에 차단 어빌리티 있지?”

차단 어빌리티?

공격용 어빌리티도 아니고, 방어용 어빌리티 중에서도 그 외로 분류되었고, 활용이 애매한 어빌리티라서 기재하지도 않는 어빌리티였다.

쉴드의 등급이 높을수록 부가 효과처럼 소리와 통신용 주파수, 빛은 물론 다른 에스퍼들의 파동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어빌리티이기는 했지만, 따로 써 본 적은 없었는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걸까.

심장이 마구마구 두근거리는 게 뭔가 불길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나 따라와. 그리고 구 상병도 차단 어빌리티 있다고 했으니까 따라와. 가이드는…… 구 상병 페어가 하고.”

강은 주환을 건너뛰고 다른 가이드를 찍었다.

아니 왜?

쟤는 페어로 데려가고 나는 우리 듬직하신 박 소령님을 빼고 데려가는 건데요!

차마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할 수 없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나리는 아까부터 빈맥으로 뛰는 심장을 쥐고 비틀거렸다.

“하아, 하악, 저어. 연대장님…….”

바로, 꾀병 어빌리티.

강이 나리를 돌아보았다.

“저희, 어디로 가는 겁니까?”

“A조와 합류해서 김상희 이병 쪽으로 간다.”

악!

이놈의 소설에서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무섭게 들어맞는다니까?

나리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콜록거렸다.

“보시다시피 제 몸 상태가 좋지 못하여 여기서 지원하면 안 되겠습니까?”

“넌 가만히 쉴드만 써. 움직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그럼 박주환 소령님도 같이…….”

“왜?”

강이 사납게 되물었다.

“그야, 제 페어시잖아요.”

“아까 너네 꽤 오래 키스하던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나? 아니면 그새 같이 죽으러 가야 할 정도로 애틋해졌나? 오늘 6명이나 전사한 전쟁터 속에서 썸 타느라 바쁜 A급 2명을 동시에 잃고 싶진 않은데 말이지.”

“…….”

싸하게 피가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나리는 얼이 빠진 얼굴로 강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가. 나한테 먼저 입술을 댄 건 최 대령님이신데……. 6명이나 죽은 것이 내 탓인 것처럼 말하는 건가. 왜……!

나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때 주환이 나리의 옆에 서서 강에게 말했다.

“최강 대령님, 이나리 중사 대신에 제가 가겠습니다. 몸 성한 제가 이 중사 어빌리티를 이용하는 편이 작전상 낫지 않겠습니까?”

누가 듣더라도 나리보다는 주환이 가는 것이 나았다.

“…….”

강은 입 안을 짓씹으며 주환을 노려보았다. 주환은 아무런 표정 없이 강의 노여움에 맞섰다.

누구 하나 헛기침 소리를 낼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되었다.

“……방해되면 가차 없어.”

강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강이 저 대신 주환을 데리고 가는 줄 알았더니만.

“둘 다 따라와.”

흐으윽.

역시나 속이 비비 꼬인 강이 뱉은 말을 취소할 리가 없었다.

나리는 입술을 쭉 빼고 씨근거리면서 강의 너른 등판을 노려보았다.

저 싸가지. 여자 친구한테 흉하게 차여 버렸으면 좋겠다!

“이 중사. 뭐 해?”

강이 홱 뒤돌아 제자리에 서 있는 나리를 불렀다.

“가고 있지 말입니다!”

나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래, 그깟 귀신쯤이야……. 네 녀석보다 고약하겠어?

주환의 뒤에 서서 쉴드 막을 치려고 하는데 강이 나리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네 자리, 내 옆이야.”

나리는 이를 악물고 강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강은 나리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네 옆에 있으라고 한 거, 네가 한 말이란 거 잊지 마.”

아파.

나리는 그렁그렁 차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강을 쏘아보았다.

“네에……. 제 한 몸 바쳐서 최 대령님‘도’ 지켜 드릴 겁니다. 대령님이야말로 남들 오해하지 않게 말 좀 가려 주십시오.”

“뭐?”

“전 최 대령님께 관심의 ‘기역 자’만큼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

까드득…….

강은 화가 머리끝까지 다다랐다. 황에덴이 어디에 있는지 불분명한데도 참고 심장 안에 잘 갈무리해서 걸어 잠근 파장이 화악 거꾸로 치솟았다.

이글이글 넘실거리는 강의 파장에 그의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나리의 군번줄과 옷자락까지 펄럭거렸다.

“이나리.”

“네. 중사, 이나리…….”

“나도 너한테 관심 X도 없거든.”

“참으로 다행입니다아…….”

“그러니까 입 닥치고 일이나 해.”

오오냐. 닥쳐 주마!

나리는 보란 듯이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고 입 지퍼를 쓱 그었다. 그러자 강의 반듯한 이마 위의 핏대가 툭 불거졌다. 강은 그대로 나리의 허리춤을 잡아서 제 어깨 위에 턱 올렸다.

“아악! 내려 주십시오! 제 다리는 멀쩡하다고 했잖아요!”

거꾸로 매달린 나리가 강의 등을 붙잡고 툭툭 쳐 댔다.

“닥치라고 했지.”

강이 사납게 으르렁댔다.

열받은 최강과 눈 돌아간 개나리의 파장에 짓눌린 부대원들이 주환에게 살려 달라며 끙끙거렸다.

“……큽, 쿨럭.”

휘몰아치는 두 상급 에스퍼의 파장에 낀 초보 가이드―발현한 지 대략 100일 됨―만 머리가 아팠다.

“B조는 안해란 중위가 맡아서 남은 몬스터 처리하고, 구 상병 페어, 박 소령은 나 따라서 와.”

강은 그렇게 말하고 한 손에는 대괴수용 소총을, 다른 한 손에는 나리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윽! 악! 큽! 읍! 악! 내려, 주, 십! 악!”

부상자한테 이래도 되나?

이건 분명 보복성 과잉 처벌이다.

강의 어깨에 걸쳐진 나리는 지옥행 멀미와 극강의 코어 운동을 받으며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래, 귀신보다 최강, 이 미친 인간이 더 무서운 걸 깜박했다.

❖ ❖ ❖

군법을 어기고 위험 지역에 들어간 황에덴이 죽든 말든 강이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종의 몬스터들이 협력하여 총공세를 벌이며 자신을 방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일한이 있는 부대와도 연락이 일방적으로 끊긴 걸 보면 분명 황현균 대통령이 그를 압박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먼저 황에덴을 사로잡아야 했다.

문제는 그가 엄선해서 끌고 온 다섯 소대 중에도 황현균의 끄나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특히 B급 이상의 가이드들은 거의 중앙 정부의 입김을 받았을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박주환 소령, 먼저 가지?”

“가이드 포지션은 후방 아닙니까?”

“넌 예외지. 튼튼한 쉴드를 앞에다 쓰지, 뒤에 쓰나?”

그들 중 제일 위험한 놈은 박주환이었다.

해군 소속으로 정기적으로 상부에 보고하며 나리를 데려가려는 목적이 뚜렷했으니까.

일한이 그를 회유하려고 여러 차례 그의 속을 떠보았으나 주환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회색분자였다. 그것도 높은 매칭률로 언제든 나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그가 상부에서 받은 명령이 나리를 납치하거나 죽이는 걸 수도 있었다. 강으로서는 반드시 두 사람이 거리를 두게 만들어야 했다.

여차하면, 죽인다.

강은 앞서 달리는 주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으흑! 으! 악! 대, 대령님, 죄, 송! 압! 돠. 내려, 주십, 윽!”

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팔로 나리의 두 다리를 잡고 산등성이를 내달렸다.

허옇게 질린 나리의 얼굴은 피가 쏠려 벌게졌다. 차라리 내동댕이쳐 주면 좋으련만, 떨어질 듯 말 듯 죽을 맛이었다.

어우, 씨.

나리는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을 왼팔 하나로 지탱한 채 생각했다.

최 대령님 체력 되게 좋으시네. 신체 강화 어빌리티도 안 쓰고 있는 게 분명한데, 항상 순간 이동 치트키를 쓰며 돌아다니던 사람이 언제 이런 체력을 길렀단 말인가!

아아, 탈탈 털린다.

내 멘탈, 내 영혼, 그리고 내 내장 지방이…….

“A조 상황 보고해.”

- 알파01 C-60, 사, 상황 보고……. 김상희 이병과 500M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에, 에스퍼들 파장이 컨트롤이 되지 않습니다. 자꾸 이상한 노래가 들린다고 하면서.

“노래?”

- 예. 김상희 이병 쪽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허밍이 울린다고요. 가이드들은 지금 페어 진정시키기도 벅차고, 페어 없는 에스퍼는 자꾸 정신 나간 놈들처럼 이탈하려고 합니다.

“이 중사. 감지 어빌리티로 노래 방향 어딘지 알아내.”

“예엑! 귀, 귀신 소릴 들으라고요?”

나리가 고개를 퍼뜩 들고 소리를 빼액 질렀다.

시, 싫어어어!

그건 못 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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