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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80)화 (8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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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그의 연인이었던 에스퍼

최강과 그의 연인이었던 에스퍼.

누군가 나리에게서 강을 지우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생판 남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흔적이 짙고도 깊었다.

그런데 왜 그때 떼어 놓지 않고 하필 지금에서야 나리를 먼바다에 떨어트려 놓고 최강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김성권 중령님?〉

그러나 그 이후로 김 중령은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태형도 어찌 된 일인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주환은 괜한 걸 물은 느낌이 들었다.

“후우.”

주환은 나리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웃으면 예쁘고 잠들면 더 예뻐 보이는 여자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이딩에 연연하지 않는 에스퍼, 삭제된 10년 전의 가이딩 기록, 그녀의 머리에 난 흉터, 그가 키스를 할 때면 불현듯이 튀어나오는 반응들…….

그리고 나리를 지목하여 해군으로 데리고 나오라던 상부의 지시, 그 지시를 어기고 보류하자 행방불명된 소민까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 제일 이상한 것은 과거가 불분명한 나리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강도 아니었다.

주환은 이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자기 자신이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얄미운 유일한의 말이 어째서 신빙성 있게 느껴지는지. 천하에 이런 또라이가 없을 것 같았던 최강의 결정들에 반박할 마땅한 근거가 없다고 생각되는지. 주환은 여태껏 몸담은 직분과 소속을 의심하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어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당신의 가이드가 된 걸까, 정말로 우연인 건가? 아니면 이곳에서 너를 가장 멀리 데리고 갈 수 있는 명분이 있는 사람이 나라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를 가이드로 발현시킨 걸까.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상관없었다.

페어를 죽게 둘 수 없었다.

주환이 몸을 돌려 손끝을 미끄러뜨리고 그녀의 턱을 추켜올렸다. 나리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가 살짝 벌어진 나리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대려던 순간, 나리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들렸다.

“어?”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린 거라면 모른 척 눈을 감고 있었어야지.

주환이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몰래 가이딩하려고 했는데…….”

나리는 깜짝 놀란 얼굴로 주환을 쳐다보더니 저만치에서 팀장들과 작전 회의 중인 강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환이 나리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등만 기대고서는 다음 전투가 힘들 것 같아 보여서 말입니다.”

“……아.”

얼얼한 입술 위를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다디단 가이딩 때문에 나리는 좀 전에 강이 제 입술에 인사한 기억을 떠올렸다.

강이 여자 친구가 있든 말든, 그가 자신에게 맘이 있든 없든 동의도 없는 입맞춤을 하는 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나리는 아직도 얼얼한 입술을 벅벅 손등으로 문지르고 말했다.

“제가 눈치 없었습니다. 다시 졸아 보겠습니다.”

“…….”

나리는 주환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쿠우울, 코 고는 소리를 냈다.

주환은 살짝 도둑 키스 하려던 마음이 싹 가시면서 웃음만 나왔다. 그가 다시 돌아앉으려고 하자 나리가 주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중사.”

주환이 나지막이 나리를 불렀다.

나리는 입술을 도톰하게 모은 채 열심히 자는 척했다.

“최강 대령님과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나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가만히 못 들은 척하는 건가 싶더니 입술을 씰룩쌜룩 말아 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아무 일도 없었다.

여태껏 까칠하고 빈틈없이 철벽을 둘러서 여자 친구는커녕 연애사가 심히 걱정스러웠던 분이 자기는 여자 좋아한다면서 헤픈 남자처럼 제 입술에 살짝 인사만 했을 뿐이다.

세게 문질렀는데도 가이딩 하나 실리지 않고 맨살이 닿는 감촉에, 강의 체향과 숨결과 온도까지 세세하고 생생하게 떠올라서…….

나리는 눈을 뜨고 주환에게 말했다.

“키스…… 안 해 주실 겁니까.”

주환은 나리의 뺨을 감싸 쥐고 입술을 삼켰다. 그 어떤 맛보다 부드럽고 다디단 향이 입 안에 퍼져 나갔다. 머릿속이 저릿저릿해지고 아랫배에 열감이 감도는 화학적 연쇄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도 굳어져 가는 나리의 심장은 엇박으로 뛰고 있었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간절하게 주환을 붙잡았다.

아, 미치겠다.

이러면 안 돼. 안 되는데…….

나리는 앉아 있던 엉덩이를 들고 턱을 비스듬히 틀었다. 하아, 숨을 들이마신 나리가 다급하게 다시 입술을 겹쳤다.

주환은 자신의 혀를 옭아매고 잇몸을 훑는 나리의 적극적인 모습에 당황했다. 강의 눈치를 보며 스킨십을 피하기만 하던 나리가 달려들 줄은 몰랐었기에.

“……흑.”

입술을 떨어트린 나리가 주환을 꽉 붙잡은 채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이를 지르물고 물기가 묻은 가쁜 숨소리를 억지로 삼켰다.

아, 제기랄…….

최강과 무슨 일이 있었구나.

주환은 잘게 떨리는 나리의 어깨를 감싸 안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손을 올렸다가 주먹을 쥔 채로 떨어트렸다.

“…….”

통신실 중앙에서 작전 회의 중이던 강이 주환과 나리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굳게 다물린 입매가 비틀리며 가이드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씨X.

강의 잇새로 새어 나온 거친 욕설을 들은 에스퍼들은 움찔거리며 수작질을 멈췄다.

나리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강이 했던 말을 내뱉었다.

하, 씨이X.

분명, 강이 들었을 거다. 상관한테 욕도 하고 너 정말 미쳤냐고 하겠지. 그러면 미쳤다고 바락바락 따질 생각이었다.

정말 미친 거 같아서 말이다.

이럴 리가 없어야 하는데.

페어와 진하게 나눈 키스보다도 저 미친놈의 소꿉놀이 입맞춤이 더 생생하다는 게 말이 되냐고.

나리는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드론이 이 일대를 1시간 동안 정찰했지만 황에덴 생도의 위치 파악이 되지 않는다. 예상하는 위치는 세 군데, 해가 지기 전까지 황에덴 생도를 안전하게 생포하는 것으로 작전 목표를 변경했다.〉

나리는 2시간 전의 작전 브리핑을 상기하며 한쪽 눈을 감고 가늠쇠에 표적을 대었다. 나리의 다갈색 홍채에 희미한 빛이 감돌며 조리개가 확장되었다가 다시 좁아졌다.

가늠쇠 가운데 놓인 깨알 같은 점이 확 당겨졌다. 몬스터화된 들개였다.

덤불이 무성한 폐가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툭 치면 떨어질 것 같은 눈알을 굴리며 코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뾰족한 주둥이에 묻은 핏자국을 보아하니 방금 배를 채운 녀석이었다.

무엇을 먹은 걸까. 몬스터? 아니면…….

윽! 생각하면 안 된다.

나리는 속이 느글거리는 것을 참고 가늠자를 조정했다.

“솔개 A-09, 동쪽 78도 방향 전방 720M 부근, B 지역 들개와 떼까마귀 확인. 사람의 흔적은 없습니다만 들개들이 포식한 대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 독수리 A-01, 좌표 127°11′37.51″, 38°7′26.09″ 부근 들개 점심 확인. 황에덴 생도를 잡아먹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발포하십시오.

벙커 앞 저격수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들개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솔개, 처리 완료. 3번째 폐가 안 확인하십시오.”

- 독수리 B조, 폐가 침투. 3, 2, 1……. GO!

나리는 참았던 숨을 내쉬고 폐가 주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황에덴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은신 어빌리티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해서 감지 어빌리티를 최대로 끌어 보았지만 폐가 안으로 들어간 8명의 독수리 팀 소대원들뿐. 그 외의 발소리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솔개 팀 팀장인 정 상사를 쳐다보았다. 정 상사도 아무런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 독수리 A-01, B 지역 폐가 세 군데, 클리어. 동물인지 사람 것인지 모를 뼈만 잔뜩 있고, 산 사람 머리카락 하나 안 보입니다.

폐가 밖으로 나온 해란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리가 있는 고지 쪽을 쳐다보았다.

- 아니, 무슨 애가 발자국 하나 없습니까? 우리 대낮에 무슨 귀신한테 홀린 거 아닙니까? 여기 굴러다니는 게 다 뼈밖에 없어.

해란은 겁도 없이 하얀 해골을 뻥 걷어찼다.

귀, 귀신?

나리가 허옇게 질려서 굳어 버렸다. 귀신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에서 말문이 트였다.

- 그럴지도 모릅니다. C11 구역의 산들이 원래 무덤이었다고 유명하지 않습니까? 전부터 수색 팀들이 종종 C11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C11은 가장 가기 싫다 하지 않았습니까.

악, 그만.

- 야, 난 작년에 여기서 살려 달라는 소릴 들었다니까? 나만 들은 게 아니라 에스퍼는 다 들어서 온종일 수색했었거든? 그런데 아무도 없어서 개고생만 했다.

- 여기서 낙오돼서 죽은 애들 많아. 정신 똑바로 차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 못 들었어…….

나리는 귀에 꽂은 이어피스를 뽑아 버리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필이면 A급 감지 어빌리티를 최대치까지 끌어 올린 상태였다. 특수 연대 내에서 왕왕 회자되는 괴담처럼 귀신 소리를 들을까,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목구멍이 바짝바짝 탔다.

이나리, 얼른 다른 생각 해. 빨리 밝고 행복한 생각을…….

나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행복 회로를 열심히 돌렸다.

‘내가 만약 전역을 한다면, 그간 모은 돈으로 페라리 1대 뽑고, 람보르기니도 1대 뽑고…….’

그때, 남쪽으로 간 A조에서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 알파01 C-60, A구역에서 사람 1명 보입니다! 그, 황에덴 생도는 아니고 복장이 헌병대 쪽인데, 에스퍼 명찰에 이병 김상희라고 적혀 있고.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나리의 뒤에 서 있던 강이 말했다.

“김상희 에스퍼?”

지난밤, 장 소령이 에덴을 찾아오라고 보냈다던 에스퍼 중 하나였다.

- 예. 코피 흘리면서 넋이 빠진 듯이 한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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