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나 이거보다 더한 짓도 했었어
강은 어깨에 걸쳤던 검집을 나리의 옆에 내리꽂고 나리의 턱을 들쳐 올렸다. 그대로 허리를 접어 나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가 턱을 기울였다.
“괘, 괜찮습니다……. 굳이 이렇게 안 하셔도…….”
나리가 아주 자그맣게 말했다. 발갛게 열감이 돌던 나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나리는 숨도 못 쉬고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난 안 괜찮아.”
체온이 묻은 강의 숨결이 나리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스르륵 두 입술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맞부딪혔다.
알 수 없는 향과 맛이 입술 위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쿵쿵, 쿵쿵, 가이딩 하나 섞이지 않은 생 날것의 감촉이 말초 신경을 타고 점점 증가하고, 따끔따끔하게 날이 선 긴장감이 나리를 얼얼하게 마비시켰다.
강은 헤집어 삼키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짧고도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멈췄다.
가이드도 없는데 혹시 또 나리의 머릿속에 심어진 프로그램이 이 순간을 차단하고 지워 버리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컸다.
“…….”
나리는 고장 난 것처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강을 쳐다보더니 눈꺼풀을 끔벅거렸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나리의 눈동자가 강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 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황망하게 벌어진 나리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안타까움이 짙은 강의 눈빛이 너무나도 어색해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다.
“에, 뭐……. 최 대령님께서 여성분과 사귀고 계셨는지 전혀 몰랐었습니다. 그……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멋대로 큰일 날 오, 오해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
강이 움찔거렸다.
이쯤이면 나리가 고장 난 듯이 발작해야 하는데 예상외로 나리의 반응은 입맞춤 전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저어, 이, 이 정도 입맞춤이야 다른 나라에서는 가벼운 인사 정도이니까……. 인사로 치겠습니다.”
나리는 가벼운 인사라고 말했지만, 정작 얼굴은 연병장을 스무 바퀴는 돈 것처럼 화끈거리고 어지러웠다.
설마 지금 내가 그때처럼 개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뭉텅뭉텅 공중으로 흩어지는 심장 소리까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나리.”
“네. 중사 이, 나, 리.”
움츠렸던 나리가 두 눈을 질끈 감고 허리와 어깨를 꼿꼿하게 세웠다.
“인사 아니야. 나 이거보다 더한 짓도 했었어.”
“어우. 그, 그러셨습니까? 아니, 당연히 그러셨겠죠! 와! 대령님 여자 친구분은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너무나도 밝고 어색하고 가증스러운 칭찬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 친구분이 나리 본인이었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해서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 건지. 멀쩡한 나리의 모습에 강은 의구심이 들었다.
“……야.”
현재 100m 밖 모깃소리도 들을 수 있는 나리의 청력이 강이 흘린 단어를 놓쳤다.
“예?”
나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너라고.”
“저 말입니까? 제가 왜요?”
강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 여자가 너라고. 나리를 붙잡고 백 번은 넘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또 억하심정을 토해 냈다가 어렵게 입술이 닿았던 일이 나리의 머리에서 지워질까 봐 말을 삼켰다.
“…….”
강이 아무 말도 없이 나리를 쳐다보며 뒤로 물러났다. 뭐가 그리 답답한지 깊은 한숨이 땅 밑으로 꺼졌다.
나리는 미간에 힘을 주고 강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대체 왜 저래?
문맥 이상해지게 왜 그 타이밍에 말을 하다가 말아? 누가 들으면 대령님이랑 내가 뽀뽀보다 더 찐한 스킨십을 한 줄 알겠네.
나리는 제게서 뒤돌아선 강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제 손끝이 닿은 것과 다른 생경한 느낌이 아직도 얼얼하게 남아 있었다.
아이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스토리인 건가.
강이 못되게 굴어서 일한이 강을 찬 건 줄 알았는데, 애인이 생긴 강이 일한을 찼나 보다. 아니, 우리 유 소령님이 어때서!
생긴 대로 얼굴값을 톡톡히 한다고 나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구시렁거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치를 감당할 만큼 참 예쁘고 좋으신 분일 텐데, 에효……. 어쩌다가 최 대령님이랑 엮이게 되었나…….”
“…….”
강은 미간을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너야. 너라고!
이나리, 네가 먼저 날 꼬셨었잖아!
강은 나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다 토해 버리고 싶었다.
“후으으……. 진짜!”
쾅!
강이 애꿎은 발전기를 걷어찼다.
“으악.”
멍하니 앉아서 툴툴대던 나리는 곧바로 팔을 들고 몸을 움츠렸다. 혀 깨물 뻔했다. 안 그래도 1년밖에 안 남은 고장 난 심장을 가진 에스퍼한테 갑자기 성질을 부리면 어떡하라는 건가.
나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을 보며 정색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놀란 눈을 한 나리를 본 강은 미칠 지경이었다.
“…….”
원망이 가득 찬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울 것같이 일그러진 강의 얼굴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팟!
갑자기 켜진 밝은 빛에 두 눈이 멀었다.
아악, 나리는 적외선 화면을 끄고 욱신거리는 눈을 짓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끼기긱기이익! 퉁! 투둥!
쉴드 막을 둘러싸고 긁어 대던 수십 마리의 박쥐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서로 부딪히고 혼비백산 흩어지고 맥없이 추락했다.
나리는 손가락 사이로 실눈을 뜬 채로 강을 찾았다.
강은 그 한가운데 눈을 감고 곧게 서 있었다.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아.”
강이 더운 숨을 내뱉는 그 순간, 나리는 심장이 지끈거렸다.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감쌌다.
천하에 못된 싸가지 최강이 고고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아픔을 우러러보는 나리는 천하에 못된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저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니라 자신이 잘못된 거 아닐까…….
나리는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것같이 심장이 엇박으로 뛰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 ❖ ❖
“어떻게 고친 겁니까?”
어두운 벙커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연장을 찾던 주환이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리는 주환의 옷깃을 잡고 강을 흘끗 쳐다보았다.
강은 한쪽이 찌그러진 발전기 앞에 서서 팀장들의 보고를 받느라 바빠 보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강의 파장 때문에 기기들이 오작동을 일으킨 경우는 봤지만, 무식하게 손맛으로 기기를 고친 것은 처음 봤다. 다만, 이 얘기를 강이 듣는 곳에서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그동안 입조심하지 않아 쌓인 업보 때문에 입술에…….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그건 인사다. 인사!
나리는 붉어진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주환은 묵묵하게 나리와 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저 둘 사이에 흐르는 파장이.
“박 소령, 이 중사. 통신실로 이동.”
강이 총대를 고쳐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주환이 나리의 앞을 가로막으려고 하는데, 나리가 먼저 한 발 뒤로 물러나 주환의 등 뒤에 섰다. 그러고는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강을 경계했다.
“……?”
강은 작게 혀를 찼다.
뭐 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무섭게 경계를 한단 말인가.
“제가 후방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나리가 권총을 뽑아 들고 말했다. 강이 전방 1번, 주환이 2번, 자신이 3번으로 가겠다고 한 말이었다.
“안 됩니다.”
“이 중사 2번. 박 소령 1번. 내가 3번. 이동해.”
나리는 입 안을 질끈 물고 자신의 뒤로 빠지는 강을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싫은데.
대령님이 내 뒤로 빠지면, 내 뒤통수 따갑고 자꾸 신경 쓰여서 싫은데.
나리는 주환의 어깨와 강의 그림자를 쳐다보며 발을 옮겼다.
밝은 빛을 피해 몸을 숨기지 못한 박쥐들은 성을 내며 벽에 부딪히고 동족을 물어뜯으며 맹독성 가스와 피를 흘렸다.
주환의 걸음이 빨라지고 그 뒤를 따라가는 나리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사람의 발소리를 들은 몇몇 박쥐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앞선 주환이 반사적으로 총을 쐈다.
탕!
하치만 총알은 박쥐들이 달려드는 쪽을 비껴 나가 애먼 벽이 파였다. 큰 소리에 눈먼 박쥐들이 주춤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이 검집째 휘둘러 박쥐들을 멀리 쳐 냈다.
주환은 나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저쪽에서 해란이 통신실 문 앞에 나와 나리에게 크게 손짓하고 있었다. 해란의 은신 파장 범위에만 들면 폐부를 죄는 쉴드를 해제할 수 있었다.
뒤에서 달리고 있던 강이 나리와 주환을 노려보며 검집을 꽉 움켜잡았다.
앞으로 20걸음……. 10걸음……. 5걸음…….
나리는 해란의 파장 안에 들어오자마자 가까스로 유지하던 쉴드를 거뒀다. 주환과 나리는 하아, 하, 턱까지 다다른 숨을 몰아쉬었다.
통신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퍽, 발길질을 했다.
“손 놔라.”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주환이 인상을 팍 썼다.
해란과 다른 사람도 강이 왜 저러나 싶어 얼굴을 굳히며 나리를 쳐다보았다. 이쯤이면 미친 개나리가 입에 거품을 물고 ‘연대장님은 왜 남의 가이드를 걷어차는 것이냐.’ 하며 대들어야 하는데 조용했다. 아무 말도 없이 주환의 뒤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팀장들은 보초 순번 정하고, 4시간 후에 C11 2차 작전 들어간다. 쉬어.”
“예!”
강이 쉬라고 해도 모두들 늘어트린 어깨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대답했다.
페어 손 좀 잡았다고 발길질을 하는데, 오붓한 가이딩과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맞을 각오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 ❖ ❖
장대신 소령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넣어 둔 약통을 꺼냈다. 엊그제부터 그의 고혈압 수치는 매시간 갱신 중이었고, 눈앞에서 울리는 통신음은 그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발신자 확인 불가]
대통령 혹은 그의 비서실, 혹은 에덴을 납치해 협박하려는 단체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장 소령은 혈압이 터져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가 약을 꿀꺽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많이 바쁜가 보군. 장대신 소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