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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77)화 (7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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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 왜? 증명해 줘?

주위에 느껴지는 가이딩이 미미한 덕에 나리는 눈이 팽글팽글 돈다는 말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숨결의 맛과 온도, 곧게 뻗은 강의 눈썹 한 올까지 선명하게 망막에 박혔고, 제 입술을 짓누르는 강의 손에 난 지문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흉측한 박쥐 떼에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게 하필 강이라서 나리는 미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였는데, 신경 쓰이면 안 되는데…….

안 된다는 생각만 맴돌고 눈앞에 바짝 다가온 남자의 모든 게 자신의 경계 안으로 범람했다.

좀 떨어져야겠다.

나리가 뒷걸음질을 치며 더 구석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있던 쉴드가 서서히 움직이며 울렁거리자 박쥐 떼의 시선이 일제히 나리에게로 쏠렸다.

에스퍼만 예민한 것이 아니다. 에스퍼의 파장을 감지하는 것은 몬스터도 마찬가지. 견고해 보이던 쉴드 막에 이상이 잡히자 몬스터들은 슬금슬금 벽을 타고 이동했다.

뭔가 이상하단 걸 알아차린 강이 엉덩이를 뒤로 물리는 나리를 잡았다.

뜨겁다. 강이 미간을 좁히며 나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너 열나는데?”

나리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저 열 없습니다. 최 대령님께서 저 때문에 열불 나셔서…… 죄송합니다.”

“…….”

강은 나리의 손목을 잡고 워치에 비친 상태창을 확인했다. 모든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급격히 요동쳤다.

“난 정상, 넌 지금 38.0℃.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에이, 머, 멀쩡하……네요. 어, 음, 생리 때가 오나? 에스퍼가 뭐 그 정도 미열 있는 거쯤이야…… 늘 그렇지 말입니다.”

“뭔 소리야.”

강의 눈에 비친 나리는 멀쩡한 척, 초점이 흐릿한 눈과 어눌한 발음으로 횡설수설하며 구석으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에서 손을 뗀 강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난색을 띠었다.

주환도 없는 마당에 폭주 전 증상인 건지, 아니면 좀 전에 어딜 다친 건지, 상처가 덧나 염증이 생긴 것인지 강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나리.”

강은 삐질삐질 발끝을 밀어 뒷걸음질 치는 나리를 붙잡았다.

잡지 마.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

나리는 강의 손아귀가 자신의 거짓말을 잡은 것처럼 느껴졌다.

서늘한 손이 솜털이 바짝 선 이마에서 얼굴을 지나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

“어디 다쳤어? 아니면 가이딩 문제야?”

무미건조하면서도 낮게 울리는 음정, 어조, 어투, 단어의 뜻이 머릿속에 프로세싱되기도 전에 다른 정보들이 들이닥쳤다.

쿵쿵, 쿵쿵……. 혈류의 움직임과 강의 속눈썹 옆으로 지나가는 미세한 먼지까지. 증폭된 감각들이 나리의 뇌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리는 굳어 버린 입으로 가쁜 숨만 내쉬었다.

“으흑. 그, 저기, 그…… 흣, 손 좀, 놓고…….”

“말을 똑바로 해.”

패닉. 나리는 그 밑도 끝도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었다.

강은 쉴드 가까이 다가온 박쥐들을 흘긋 보며 입 안을 짓씹었다.

“가만히 좀 있어. 상처 부위만 확인할 테니.”

강이 나리의 옷깃을 쥐고 벌리자 붕대로 감싼 어깨를 드러냈다.

“아니, 최, 최강 대령님. 그게 말입니다…….”

나리는 필사적으로 강을 밀어냈지만, 겨우 쉴드 한 겹 유지하는 부상자가 한 팔로 버둥대 봤자 강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어깨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붕대에 비친 핏물도 없었다. 적외선 화면을 끄고 찬찬히 봐도 총에 맞았다거나 스쳤다거나 몬스터의 독에 당한 흔적은 없었다.

당연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다치게 안고 뛴 사람이 그 자신이었으니까.

“…….”

그렇다면 문제는 가이딩이었다.

그건 강이 어떻게 해 줄 방도가 없었다. 강은 나리의 옷깃을 다시 여미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아, 씨X.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온 건 한숨과 함께 욕 1꼬집, 그리고 뭐라 뭐라 의미가 와 닿지 않는 단어들뿐이었다.

“내가 가이드도 아니고, 너한테 ……한다고 해서 네 기분만 더럽겠지.”

강이 두세 걸음 떨어져서 나리에게 등을 돌렸다. 주환이나 다른 가이드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리는 고장 난 발전기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강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리는 뻑뻑한 두 눈을 깜박거리며 머리 위에서 헛도는 강의 마지막 말을 입으로 되뇌었다.

“내가, 가이드도 아니고……. 너한테 키스한다고 해서…… 네 기분만, 더럽겠지……?”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내가…… 가이드도 아니고……. 너한테 키스한다고……. 뭐야, 왜 최 대령님이 나한테 키스를 해……?”

두 눈덩이가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와, 나 미쳤나 봐. 1년 남았다더니 벌써 죽을 때가 됐나 봐. 막 헛소리가 들려…….”

나리는 허허, 힘없이 웃으면서 눈을 가렸다. 열이 있다던 강의 말대로 얼굴이 뜨끈했다.

촉감이 예민해지니 손에 닿은 열감이 속이 울렁거릴 만큼 징그럽게 느껴졌다.

끼기기…… 이익…….

끼긱, 끼긱, 끼긱…….

주위를 맴돌던 박쥐들이 약해지는 쉴드 막을 긁어 댔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몬스터가 자신의 뇌를 긁어 대며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다 박쥐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새까만 진액이 엉긴 더러운 것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박쥐의 진액에 괴로워하며 거품을 물고 쓰러진 전우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 톡 쏘는 역한 냄새와 끔찍하게 징그러운 것들이 자신의 몸에 기어오르는 것만 같아서 나리는 입을 틀어막고 토기를 삼켰다.

“우윽. 읍!”

나리가 상체를 숙여 엎드리고는 헛구역질을 해 댔다. 회색 바닥에 점점이 떨어지는 신물이 핏방울처럼 보였다.

가이딩…….

주환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아니면, 일한이 순간 이동 해서 날 좀 안아 주면 좋겠다.

“못 버티겠으면, 쉴드 거둬.”

강이 말했다.

나리가 벌게진 두 눈으로 강을 올려다보았다. 강은 검집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 삐딱하게 서서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강의 등 뒤로 수십 마리의 박쥐가 쉴드 막을 긁어 댔다.

강이 나리를 안고 순간 이동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빼앗기게 되면 발전기를 고치기 더 힘들어진다.

“그러면, 발전기를 어떻게 고칩니까…….”

“…….”

“조금 더, 버틸 수 있습니다. 박 소령님만 돌아오시면 괜찮아질…….”

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강이 무섭다고 그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들을 나리가 아니었다.

나리는 발전기를 붙잡고 강을 노려보았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말이다.

쉴드 밖이 아닌, 강을 보고 있으니 적어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기분은 사그라들었다.

“연대장님 때문이에요.”

나리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또 강을 탓했다.

“연대장님께서 자꾸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후우, 나한테 이상하게 굴잖아요? 예민한 에스퍼 신경 쓰이게…… 왜 그러세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하, 하아…….”

“오해? 누가 무슨 오해를 해?”

“최 대령님께서 저를 좋아한다고……. 박 소령님이 오해하잖아요.”

“…….”

맞아. 나 너 좋아해. 이제 그만 좀 좋아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네가 자꾸 날 신경 쓰이게 만들잖아.

강은 한동안 대답도 못 하고 가만히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쓰흐읍……. 차라리 전에처럼 머리 박고 있으라고, 장소 가리지 않고 구르라고 할 때가 나았지……. 씨이…….”

“…….”

하, 누가 굴리고 싶어서 굴렸나?

강은 나리의 튼 입술에서 난 핏자국을 보았다. 제정신 못 차리고 감히 자신의 앞에서 제 욕을 뱉는데도 강은 속으로 대꾸할 뿐, 잠자코 나리의 헛소리를 들어 주었다.

“대령님께서 그런 거 아니라고 좀 해 주세요. 최 대령님은 일밖에 모르시잖아요. 어떻게든 부대원들 살려 본다고 전술적으로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

“씨잉, 우리 최 대령님께서 연애할 때 아니라고 하면, 아니구나 하고 좀 알아듣지……! 밤낮없이 열심히 울 부대원들 이끄시면서 연애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유 소령님한테 차이신 분인데…….”

“야! 내가 누구한테 차여?”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뭐라는 거야?

강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따졌다.

예민해진 감각과 감정의 홍수에 빠진 나리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최 대령님께서 유 소령님한테…… 차였…….”

“아니라고.”

“어쨌든, 난 최 대령님 취향 아, 아닌데……. 왜…….”

“내 취향? 그건 언제 알았어?”

불행하게도 내 취향, 너잖아.

하필 너한테 코가 꿰여서 10년 동안 병신같이 살고 있잖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허?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아?”

“예.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말해 봐.”

“…….”

“뭔데? 내 취향이.”

나리는 신물을 꿀꺽 삼키고 상처 난 입술을 쭉 내밀고 씰룩거렸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강을 지그시 쳐다보던 나리가 말했다.

“최강 대령님 사람 보는 눈도 까다롭고 높지 말입니다. 연예인급으로 잘생겨야 하고, 머리도 엄청 좋고, 능력도 비상하고, 성격도 서글서글 착해야 하고, 눈치도 재빠르고, 집안도 좋고, 돈도 많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그…….”

“…….”

강이 팔짱을 끼고 매섭게 나리를 노려보았다.

아, 아닌가?

일한의 모든 장점을 대면 만민의 이상형일 터. 대충 찍어도 저 중 하나는 강의 취향 아니겠냐며 당당하게 말하던 나리는 강의 싸늘한 반응에 점점 말소리가 작아졌다.

나리는 눈을 좌우로 돌리며 강의 눈을 피하면서 결정적인 조건을 말했다.

“남자 좋아하시잖…… 악!”

쾅!

참다못한 강이 발전기에 주먹을 내질렀다. 강이 살기등등한 파장을 내뿜으며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나 완전 여자 좋아해. 그리고 나 사귀는 여자 있어.”

“에? 어, 언제부터요……?”

“언제부터긴. 처음부터.”

“그럴 리가 없는데…….”

나리가 덜덜 떨며 강, 본인의 진술을 부정했다.

그 모습이 가련한 토끼 같아서, 너무 얄밉고 어이가 없고 속에서 화가 나서……. 강은 상처 난 나리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꾹 눌러 벌렸다.

“왜? 증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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