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69)화 (69/148)

1664261035797.jpg

070. 정신계 에스퍼

치한은 무슨.

한적한 골목을 가리키며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하나도 겁에 질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선 파장이 소민의 목덜미를 조였다. 치한용 스프레이를 쥔 손이 움직여지지 않고 덜덜 떨렸다.

치한보다 더 무서운 정신계 에스퍼를 맞닥뜨린 소민은 암담했다. 저릿한 파장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아 보려 가이딩을 운신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민은 제 머릿속을 휘젓는 정신계 에스퍼의 공격에, 애써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왜, 이러……십니까.”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뭉개진 문장이 흘러나왔다. 발끝에 힘을 주고 버티려고 했지만 소민의 두 발은 여자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적한 골목 한쪽에 시동이 걸린 차가 보였다.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소민을 그 검은 세단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세단 뒷좌석의 문을 열고 소민을 밀어 넣었다.

“으윽! 이, 이렇게 파장을 사용할 게 아니라, 무슨 용무이신지 말씀을…….”

여자는 소민의 옆에 앉아서 싸늘하게 소민을 쳐다보았다.

비릿하게 일그러진 여자의 미소가 가로등 불빛에 반쯤 드러났다. 소민은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었다.

“저, 는…… 무고하…….”

“해군 사관 학교 차석까지 하신 분께서 자신이 왜 잡혀가는지 정말 모른다고요?”

비웃는 여자의 모습에서 한다희 소령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벌었던 1년의 유예 기간이 이 정도로 상부를 기만한 선택이었던 걸까.

팔다리를 마비시키던 파장이 목구멍과 혀, 눈꺼풀까지 퍼졌다.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눈도 못 뜬 채, 쉰 숨소리만 간신히 내쉬었다.

“대장. 타깃 확보했습니다.”

- 빨리 퇴각해. 공태형이 그쪽으로 가고 있어.

함장님…….

자신을 태우고 움직이는 차 속에서 소민은 태형의 차가운 손을 떠올렸다.

쾅!

끼이이이익!

갑작스러운 충돌에 검은 세단이 빙그르르 돌았다. 안에 타고 있던 운전사, 정신계 에스퍼, 소민 모두 크게 흔들렸다. 충격과 함께 터진 에어백에 귀가 먹먹해지며 소민은 정신을 잃었다.

“젠장! 뭐야!”

여자는 에어백을 치며 소리쳤다. 피 흘린 운전사가 총을 들어 차로 다가오는 태형을 쏘았다.

총알을 맞은 두꺼운 얼음벽이 유리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그 얼음 조각들 사이로 새하얗게 얼어 버린 태형의 속눈썹과 차가운 눈동자가 비쳤다.

- 지원조, 공태형 에스퍼 확인했습니다.

- 막아. 곧 그림자가 간다.

본부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양쪽 건물에서 소리 없는 총성이 태형을 향해 빗발쳤다.

❖ ❖ ❖

주환은 나리의 수술실 앞에 문지기처럼 서 있었다.

띵.

[소민 씨, 놓쳤어.]

띵.

[박주환.]

띵.

[이 개새끼야, 전화 받아. 명령이야.]

계속 시끄럽게 울리는 알림 소리가 주환의 귓바퀴 밖으로 맴돌았다. 동시에 언론의 시끄러운 입김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주환은 태형의 메시지를 무시하고는 마른세수하며 쓰디쓴 숨을 내쉬었다.

상부의 지시인가, 아니면 나리인가.

어느 쪽을 선택할 건지 재촉하는 일한과 강의 매서운 눈초리가 주환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주환은 기자들 앞에서 말했던 강을 떠올리며 머리를 짚었다.

재수 없는 미친놈이라 생각했던 강의 입에서 C급, S급 따지지 말고 규율대로 하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강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상부의 명령보다 자신의 신념을 세우는 불충한 태도가 오히려 더 군인다워서 주환은 혼란스러웠다.

이능력자 군인 집안에서 일반인으로 나고 자란 주환은 에스퍼인 동생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자신이 충직한 군인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말 자신의 힘으로만 부함장 자리까지 올라왔느냐고 따진다면 그건 아니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는 주환의 눈에도 명확히 보였다.

그런데도 강을 인정하면 나리를 뺏길까, 강이 맞서고 있는 윗분들의 힘에 과연 자신이 맞설 수 있을까, 주저하고 고민만 하는 제 모습이 치졸해 보였다.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꺼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나리가 나왔다.

“이 중사.”

주환이 나리에게 다가가자 일한이 주환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할 말이 많아 보이십니다. 박주환 소령님.”

“……비켜 주시죠.”

“싫은데요?”

일한은 주환의 어깨를 밀어냈다. 싸늘한 일한의 시선이 주환을 쏘아보다가 나리가 누워 있는 침대 레일을 잡고 밀었다.

“사람이 이 정도 말하고,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 충분히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도 좋은 사람 탈을 쓴 나쁜 놈이지만, 대놓고 회색 지대에서 양다리를 걸친 저놈이 더 나쁘지 않은가.

“지금 박 소령이 어느 쪽인지 정하지 않으면, 내일 제가 나리 중사 가이드로 출전할 겁니다.”

그때, 누워 있던 나리가 눈을 돌려 주환을 쳐다보았다.

“박 소령님…….”

허옇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주환의 낯빛은 어두웠다. 할 말이 있는 듯 굳게 닫힌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그의 눈은 일한의 어깨 너머에 있는 나리에게 향하고 있었다.

주환과 눈이 마주친 나리가 엄지를 추켜들었다.

“보다시피 전 괜찮습니다. 오늘 밤만 푹 쉬면 내일 작전에 문제없을 겁니다.”

“…….”

“아, 가이드님을 지켜 드린다고 떵떵거렸는데 이런 꼴이라서 못 미더우실 수도 있겠지만 어빌리티에는 하나도 문제가 없으니까요.”

주환은 이를 질끈 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나리였더라도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말이 나리에게서 나오니 왜 이리 속이 뒤집힐 것 같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

“이 중사.”

“예?”

무겁게 가라앉은 주환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정말, 내일 출전하실 겁니까.”

애써 웃고 있던 나리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무리하는 바람에 주환을 피하고 싶은 작전에 끌어들인 것은 아닐까.

“최강 대령님께서 일을 크게 만드는 바람에 여기서 훈련받는 것을 허락한 제 상관과 저도 곤란한 상황입니다.”

“아아, 곤란하시면 빠지십시오.”

일한은 눈꼬리를 세우고 주환을 쏘아보았다.

띵.

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주환의 승부욕에 불을 지피는 신호가 띵 울렸다. 주환은 무섭게 일한을 노려보았다.

“제가 왜 빠집니까.”

“곤란하시다면서요? 제가 가겠다니까요?”

“…….”

일한은 나리가 누워 있는 침상의 레일을 잡고 회복실 쪽으로 밀었다.

저걸 확 그냥.

주환은 일한에게 바짝 다가가 이를 세웠다.

“지금 SNS 사이트마다 뉴스 창이 어떻게 도배되고 있는지 아십니까? 윗선에서 최강 대령 편을 들지 못하게 여론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명령 불복종, 군사력 낭비, SS급 페어 불성사가 국가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래서요?”

일한은 일이 이렇게 악화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말투로 되물었다.

“최강 대령의 고집 때문에 부대 안팎으로 애꿎은 사람까지 피해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뭐, 더러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늘 쓰던 수법이라 놀라울 것도 없네요.”

일한은 큼직한 눈을 껌벅거리며 당황한 나리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비틀어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강이 불복종한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

“수조 원에 달하는 국방비와 이능력자 지원 예산 중에서 우리 부대 훈련장 하나 제대로 지을 예산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

“SS급 페어, 그거 어디에 쓰려고 한답니까? 몬스터 박멸? 아니면, 군사 독재?”

“…….”

“또 뭐가 있습니까?”

일한이 웃었다. 휘어진 눈매 속에 감춰진 예리한 눈빛이 주환의 속마음을 들췄다.

“박주환 부함장님께서 불편하고 곤란하시다면, 굳이 여기 남지 않아도 됩니다.”

일한의 말을 듣고 있던 나리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유, 유 소령님? 잠시만요.”

“나리 중사, 저런 남자한테 말도 붙이지 마요.”

“예? 제, 페어입니다만? 박 소령님 없이 작전을 어떻게 합니까?”

“나 S급 가이드예요. 못 할 거 없어요.”

일한이 나리의 턱을 추켜들고 나리의 입술을 쓸었다. 그 순간 주환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몸이 먼저 튀어 나가 일한의 손목을 낚아챘다.

“너도 너의 정의를 내세우면서 남이 받은 피해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 뭐가 다른 거지?”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노력할 겁니다.”

“그 노력, 꼭 이 작전 후에 꼭 받도록 하겠습니다.”

주환은 일한의 손목을 내던지며 잇새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일한은 벌겋게 손자국이 난 손목을 털면서 나리의 침대를 끌고 가는 주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아아, 나리 중사랑 페어가 될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는데……. 박주환 부함장님, 그냥 이 기회에 배 타러 가시라니까요? 예?”

“…….”

주환이 주둥아리 닥치라며 정색에 살기까지 더해 일한을 째려보았다.

훗.

이래저래 주환을 낚은 일한은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주환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며 약을 올렸다.

❖ ❖ ❖

나리는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와 숨소리가 실환가 싶어서.

“저어, 소령니이임…….”

나리는 압박감에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구멍 뚫린 어깨와 손바닥을 복구시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내가 아무리 튼튼한 에스퍼라지만, 환자 옆에 이렇게 바짝 붙어서 옴짝달싹 못 하게 하면 안 되지 않을까.

좌 주환, 우 일한 사이에 찌그러진 나리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내일 아주 중요한 작전인데 꼭 이렇게 자야 할까요?”

“예.”

“예.”

대답이 스테레오로 양쪽 귀에 울렸다. 나리는 아랫입술을 꽉 물고 볼 것도 없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두 분께 과분할 정도로 가이딩을 받았지 말입니다. 이만 두 분 모두 저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일한은 나리의 팔을 꼭 껴안고 나리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강이 가이딩해 주고 오라면서요.”

아니, 가이딩해 주고 오라며 내쫓긴 했지만, 제 침대 위로 오라는 얘기는 아니었거든요?

“눈 감고 주무십시오. 나리 씨 잘 때까지 안 갈 겁니다.”

박 소령님, 귓가에 대고 간지럽히면 자고 싶어도 잠이 달아난다고요.

아아, 상급 가이드가 둘인데 왜 잠을 못 자니. 유치한 승부욕에 사로잡힌 두 남자가 살벌한 기 싸움을 벌이는데 그 사이에 낀 채로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저승사자처럼 살벌한 파장을 풀풀 풍기던 최 대령님이 있을 때가 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