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68)화 (6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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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회색 지대

[소민 씨, 퇴근하자마자 내 집으로 와. 당분간 소민 씨 오피스텔은 위험할 거 같아.] -오후 4:09

[소민 씨, 뉴스 봤어? 따로 지시 온 건 없지?] - 오후 3:13

[상부에서 윤소민 대위님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이미 전역한 사람이 무슨 일 뒤집어쓰기 쉬운 거 알죠? 마지막 경고예요. 가이딩에서 완전히 손 떼요.] - 오후 3:11

역시나.

소민은 입술을 말고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다른 가이드들은 일찍 퇴근하고 불이 켜진 가이딩실은 몇 없었다. 말끔하게 정리한 가이딩실에서 불만 끄고 나오면 되는데, 소민은 손목을 잡고 서성였다.

블라인드를 열어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어둠이 내린 길가에 오가는 차와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두 사람 정도. 수상한 사람도 없고, 차도 없었다. 안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아쉬워해야 하는 걸까.

똑똑.

“윤소민 가이드, 퇴근 안 하세요?”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바람에 소민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저 남자가 누구더라. 작년에 전역했다던 B급 가이드였다. 소민은 핸드백을 어깨에 걸고 카디건을 팔에 걸었다.

“퇴근합니다.”

“윤소민 가이드는 어디 사십니까? 차로 통근하지 않는 거 같던데. 가깝습니까?”

“버스로 여섯 정거장 정도 됩니다.”

“와, 운 좋게 가까운 곳에 배정받으셨네요. 전 안 막히면 1시간 통근입니다.”

그러시구나.

소민은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가 소민의 보폭에 맞춰 따라왔다.

“해군에서 복무하셨다고 그랬죠?”

“예.”

“이번에 해군에서 가이드 모집 공고 떴던데, 제가 거기 지원해 볼까 해서요.”

이제 자신과 상관이 없는 곳이다. 소민은 귓등으로 넘겨들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떠났으니 그 이후의 일에 신경 쓰면 안 된다. 속으로 되뇌면서.

“제가 정 과장님께 들었는데, 윤소민 가이드가 해군의 높은 등급 에스퍼와 페어셨다면서요. 혹시 제가 팁이라도 하나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제가 밥 살게요.”

소민은 우뚝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 직장 동료 B급 씨를 올려다보았다.

“선약이 있습니다.”

“아, 그러면 내일은 어떠…….”

“내일도, 주말에도 선약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철벽 치는 데엔 고단수인 소민이 말을 끊고 게이트를 지나 밖으로 나섰다. 현관에 서 있는 키 큰 남자가 살벌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소민을 향해 다가왔다. 소민이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짧은 대화가 오갔다.

아아, 남자 친구……구나.

직장 동료 B급 씨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그냥 좀 물어보겠다는 건데…….”

혼잣말로 투덜거린 게 저기까지 들린 걸까. 퇴근하는 여자 친구 마중 나온 남자가 B급 씨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물어보긴 뭘 물어봐! 소민 씨한테 수작 걸려던 거 다 들었어! 소민 씨 복귀하라고 만든 공고거든!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마!”

“함장님! 그만 좀 하십시오!”

소민은 태형의 팔을 잡아당겼다.

“소민 씨, 내 앞에서 저 남자 편들지 마. 에스퍼든 남자든 확실하게 말해야 알아듣지.”

“…….”

태형을 겪어 볼 대로 겪은 소민은 피곤한 한숨을 쉬었다.

그래, 맘대로 하라지.

남의 직장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소민은 태형이 잡은 손을 놓고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태형이 달려와 소민의 팔을 붙잡았다.

“소민 씨, 어디 가?”

“집에 갑니다.”

“위험하다고 했는데 집으로 가겠다고?”

소민은 마른 입술을 질끈 깨물고 얼음장 같은 태형의 손을 쳐다보았다.

또, 가이딩을 안 받고 제게 온 것이다.

그때 마지막이라며 손을 잡아 주고, 그다음에는 다시는 오지 말라며 입을 맞춰 줬는데, 이번에는 은근슬쩍 집까지 데려가는 거야?

끝이라고 했잖아.

“공태형 씨.”

“응?”

소민에게 함장님이 아닌 공태형으로 불리기는 처음이었다. 공태형이라 불린 태형은 가슴이 철렁거리는데, 공태형을 부른 소민은 쌀쌀맞기만 했다.

“C급 가이드인 제가 공태형 씨 집에 가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 어…….”

아, 윤소민에게 공태형은 가장 위험한 사람이었구나.

태형은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물론 이런저런 말을 굴려 가며 소민을 안아 보려고 했던 맘도 있었지만, 소민의 말을 들은 그 순간 싹 사그라들었다.

그래, 최강 녀석은 죽기 직전까지 가이딩을 참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지 않은가.

“아, 안 건드릴 거야. 정말 가이딩해 달라고도 안 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러시군요.”

거짓말을 일삼던 양치기 소년의 최후가 어땠더라.

소민은 아무런 감흥도 없이 태형의 손을 뿌리쳤다.

태형은 소민과 잠깐 닿았던 손안을 매만지며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축, 귀가 처진 강아지처럼 소민을 바라보다가 쌀쌀맞은 눈초리에 깨갱, 눈을 돌렸다.

“집으로 가지 마. 우리 부함장께서 골치 아픈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전역한 너까지 의심하는 상황이야.”

“전역한 제가 무슨 의심을 샀다는 말입니까.”

“해군의 이능력자 데이터 시스템이 해킹당했어.”

해킹?

소민의 눈이 커지며 움찔거렸다.

“쉬쉬하고 있지만 이능력자 연구소장 외에 3명이나 테러를 당했고, 기밀 사항이 유출되었어. 특히 연구소장이 테러당했던 장소에 네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바람에…….”

태형은 언젠가 자신 때문에 골골 앓던 소민을 위해서 끊어 주었던 고급 스파 회원권을 떠올렸다. 그가 선물했던 것 중에 소민이 가장 맘에 들어 했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국정원까지 움직이고 있어. 지금 집에 돌아가면 위험하다고.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국정원 정신계 에스퍼들이 없던 말이라도 만들어서 널 범인으로 몰아갈 기세야.”

“…….”

소민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그런 멋진 소설을 썼는지는 안 봐도 뻔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친절히 예고까지 했던 한다희 소령이겠지. 태형이 예전 가이드를 만나러 배 밖을 나돌아 다니는 걸 그녀도 알 터였다.

A급 가이드에 야망이 큰 한 소령은 군 상부와의 관계도 단단했다. C급 나부랭이 하나 정도 못살게 괴롭히고 매장하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울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태형을 따라가는 것은 최후의 방책이 될 수 있어도, 최선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태형이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이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일을 놔뒀을 것이다.

소민은 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잘 알았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좋다고 따라가면 얼씨구나 좋아할 테고, 싫다고 거부해도 무조건 끌고 가겠지.

“제 대답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뭐라고 해도 공태형 씨는 공태형 씨 맘대로 하지 않습니까.”

소민은 있는 힘껏 태형을 째려보았다.

“…….”

태형은 자신의 주먹을 움켜쥐고 미간을 찌푸렸다. 소민의 말대로였다. 소민이 싫다고 해도 태형은 소민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국정원 에스퍼들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미안…….”

아주 작은 목소리가 얼어 버린 입술 안에서 웅얼웅얼 맴돌았다. 소민은 그의 사과를 못 들은 것인지 태형을 지나쳐 버스 정류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침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구둣발로 뛰어 맨 처음으로 올라탄 소민이 자리에 앉았다.

태형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민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쁜 놈, 따라올 줄 알았는데…….

“후우…….”

소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미간을 쥐었다.

속으로는 넌 잘못한 게 없으니 괜찮을 거라는 말을 되뇌었지만 진정되지 않았다.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하고 지끈거리는 걸까.

버스가 출발하자 소민은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태형도, 태형이 타고 온 차도 보이지 않았다. 차창 너머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야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버스는 첫 번째 정거장에서 멈췄다.

사람이 타고, 내리고, 버스가 움직이고, 또 그다음 정거장에서 서고……. 다섯 정거장 가는 시간 동안 소민은 놓쳤던 뉴스를 읽었다.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이번 정거장은 안전 거주 구역 B-11입니다. 입구 문이 열립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버스에서 내린 소민은 태형과 한 소령의 말을 되새기며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경과를 지켜보면서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부모님의 집으로 가든가, 아니면…….

“……!”

은밀한 파장이 소민의 미세한 솜털을 세웠다. 또각또각, 평소보다 빠른 발소리가 뒷사람과 겹친다.

에스퍼에게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소민의 의심은 확신이 섰고, 가방 속 치한용 스프레이를 쥔 손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지금 도망가야 하나, 순순히 잡힌 다음 무고함을 토로해야 하나.

2선택지 모두 암담하기만 했다.

“저기요.”

누군가 소민을 불러 세웠다.

“죄송하지만, 저기까지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전에 집으로 가는 길에 치한을 만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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