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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67)화 (6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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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 나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똑…… 또옥…….

나리의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오른팔을 모두 뒤덮은 짙은 핏방울이 바닥 위로 점점이 떨어졌다. 강이 나리의 손을 놓고 안아 들었다. 따질 기력도 없는 나리는 강의 어깨에 무거운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강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나리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고, 뺨을 맞대어 볼 뿐.

“나리 중사.”

병동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근신하고 있던 일한은 나리를 안고 수술실 쪽으로 내려오는 강을 발견했다. 일한은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며 강을 노려보았다.

“3수술실로 가. 나리 중사 자리, 비워 놨어…….”

강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일한에게 나리를 넘겼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네가 수술실에 들어가 있어.”

나리를 안아 든 일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강은 나리의 동그란 이마와 생채기가 난 뺨을 쓸었다.

“황에덴이 얘 파장을…….”

“뭐? 박 소령은 뭐 하고?”

강 대신 나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빨리 저격수를 처리해 달라 했습니다. 얼마 못 버틸 것 같아서……요.”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나리가 말하자 일한은 한 번 더 놀랐다. 나리는 강의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연대장님.”

“…….”

“내일 C11 수색 작전 그대로 진행하십시오. 저도 꼭 출전시켜 주시고요.”

“나리 중사, 이 몸으로 출전하겠다고요?”

일한은 펄쩍 뛰며 안 된다고 나리를 말렸다. 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제 옷깃을 잡은 나리의 손끝만 쳐다보았다.

“카메라 앞에서 생중계로 말했는데, 제가 빠질 수 없잖아요. 어떻게든 이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강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가 강의 폭풍 속에 들어온 이상, 나리는 그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옆에 두고 싶다는 욕심이, 그 바람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그럼. 내일 제 옆에서 지휘해 주십시오.”

“…….”

살포시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에 강은 눈을 들어 나리를 쳐다보았다. 믿기지 않는 듯이 벌어진 강의 검은 눈동자 위에 나리의 미소가 비쳤다.

“저 다쳤잖아요. 아무리 감쪽같이 고쳐 준대도 병상에서 회복해야 할 에스퍼를 사지로 데려가신다는데, 대령님이 그 정도는 해 주셔야죠.”

“알았어.”

네 옆에 있을게.

“그리고 하나 더요.”

“뭔데.”

심한 변덕쟁이에 20그릿 사포보다 까칠한 저 남자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뭐든 들어줄 것만 같았다.

나리는 한 번도 제 소원을 들어준 적 없는 대마왕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전역 지원서 수리해 달라는 것에서부터 그것도 안 되면 보직 변경서라도 받아 달라는 것. 주환의 가이딩을 받을 때에 좀 귀신처럼 불쑥불쑥 나타나서 훼방하지 말라는 것과 난데없이 성질 좀 부리지 말라는 것. 고기랑 술 엄청 잘 먹을 줄 아는데 저녁 좀 한번 쏴 달라는 것 등등 그 밖에 여러 가지.

그런데 왜 하필 강이 제일 싫어하는 게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연대장님, 오늘…… 꼭, 유 소령님 가이딩 받으십시오.”

나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 ❖ ❖

너덜너덜 구멍 난 살을 메꾸고 조각난 뼈와 신경을 재생시키는 내내 나리는 수면 마취를 거부하고 눈을 뜨고 있었다.

그래서 일한은 나리의 곁을 잠시도 떠날 수가 없었다. 옆에 앉아 나리의 손을 잡고 기도하듯이, 아니 기도했던 것 같다. 언젠가 이뤄지길 바라는 아주 긴 기도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세요?”

나리가 먼저 입을 열고 물었다. 일한은 고개를 들어 나리를 쳐다보았다.

“나리 중사랑 사이좋게 강을 욕하기엔 좋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고 있던 나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타이밍도 있었나요? 우리 여태껏 용감하게 최 대령님 흉봤었잖아요. 유 소령님이 조용하니까 이상해요.”

“오늘은 나리 중사가 얘기해 주세요. 내가 계속 생각해 보는데,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서.”

왜 그랬어요?

일한이 힘줘 나리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저랑 유 소령님이랑 최 대령님 옆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잖아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이번 일이 제일 무서워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최 대령님은 새 페어를 맞으시는 건가, 그러면 유 소령님은 다른 부대로 가시는 거 아닐까, 그리고 나는 박 소령님이랑 고래보다 큰 심해 몬스터를 잡아야 하나, 나 수영 못 하는데……. 하고요.”

소독약 냄새가 나는 하얀 정적을 깨고 삣, 수술 로봇이 빙그르르 돌았다.

“우리가 다 뿔뿔이 떨어져도 어떻게든 적응하고 잘 헤쳐 나가겠지만.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며 그리워하고 싶지 않아요. ‘아, 그때…… 최 대령님이 미친 척하시는 바람에 내가 C 구역 2개나 쓸어 버렸잖아?’ 하고 떵떵거리며 유 소령님이랑 술 마시고 싶어요.”

일한은 속으로 나리의 소원을 이뤄 달라고 빌었다.

“나도요.”

그녀의 소원이 내 소원이에요, 하고.

“유 소령님…….”

“네. 나리 중사.”

나리는 하얀 천장과 눈부시게 내리는 동그란 전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원작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두 주인공 곁에 있으면 이번에도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가지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든 잘될 거예요.”

“그럼요. 저 어디 안 가요. 내가 어디 간다고 그랬어요?”

일한은 나리에게 따졌다. 화장실도 못 가고 나리의 손을 잡고 가이딩하는 중인데, 3주 근신 처분 받은 사람을 어디 멀리멀리 귀양 보내는 것처럼 들려서 말이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리는 훌쩍 다가오는 일한이 갑작스레 떠나 버릴 것 같아서 불안했다.

예민한 오감 때문인지 몰라도 에스퍼는 묘하게 육감도 잘 들어맞았었기에 나리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누군가의 예고같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일한은 땀이 송골송골 맺힌 나리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면서 옅게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 말 듣지 마요. 내가 그랬잖아요. 난 나리 중사 가이드 될 거라고.”

그렇게 돼서 이 불안감이 누그러지면 좋으련만, 나리는 일한의 말이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달콤한 사탕발림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리는 농담처럼 일한의 말을 되받아쳤다.

“에이. 그러다 매칭 테스트 결과가 안 좋으면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숫자 하나 바꾸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거든요.”

일한이 자신만만하게 눈을 찡긋거렸다. 나리가 풋, 하고 웃어넘기자 일한이 눈을 껌벅거리며 정색했다.

“왜 웃습니까? 난 진심입니다? 박주환 소령 매칭값보다 더 높게 할 수 있는데?”

❖ ❖ ❖

[오늘 아침 국방부에서 발표한 SS급 가이드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었습니다. 현재 이능력자 특수 연대에서 SS급 에스퍼 최강 대령과 같이 훈련 중이라고 했는데요.

오후에 직접 황에덴 가이드와 최강 대령을 취재하러 간 저희 채널 기자에게서 더욱 놀라운 보도를 전달받았습니다.

SNS 플랫폼에서 순식간에 퍼지고 있는 이능력자 특수 연대, 알파81부대의 습격 사건 현장에 있었던 서준희 기자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퇴근할 준비를 하던 소민은 우뚝 멈춰 섰다.

주환이 있는 부대에서 습격 사건이라니. 소민은 센터 로비에 있는 전광판을 돌아보았다. 두어 명의 직원들이 혀를 차며 열띤 얘기를 하고 있었다.

“습격이라니, 무슨 일 있었습니까?”

“오늘 아침 출근길부터 난리였잖아! 국방부가 갑자기 SS급 가이드 발표하고, SS급 페어가 세계 최초로 나온다는 둥…….”

“아, 윤소민 가이드 점심에 너튜브 생중계 못 봤습니까? 지금 인스타랑 짹책, 왓챕, SNS라는 SNS 죄다 조회 수 1위, 2위가 오늘 생중계 클립이었다니까. 지금 원본 유포자랑 플랫폼 대표는 군사 기밀 누설로 체포됐다고 그것까지 생중계했다잖아.”

“국가 기밀 누설은 무슨! 거 다, 정치적 쇼지.”

“쇼라뇨? SS급 에스퍼가 SS급 가이드랑 페어 하기 싫다면서 기자들한테 총을 쐈는데!”

소민은 커다랗게 뜬 눈을 끔벅거리며 다시 전광판을 쳐다보았다.

[내가 SS급 꼬맹이 가이드를 페어로 계약할 건가, 의 답은. 미쳤습니까? 열여섯 살짜리랑 페어 계약을 맺고 전쟁터에 데려가라는 말,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닙니까? ……각자 맡은 곳에서 자신이 가진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작전과 작전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지휘관만 있으면 됩니다. 이상입니다.]

화면 속에는 강의 얼굴이, 그리고 익숙한 주환과 일한, 주환의 에스퍼 얼굴도 보였다. 강의 엄숙한 얼굴 밑으로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SS급 에스퍼, 알파81부대 연대장, 최강 대령. 기자에게 ‘미쳤냐’ 막말. SS급 가이드와 페어 거부, 과연 누가 이기적인가? 국방부, 군 고위층 특혜, 사실무근이라 밝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남의 직장을 제 직장처럼 드나들며 가이딩을 받던 태형도 며칠 안 오고, 예약이 취소된 것도 2건이나 있었고, 응급 가이딩은 1건도 오지 않아서 대체로 평화롭게 흘러간 하루였다.

여유가 생긴 김에 조용히 스트레스나 풀자고 안 읽던 책을 읽은 게 화근이었다.

소민은 워치의 업무 모드를 껐다.

띵.

[발신자 불명 번호로부터 온 메시지가 3건이 있습니다. 삭제하시겠습니까?]

평소 같으면 바로 삭제했을 텐데 혹시 모를 지시나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하고 확인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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