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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63)화 (6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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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 심장아, 버텨

나리는 움찔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뮬레이션 중에, 그것도 마지막 시뮬레이션 훈련 중에 이런 일이 있었나? 나리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강의 눈치를 보았다.

“박 소령님! 그,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됩니다!”

“그래도 어젯밤에 가이딩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주환이 작게 얼버무리며 슬쩍 나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지금 말하는 게 이상하단 건 알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어서.”

약속을 어긴 나한테 삐진 것 같아서. 어떻게든 방해꾼들을 내버려 두고 나리에게 달려갔어야 했다는 복잡한 마음에 밤새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주환이 다시 한번 더 사과했다.

“박 소령님께서 미안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가이딩 때문이 아니라 제 실수로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진 겁니다. 그러니까 바, 박 소령님, 그만하셔도 됩니……다아…….”

주환은 나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꼭 끌어안았다. 나리는 어쩔 줄 모르며 뻣뻣하게 굳어 숨을 참았다. 숨까지 쉬면 주환의 가이딩에 온 힘이 빠져나갈까 봐, 화악 열이 오르며 빨라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심장아, 버텨. 조금만. 천천히.

“박 소령님, 이제 괘, 괜찮습니다아…….”

나리는 가느다랗게 앓는 목소리로 주환의 가슴을 밀어 냈다.

주환은 팔을 느슨하게 풀고 자신의 손을 폈다가 주먹 쥐었다. 나리의 다리를 주물렀던 손바닥 안이 이상하게 껄끄러웠다. 분명 나리의 파장이었는데, 어딘가 구겨진 듯이 아니, 갉아 먹힌 듯했다.

〈황에덴의 가이딩은 에스퍼의 이 불규칙적인 파동을 아예 없애고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흐르게 합니다.〉

일한의 말이 떠올랐다.

주환은 으득, 이를 깨물며 에덴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강은 뭐 하고 있는 것인가! 에덴이 나리를 가이딩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하지만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삼킨 이유는 이미 강이 위압적인 파장을 발산하며 에덴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살벌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리의 귓가에도 들렸다.

“너, 내가 모를 것 같았지? 가만히 있으니까 만만하지?”

“시, 실수였다고 그랬잖아요! 실수라고요. 씨, 그래 봤자 시뮬레이션이고 다친 사람도 없잖아요.”

“거기 뭐 해. 얘 데리고 인사과 가서 퇴교시켜.”

“나 퇴교시키면 우리 아버지가 알고 더 많이 실망하실 텐데. 아저씨, 그 후는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러는 너는 네 아버지에게 뭐라 징징댈 거지? 최강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심심해서 몸을 움직이다가 실수로 사고를 일으켰다? 그래서 최강이 퇴교시켰다. 장교도 아니고 작전 지휘권도 없는 햇병아리 주제에 은근슬쩍 가이딩에 손을 대? 지금 네가 내 걱정 할 필요가 있을까?”

강의 파장이 위협적으로 에덴을 짓눌렀다. 숨통을 죄이는 강의 파장을 건드리기만 해도 강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아서, 에덴은 가이딩으로 강을 막지도 못하고 덜덜 떨었다.

“아, 아이 씨…….”

실수가 아니라 페어 없는 에스퍼들을 조금 도와줬을 뿐이라고 할 걸 그랬나?

에덴은 나리 쪽을 째려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현균의 말대로였다. 다른 에스퍼들을 가이딩했을 때에는 가만히 있더니, 나리의 쉴드를 건드리자마자 강은 홱 돌아서 공간 폐쇄 어빌리티로 에덴의 가이딩을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퇴교하라 윽박질렀다.

- 황에덴 생도님, 잘못했다고 하십시오. 저희 연대장님은 한번 꼭지 돌면…….

누군가 에덴에게 몰래 귀띔을 해 주었지만 잘못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다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더 분했다. 에덴은 부들부들 주먹 쥔 손을 떨면서 작게 말했다.

“잘……못……니다.”

이미 강은 빨리 얘를 치우라는 한마디만 하고 에덴에게서 등을 돌렸다.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에덴은 자신의 팔을 잡아서 끌어 내리는 가이드의 손아귀에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잘못했다고! 이거 놔!”

에덴은 눈을 부라리며 악을 썼다. 앙칼진 새끼 살쾡이가 따로 없었다.

강과 에덴의 실랑이를 보며 작전을 계속 진행해야 하는 대원들은 한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자진해서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았다.

❖ ❖ ❖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것도 급격하게.

[읽지 않은 메시지가 48건이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띵.

[안녕하십니까. 좀 전에 연락을 넣은 TKBS채널 이능력자 보도국 팀장 국이선입니다. 오늘 국방부 조사 보고 브리핑으로 오랫동안 염원하던 국토 수복에 관해 특수 연대와 그 작전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내일 있을 C11 작전에 대해서 취재를 허락해 주십사, 재차 연락을…….]

띵.

[안녕하십니까. 국민채널의 강연수 대표입니다. 오늘 국방부의 브리핑으로 C12에 있었던 모의 작전이 공개돼 아시아 최초 SS급 에스퍼와 SS급 가이드 페어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에서 쏠리고 있습니다. 최강 대령님은 그동안 세계 여러 균열들과 위험 지역을…… 그래서…… 간단하게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인터뷰를…….]

띵띵띵…….

[읽지 않은 메시지가 56건이 있습니다. 확인하시…….]

띵.

[최강, 국민 히어로 되셨겠구만. 좋겠어. 한동안 잠잠하다가 이게 또 무슨 일이래? SS급 가이드? 넌 무슨 가이드 복이 이렇게 차고 넘치냐? 육군은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지원도 빵빵해서 좋겠어.]

“하아, 공태형…….”

강은 시끄러운 메시지 알람에 워치를 집어 던지고 싶었다.

메시지를 끈질기게 보내는 것은 그나마 무시라도 할 수 있지, 벌써 부대 앞 검문소에 허가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줄 서 있었다.

장대신 소령은 훈련 중에 퇴출당한 에덴을 데리고 나가 이미 인터뷰를 시키고 있었다.

“유일한. 너는 저거 해결 안 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강의 집무실에서 벌러덩 누워 책을 읽고 있던 일한이 한숨을 쉬며 책장을 넘겼다.

“난 아직도 근신 중이잖냐. 숙실 안에서 자숙하며 반성해야지. 아니, C12 사건을 이렇게 마무리 지을 거면 근신이 풀릴 법한데도 이상하네…….”

일한은 아직도 강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장대신 소령과 에덴을 막지 않는다. 오히려 갓 발현한 SS급 구세주를 전장에 내세우지 않고 가만히 있는 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말소리도 들렸다.

“아니, 저렇게 SS급 가이드와 페어 할 거면 우리는 왜 앞에 내세워 굴리는 거냐? 연대장님 혼자서 C12를 개박살 낸 거라면서.”

“그러니까 말이다. 그냥 지금이라도 본래 작전대로 하는 게 더 안정적인데.”

“쉬쉬. 연대장님 다 듣는다. 조용히 해! 바보들아! 말로 하지 말고…….”

일한은 흙빛으로 굳어져 가는 강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현균의 언론 플레이에 못 이기는 척 끌려가던 강이었다. 파병에서 죽다 살아 돌아왔을 때에도, 페어 계약을 깬다며 잠수를 탔었을 때에도 현균은 언론을 이용해 강에게 한국에 하나 남은 희망이라는 타이틀을 씌웠다.

그리고 일한까지 내세워 대대적으로 세계로 뻗어 나가는 자랑스러운 페어를 홍보했다.

“…….”

강은 가만히 서서 창밖,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검문소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몰려든 차량들 사이에서 커다란 카메라가 강이 서 있는 쪽을 확대했다.

확, 쏴 버리고 싶네.

강은 손이 근질거렸다. 사납게 일렁거리는 강의 파장을 견디다 못한 일한은 책을 탁, 덮고 강을 돌아보았다.

“으휴, 내가 가서 기자들 다 물리라고 할까?”

“……아니.”

“어, 그래. 어? 뭐?”

강의 입에서 의외로 담백한 대답이 나왔다. 일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말해 달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강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주환의 손을 잡고 식당 쪽으로 가는 나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강은 손을 들어 창문을 짚었다. 두꺼운 강화 유리 안쪽과 바깥쪽은 같은 듯 달랐다.

그가 있는 곳은 항상 폭풍이 휘몰아치고 집채만 한 파도가 사방에 몰아치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쪽은 같은 세상인 듯하면서도 비현실인 것처럼 잠잠했다.

그래서 이 유리 벽 안의 소용돌이가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다. 네가 그렇게 얼빠진 표정으로 있다가도 크게 웃을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너와 내 거리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것도 괜찮다고 여기면서.

“이나리 중사, 내 집무실로 올라와라.”

강은 나지막이 나리를 불렀다.

주환과 시시덕거리던 나리가 흠칫거리며 좌우를 둘러보더니 강의 집무실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지금, 말입니까?”

응. 지금.

나 이제부터 안 괜찮을 거니까. 빨리.

나리는 다짜고짜 집무실로 올라오라는 강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매번 자신이 주환과 오붓하게 있는 줄은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부르냔 말이다.

“저만 갑니까? 아니면 박 소령님도 같이 갈까요?”

“……?”

대화의 맥락과 동떨어진 말들이 나리의 입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주환은 나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어딘가에서 나리를 부르고 있을 강을 찾기 시작했다.

“하.”

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히 너만 오라고 부른 거다. 그 뒷배가 구린 자식에게 웃어 주지 말라고.

“……데리고 오든가 말든가.”

강은 ‘나 지금 엄청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면서 쌀쌀맞게 대꾸했다.

나리는 직감적으로 감지했다. 지금 강의 분위기로 미뤄 보아 혼자 가면 엄청 갈굴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주환의 듬직한 등에 숨어 면피해 보자며 나리는 주환을 잡아당겼다.

“박 소령님. 연대장님께서 소령님도 같이 오라고 하시는데요?”

“저도 말입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아. 그럼 그렇지.

주환은 이제 와서 최강이 작전을 또 바꾸지만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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