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은 필요없어 (60)화 (60/148)

16642610018022.jpg

061. 날 협박할 수 있는 가이딩이 아니라, 이나리야

주환은 물 잔을 탁, 내려놓고 일한과 강을 쏘아보았다.

“내가 우연이라고 해도 믿지 않기로 이미 답을 내린 거 같은데. 내게 바라는 게 뭡니까?”

강은 픽 조소했다. 그리고 메뉴판에 꽂은 단자를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그 단자를 주환에게 내밀었다.

“네 워치에 꽂아.”

“…….”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래, 놈들에게 이용당하는 졸병이라 그럴 수도 있다 쳐 보자고. 네 가이딩 보고서가 무슨 내용으로 어디로 갈지 내가 어떻게 알아? 공태형에게만 갈까? 아니면 공태형 위의 상부? 상부 어디? 어느 연구실? 한국 이능력자 협회? 아니면 어디 지하 깊숙한 곳? 아니면 뭐, 해상 어딘가에 있는 군사 연합 비밀 연구 시설? 씨발, 내가 어떻게 알아?”

“……군인을 해킹하는 것은 군법으로도 중대죄입니다.”

“내가 꽂는다고 했어? 네가 스스로 네 워치에 꽂으라고.”

“…….”

“다른 목적을 숨기고 군 내에 침투한 사람을 첩자라고 하잖아? 떳떳하면 해 보라고.”

“첩자? 지금 저더러 첩자라고 하셨습니까?”

강과 주환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에휴……. 일한은 한숨을 쉬면서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집어 쌈을 만들었다.

“박주환 소령님, 소령님과 나리 중사의 매칭률은 세계 기록입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정상 범위에서 멀어요. 제 가정은 이렇습니다. 황에덴이 다른 에스퍼의 파장을 휘어잡고 있는 동안은 적과 아군의 경계가 없습니다. 만약 매칭률이 정상 범위보다 높은 가이드가 황에덴의 가이딩 범위에서 자신의 에스퍼를 떨어트릴 수 있다면?”

“…….”

일한은 한입 가득 쌈을 욱여넣고 그다음에 뭐가 일어날지 짐작 가지 않느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환은 고개를 떨어트리고 강의 손바닥 안에 있는 단자를 바라보았다. 강은 흥, 코웃음을 치며 단자를 올렸던 손을 천천히 주먹 쥐었다. 포커페이스로 굳은 주환의 얼굴을 일그러트리려는 듯이.

“이나리를 이용하려고 하겠지.”

“…….”

“수도 없이 그랬어. 날 협박할 수단은 가이딩이 아니라 이나리니까.”

“…….”

“타임아웃이야. 박주환. 1년이건 3개월이건 네 녀석이 이나리를 데려갈 일은 없을 거야.”

주환은 핏대가 도드라진 강의 주먹을 보고 입 안을 짓씹었다.

〈이 중사와 페어가 되면 위에서 박 소령에게 따로 맡길 일이 있을 걸세.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고, 이 중사로 해.〉

주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재차 되뇌어 보아도 주환은 나리를 콕 집었던, 특이 발현 케이스 전문가 김 실장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다른 동기에 비해서 자신의 진급이 빨랐던 것도 과연 가족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입김이 있었던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여튼 박 소령의 질문에 저의 답은 이렇습니다. 황에덴이 매칭률을 따지지 않고 모든 에스퍼의 파장을 컨트롤할 수 있다면, 나머지 가이드들은 자신의 에스퍼를 컨트롤할 수 없을 겁니다. 단, 박주환 소령과 같이 높은 매칭률을 보이는 페어는 황에덴의 가이딩 안에서도 컨트롤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환은 팔짱을 끼고 강과 일한을 노려보았다. 미움받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첩자라고 의심을 받으니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서 C11 작전을 180도 바꿨습니다. 강은 전혀 나서지 않도록, 나리 중사와 박 소령 두 사람을 주축으로 움직여서…… 혹시 모를 황에덴의 가이딩에 전선에 혼선이 오지 않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딴 맘을 품고 다른 편에서 황에덴을 앞세우기 위해 판을 뒤흔들 변수를 배제할 수 없단 말입니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내 한목숨 챙기기도 힘든 작전이지 않습니까.”

“단언하지 마십시오. 박주환 소령님.”

일한은 해맑게 웃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여유로웠다.

“판은 벌였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면, 명확히 알게 될 테니까요.”

❖ ❖ ❖

소등 시간이 지났다.

나리는 천장을 쳐다보며 뒤척거렸다.

“대체 어디까지 가신 거람? 유 소령님이랑 박 소령님은 연락도 없으시고……. 하아.”

메시지와 통화를 또 누를까 하다가 손목을 툭 내렸다.

“최 대령님이 없을 때, 빨리 자야 하는데에. 다들 어디로 가신 거야아!”

재워 주는 가이드도 없어 뜬눈으로 밤새우던 것이 바로 2달 전인데, 꿀잠을 맛본 나리는 그 이전의 밤을 어떻게 견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리는 베개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외쳤다.

“이 시간에 라면 먹는 애 누구니……. 아아. 3층! 애 잡니? 신음 좀 적당히 내라고! 오늘 당직 사관 누굽니까? 라면 먹는 애들 안 잡고!”

미치겠다. 신경이 예민해진 나리가 발버둥을 치자 여기저기서 에스퍼들이 “너나 닥쳐.”라고 한마디씩 왈왈거렸다.

나리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른세수하고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휴지를 돌돌 말아 향수를 칙칙 뿌리고 콧구멍을 막았다. 그러고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단단히 틀어막고 워치를 톡 건드렸다.

모든 감각을 무시하고 한곳에 집중해야지, 이러다가는 예민해진 신경 때문에 얼마 안 남은 수면제를 털어 넣게 될 거 같았다.

“딴생각에는 뭐니 뭐니 해도 므흣한! 그, 그거지…….”

나리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웹 검색을 시도했다.

아까 낮에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그 ‘멸, 집, 세’를 찾아내야 한다. 유일한 팬방을 중심으로 백방으로 검색해도 ‘멸, 집, 세’에 대한 흔적은 없었다. 나리는 다시 그 익명 게시판으로 접속했다.

한국 육군 사관 학교 이능력자 어둠의 익명 게시판-2xxx.03.01 이번 2708기 애들 중 SS급 있음.

외부인이 답글을 달 수도 있을까? 나리는 답글을 톡 눌러 보았다. 입력 창이 생겼다. 참으로 보안이 허술한 익명 게시판이었다.

나리는 혹시 모르니 원본 소설의 링크를 달아 준 ‘익명12’와 ‘익명8’, ‘익명1’에게 답글을 달아 보았다.

↳익명13] 혹시, 이거 원본 파일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니면 내용 아는 사람?

오래전의 게시 글이라서 바로 답변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익명1] 팬방 폭파된 지가 언젠데 이걸 왜 지금 와서 찾음?

“아, 팬방이 폭파되었구나.”

나리는 혹시 모를 희망을 가지고 답글을 달았다.

↳익명13] 옛날에 읽었는데, 결말을 까먹었어. 갑자기 궁금해져서.

↳익명1] 연중됨. 최강이 대대적으로 고소하는 바람에. 그 많던 어둠의 팬방도 다 물갈이된 거 몰랐듬?

↳익명13] 〣(ºΔº)〣 그, 그랬듬?

↳익명1] ㅇㅇ. 최강유일한 팬픽은 이제 금기의 유물임. 님 궁금해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영창 끌려감.

↳익명13] 나 링크 클릭하면 보안 코드 01642008이라는 게 뜸. 팬방 폭파된 거 맞음? ( ˃̣̣̥᷄⌓˂̣̣̥᷅ ) 〈멸, 집, 세〉는 꼭 찾아 갠소하고 싶은데, 정말 아는 사람 없듬?

↳익명1] 나도 이제 늙어서 기억이 안 나는데, 님 때문에 갑분 궁금. 기달.

“익명1 님 제발요! 제발!”

나리는 두 손을 꽉 모아 쥐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익명1] 13아, 그때 팬방 운영했다가 영창 간 내 칭구한테 물어봤음. 팬방 열리긴 열리는데, 모든 팬픽 내용은 지웠다고 함. 법정 싸움 하느라 증거 자료로 프린트한 거 있는데 찾아본다고 함.

↳익명13] 진짜!?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임! (´ε` ʃƪ)♡

↳익명1] 나님을 찬양하라! 어서!

↳익명13] 1번님 능력 쩐다! 대단해! 와아!✧*。٩(ˊᗜˋ*)و✧*。 ٩( ᐛ )و ✧*。

희망이 보이는 거 같았다. 프린트로 뽑은 소설 원본이라니!

나리는 떨리는 손을 가슴에 올렸다. 장장 10년 동안 보이지 않았던 탈출구가 보였다. 빙의 이전, 평범했던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익명1] 그런데 13아, 보안 코드 01642008는 처음 들어 봄. 나는 잘 들어가지는데, 네 전뇌칩 오류인 듯. 웹상 보안에서는 저런 코드 안 뜸.

↳익명13] 엥? 전뇌칩 오류? 나 전뇌칩 시술한 적 없음. 허벅지에 추적칩만 심었듬. 워치에 직접 렌즈 옵션만 했는뎀? 웬 전뇌칩 오류? 〣(ºΔº)〣

↳익명1] 흐음, 내가 잘못 알았나 봄. 프린트물 받으면 어디로 보냄?

나리는 외출할 때 자주 가는 편의점 주소를 대고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백 번 했다. 당신은 지구를 구할 영웅님이라고 아낌없이 찬양했다.

“됐다! 됐어! 됐…….”

기쁨에 차서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던 나리가 우뚝 멈췄다. 끼잉거리는 이명과 함께 둔탁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기시감이 들었다.

나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어폰을 빼고 콧구멍에 넣은 휴지도 뺐다.

후각, 청각은 물론이고 팔랑팔랑 흩날리던 먼지가 손등 위에 내려앉는 미미한 촉감까지 파도처럼 나리를 엄습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처음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 느꼈던 미지, 차마 그 속을 헤집을 수가 없어서 손도 못 댔던 진실이었다.

나리는 천천히 손을 들어 목덜미 위 후두부에 난 흉터를 더듬었다. 나리가 볼 수 없는 후두부의 화상 자국에서 빨간 불빛이 깜박였다.

무슨 사고였을까. 어쩌다가 이 몸의 주인이 오랫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다치게 된 걸까……. 처음에 눈을 뜨자마자 적응도 못 해서 뺑뺑이만 도는 바람에 알아볼 새도 없었지.

“이나리는…… 쉴드 어빌리티 에스퍼잖아. 그럼 이건 어쩌다가 다친 거야?”

앞뒤가 맞지 않는 건 최강뿐만이 아니었다.

나리는 깨질 듯한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먹는 라면 냄새와 오수관을 내려가는 오물 냄새,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 열락에 앓는 신음, 드르렁거리는 괴물의 코골이. 조용해야 할 캄캄한 밤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여기까지가 마지노선, 이 이상 들여다보지 말라고.

나리는 이 두통이 가이딩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환의 차를 운전할 게 아니라 가이딩에 홀린 척 순순히 그의 품에 기댈걸, 하고 후회하면서.

0